‘공공극장Common Theater’이라는 이름에는 연극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공공의 것이 되기를 바라는 윤서하 대표의 바람이 담겨있다. 이곳에서는 평범한 누군가의 삶도 한 편의 연극으로 거듭날 수 있다.
나를 해방시키는 연기
사당동에 위치한 스튜디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넓은 창 너머로 우거진 녹음이 눈에 들어왔다. 햇살이 환하게 비치는 스튜디오에는 여느 공연 연습실처럼 거울로 둘러싸인 벽과 여럿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커다란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다. 연기 경험이 전혀 없었던 많은 사람이 이곳 공공극장에서 처음으로 연기를 접하고 자기만의 연극을 완성했다.
공공극장 윤서하 대표는 자신이 느낀 연기의 치유 효과를 더 많은 사람에게 전파하고자 공공극장 운영을 시작했다. 십 대 시절 가수를 꿈꾸며 연습생 생활을 했던 윤 대표. 하지만 소속사가 문을 닫고 데뷔가 무산되자, 새로운 진로를 찾기 위해 입시 연기 학원을 찾아갔다. “어려서부터 연습생 생활을 하며 완벽한 모습만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 속에 살아왔어요. 그런데 연기를 하려면 먼저 그런 자의식을 떨쳐내야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3개월쯤 지나니까 해방감이 찾아왔어요. 전처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저를 드러낼 수 있게 된 거죠.” 연기의 매력에 눈뜬 윤 대표는 마음을 다잡고 연기 전공으로 대학에 진학했다. 연극을 알면 알수록 인간미가 살아있는 이 장르를 사랑하게 되었지만, 배고픈 연극계의 현실을 마주하자 질문이 따라왔다. 이렇게 좋은 연극이 왜 비주류 취급을 받을까? 내가 연극을 대중적인 예술로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없을까? 그 순간 머릿속에 처음 연기를 접했을 때 느낀 즐거움이 떠올랐다. “그 즐거움은 객석에 앉아 연극을 보는 것만으로는 느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연극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직접 연기를 해보면 분명 좋아할 거야,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런 무모한 생각에서 공공극장의 문을 열었죠.”
2019년 노량진의 단칸방에서 단 한 명의 참여자와 시작한 공공극장은 지금까지 총 14편의 연극을 제작하고, 현직 배우들과 함께 다양한 연기 수업 및 체험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커뮤니티로 성장했다. 공공극장이 다른 연기 학원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바로 연기를 ‘보는 자’가 아닌 ‘하는 자’의 만족을 우선시한다는 것이다. “주입식 교육을 지양하고 참여자의 감정 표출을 도와드리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예를 들어 화를 내고 싶은데 잘 안 되는 분이라면 ‘제가 던지는 물건을 피하면서 대사를 쳐보세요’ 하고 자극을 드리는 거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역할에 몰입해 나를 가두고 있던 틀을 깨는 경험을 하게 돼요. 평소 사회생활을 하면서 감정을 억누르고 살았던 분들도 여기서는 안전하게 감정을 드러내고 해소할 수 있어요.”
나만의 연극 만들기
공공극장을 대표하는 프로그램은 ‘살롱 연극’과 ‘공공 연극’이다. ‘살롱 연극’은 총 4주간 자신의 삶을 주제로 얘기를 나누고 최종적으로 자기만의 단편 연극을 실연하는 프로그램이다. 1주 차에는 나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비언어 즉흥 연기를 통해 말에 의지하지 않고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운다. 2주 차에는 주변 사람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대화 즉흥 연기를 한다. 극 중 인물이 어떤 관계와 상황에 놓여있느냐에 따라 똑같은 대사도 다채롭게 표현할 수 있음을 배운다. 3주 차에는 짝을 지어 ‘내 인생 가장 찬란했던 순간’을 이야기하고, 서로의 찬란했던 순간을 재현하는 메소드 연기를 체험한다. 이렇게 자신의 삶을 쭉 돌아본 다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찾아 4주 차에 단편 연극으로 선보인다. ‘공공연극’은 본격적으로 무대에 서는 경험을 하고 싶은 사람을 위한 장기 프로그램이다. 전문적인 연기 코치와 리허설을 거쳐 연극 한 편을 무대에 올린다.
1년에 한 번 모집하는 ‘공공극장 시즌 배우’로 선발되면 6개월에 걸친 심도 있는 창작 작업에 참여해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연극을 선보일 수도 있다. 시즌마다 정해진 주제에 맞춰 배우들이 대화를 나누고 즉흥 연기를 펼치는데, 이 과정에서 나온 아이디어를 모아 윤 대표가 직접 대본을 쓴다. “고전 희곡이나 번역극은 아무래도 비전공자가 접근하기 어렵잖아요. 저희가 함께 만드는 대본은 누구나 공감할 만한 주제와 익숙한 일상어로 구성되어 있어 훨씬 접근이 쉬워요. 모든 배우의 출연 비중이 비슷하게 맞춰져 있기 때문에 주인공 자리를 두고 경쟁할 필요도 없고요.”
공공극장은 그동안 시즌 배우와 함께 네 가지 주제의 공연을 선보였다. 마스크를 쓰고 생활하는 팬데믹 시기를 맞아 사회적 가면에 대해 생각해 보는 <페르소나>, 어른이 되기 위해 애쓰던 어린 시절을 돌아보는 <어른 아이>, 죽음을 떠올리며 자신의 삶을 정리해보는 <나의 장례식>, 그리고 올해 선보인 신작 <어른 방학>이다. “<어른 방학>은 ‘어른으로 살아가는 게 왜 이렇게 힘들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이야기예요. 시즌 배우들과 이 주제로 얘기를 나누다가 결국 모든 불안은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에서 비롯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어요. 나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거죠. 이러한 성찰을 반영해 세 가지 에피소드를 구상했어요.”
6명의 시즌 배우와 함께 완성한 연극 <어른 방학>은 지난 9월 소극장 을지공간에서 관객과 만났다. 약 2시간 동안 세 편의 에피소드가 옴니버스 형식으로 펼쳐졌고, 각 에피소드마다 2명의 배우가 주연을 맡았다. 연극영화과를 나왔으나 배우의 꿈을 접은 카페 사장과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여전히 배우의 꿈을 놓지 않은 대학 동기, 현재를 즐기고 싶은 여자와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남자 커플, 명문대를 나오고 대기업에 다니는 언니와 인플루언서로 성공하고 싶은 동생 사이의 갈등이 차례로 그려졌다. 나와 주변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는 관객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고, 배우들의 프로 못지않은 연기력도 감탄을 자아냈다.
윤 대표는 이렇게 함께 연극을 만드는 과정을 통해 나를 알아가고 타인과 소통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연기는 내가 나와 연결되고, 타인과 연결되게 도와주는 도구예요. 극 중 인물에 대한 성찰은 결국 나 자신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기 마련이죠. 동료 배우와 호흡을 맞추며 유대감을 쌓고, 객석의 관객과 감정을 공유하는 것도 특별한 경험이고요.” 윤 대표는 현재 노인복지관에서도 연기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사회 활동이 어려운 노인들의 우울감 해소와 관계 맺기에 연기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며, 언젠가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복지 차원에서 연기를 향유하는 날이 오기를 꿈꾼다는 말을 덧붙였다. “연기라는 도구를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널리 퍼트리는 것. 그게 제가 공공극장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표예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29호 2023년 10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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