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usical

더뮤지컬

magazine 국내 유일의 뮤지컬 전문지 더뮤지컬이 취재한 뮤지컬계 이슈와 인물

피처 | [CRITIC] <넥스트 투 노멀> '평범한 가족'이라는 희망 [No.212]

글 |정수연(공연 평론가) 사진 | 2022-09-23 651

<넥스트 투 노멀>

'평범한 가족'이라는 희망

 

 

‘가족극’의 계보


5월에 ‘가정의 달’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계절과도 무관하지는 않은 것 같다. 햇살 좋고 향기로운 이 계절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처럼 가족이 우리에게 행복의 이유가 되길 바라는 마음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가족이라는 존재가 5월만큼 화사하고 따뜻하게 느껴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핏줄로 이어진 인연이라는 필연이 있지만 그 필연이 당연하게 아름다운 건 아니기 때문이다. 가족은 인간이 경험하는 최초의 관계인바, 관계의 어려움과 부딪힘은 가족이라 해도 예외가 아니다.


오래된 이야기 안에 언제나 가족이 있는 이유가 이것이다. 이야기의 본질이 갈등이라면 가족은 갈등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갈등의 원형은 끔찍하다. 그리스의 ‘가족극’은 영아 유기와 근친상간, 존속살인과 자식 살해 등 입에 올리기도 꺼려질 만큼 잔혹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셰익스피어도 마찬가지다. 리어든 햄릿이든 그의 ‘가족극’에서 완고하고 어리석은 부모 세대와 마음과 책임 사이를 헤매는 자식 세대는 끝내 화해와 공존을 일궈내지 못한다. 이런 이야기에 붙은 이름이 왜 ‘비극’인지 충분히 알 것 같다.


근대의 ‘가족극’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때부터 가족의 개념은 사적인 영역으로 분리되고 가족의 단위도 부부로 축소될 만큼 개별화되지만 갈등의 긴장은 여전하다. 근대의 대표적인 작가 입센의 작품을 보시라. 남편의 세계에 매몰되어 살다가 그 세계의 실체를 깨닫게 된 아내가 집을 나가버리는 『인형의 집』이 그렇고, 아버지가 물려준 매독에 걸려 죽어가는 아들과 이 모든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어미를 다룬 『유령』이 그렇다. 가족은 억압과 위선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렇듯 가족극의 계보에서 행복하고 화목한 가족의 이야기는 당최 찾아보기가 어렵다. 가족은 누구 하나 성한 사람이 없을 만큼 갈등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왜 이런 걸까?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시작의 장소가 바로 가족이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는 사회 안에서 태어나자마자 사람에게 주어지는 이름은 두 개다. 하나는 개인의 이름이요 또 하나는 관계의 이름이다. 이 두 개의 이름 사이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질문하고 탐색할 때 갈등은 생겨나고 상처는 드러나며 충돌은 거세지는 거다.


뮤지컬에 가족 이야기가 적잖은 이유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서사를 기준으로 볼 때 뮤지컬은 ‘나는 누구인가’를 집요하게 찾아가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를 묻다가 마침내 ‘나는 누구인지’를 인정하는, 뮤지컬은 ‘아이 엠(I am)’의 장르이다. ‘아이 엠’을 망각하거나 놓쳐버릴 때(<스위니 토드>처럼!) 뮤지컬은 비극이 되고 만다. 정체성을 묻는 질문을 던지기에 가족이라는 틀은 뮤지컬에서도 첨예한 장소임이 맞다. 거기에 쉽게 대답하지 않고 깊게 생각하기를 선택했을 때 뮤지컬은 자주 문학의 계보와 연결된다. <넥스트 투 노멀>이 그런 작품이다.

 

 

미국 현대 희곡의 유산


비단 <넥스트 투 노멀>뿐 아니라 <펀홈>이나 <디어 에반 핸슨>처럼 가족 이야기를 진지하게 다루는 뮤지컬에는 공통적인 패턴이 있다. 첫째, 누군가의 죽음이다. 분명 죽어 여기에 없지만 가족 관계 안에서 그는 사라지지 않는다. 둘째, 이해하지도 이해받지도 못하는 관계 안에 서로가 놓여있다. 가족이라는 관계가 더 버거운 이유다. 셋째, 완전한 회복이 이루어질 수 없다. 하지만 그 빈자리에서 무언가 희망의 가능성을 찾아낸다. 뮤지컬의 전형적인 해피엔딩이 아니라 좀 더 현실적인 희망을 모색하고 싶은 의지가 심어져 있는 거다.


이런 패턴은 20세기 초반 미국 현대 희곡의 전통과 그 뿌리를 같이한다. 가족극은 미국 문학에서 아주 중요한 테마로, 유진 오닐과 테너시 윌리엄스, 아서 밀러 같은 작가들이 천착했던 주제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두 가지 가치는 개인의 자유와 가족 공동체이다. 여기서 딜레마가 생겨나는데 애정과 혈연의 관계는 개인의 자유라는 목표에 자주 굴레로 변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굴레 안에 안정과 안식이 있다. 안주할 것인가 탈주할 것인가. 이 부조리한 틈새에서 자기 자신을 구원하려 애쓰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미국 희곡을 세계 문학으로 도약시켰다.


함께 살아가며 여전히 사랑하지만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상처로 얽혀있는 가족의 모습은 미국 가족극의 전형적인 패턴이다. 작가를 막론하고 거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두 자녀로 구성되어 있다. 겉으로 보기에 무난한 가족의 모습이다. 하지만 내면의 진실은 다르다. 예를 들어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에는 아들의 죽음이라는 기억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약물 중독에 빠진 엄마가 등장한다. 그런 엄마를 견디기 힘든 아들은 방탕함으로 자기를 훼손하고 남편은 진실을 외면한 채 허황된 현실에 몰두해 있다. 상처와 죄책과 원망으로 가족은 산산조각 나있는 거다.


테너시 윌리엄스는 이런 현실에 발붙이지 못한 채 소외된 사람들의 심리를 포착한다. 답답한 가족의 틀에서 뛰쳐나가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하지만 한걸음도 움직이지 못한 채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블랑쉬와 『유리 동물원』의 로라 같은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사랑을 꿈꾸며 바깥 세계를 동경하지만 이 꿈은 그들에게 실체가 되지 못한다. 자기 자신을 마주할 용기가 없는 이들에게 다른 사람과 관계 맺을 수 있는 능력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엄혹하고 냉정한 현실 앞에서 그들은 자기만의 환상으로 스스로 은둔해 버린다. 깨뜨려야 할 세계에 오히려 갇혀버리는 것이다.


희망의 가능성은 과연 열려있을까? 아예 문이 닫힌 건 아니다. 아서 밀러는 절망인지 희망인지 헷갈릴 만큼 약한 빛으로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예를 들어보자. 아들에 대한 허황한 기대감을 놓지 못하는 아버지를 향해 아들은 “난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엉터리 꿈’을 태워버리라고 소리친다. 각자가 품은 꿈의 실체가 드러났을 때 아버지는 죽음을 선택하지만 아들은 진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장의 실마리가 아닐까. 현실적으로 볼 때 아들의 세계는 더 무의미에 가까워지지만 그래도 그에게는 아직 삶이 남아있으니 말이다. 희망은 이렇게 암시된다.

 

 

뮤지컬의 ‘평범한 가족’


<넥스트 투 노멀>에는 가족을 이야기하는 문학의 세계관이 그대로 스며들어 있다. 부모와 남매 네 식구인 이 가족도 언뜻 보기에 평범해 보인다. 그런데 아들 게이브가 부재하는 인물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이 가족의 일상은 한순간에 위태로운 풍경으로 바뀌어버린다. 가족의 ‘빈 공간’을 바라보는 시선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아내 다이애나에게는 여전히 살아있는 존재이고, 남편 댄에게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이며, 딸 나탈리에게는 자기를 향한 엄마의 무관심의 이유이다. 이 ‘빈 공간’은 모두에게 공통된 상처의 자리이다.


이 ‘빈 공간’은 이들 가족의 마음을 헤집어 흩어놓는다.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은 다이애나다. 다이애나는 상처를 회피하기 위해 자기만의 세계로 후퇴해 버린다. 그 세계에서 게이브는 죽은 적이 없다. 엄마를 생각해 주고 챙겨주는 다정다감한 아들은 훤칠하게 자라 언제나 엄마 옆에 웃으며 서있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이 아니다. 상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 채 자기만의 세계로 도피하는 다이애나는 ‘정신적 질병을 앓는 환자’로 취급될 뿐이다. 영혼의 상처는 치료받아야 할 증상에 불과해지고 만다.


댄은 다이애나와 반대다. 그는 상처에 대해 거의 반응하지 않는다. 마치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아들의 죽음은 물론 아들의 존재조차 거론하지 않는 댄. 묵묵히 아내의 곁을 지키며 그녀를 돌보는 데 최선을 다할 뿐이다. 따뜻하고 자상한 남편이자 아빠로서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지만 왠지 위태로워 보인다. 그는 자기의 역할에 스스로를 잡아매 버린 거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흔들린다면 우리 가족은 끝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지치도록 아내를 돌보는 것으로 그는 자신의 상처로부터 도망쳐 버린다.


나탈리의 상처는 부모의 그것과 조금은 다르다. 오빠라는 존재의 죽음은 그저 전해 들은 말일 뿐 그에게는 아예 없는 사건이지 않던가. 자기는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존재 때문에 부모로부터 잊힌 아이 취급을 받아왔던 거다. 상처에 대해 나탈리가 반응하는 방식은 반항이다. 사춘기 소녀의 전형적인 자아 선언처럼 보이지만 나탈리의 반항은 잊힌 존재로서의 외로움과 엄마가 떠나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대한 표현이다. 행복이란 자기에게 허락된 것이 아님을 벌써부터 알아버린 아이의 슬픈 울음과도 같은 것이다.


상처의 ‘빈 공간’에서 이들은 서로 만나지 못한다. 가족은 관계의 공동체라지만 이들이 관계 맺는 대상은 존재하는 가족이 아니라 부재하는 게이브다. 이들은 ‘관계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이 마주하는 것은 서로의 얼굴이 아니라 자기의 상처다. 그래서 이들은 함께 있을 때 더 자주 절망에 빠져버린다. 처음에 잃은 것은 게이브이지만 지금 잃어가는 것은 서로의 참된 관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다음이다. 관계를 잃어버린 사람이 결국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바로 ‘나’일 테니 말이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서 자기를 알 수 없게 된 사람들. 뮤지컬과 문학은 여기까지 같은 길로 동행한다. 갈림길은 지금부터다.

 

 

더 나아진 희망


<넥스트 투 노멀>이 문학의 계보에서 뮤지컬의 계보로 자리를 옮기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이 지점에서 희곡이 장담하지 못하는 희망의 가능성이 선명하게 제시되기 때문이다. 문학은 상처의 자리에서 겉돌고 있는 가족의 모습을 포착하지만 뮤지컬은 그 자리에서 한걸음 더 내딛는 사람들을 상상한다. 걸음의 종착지는 고통과 상처 바로 앞이다. 삶을 향해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최고의 능력은 상처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끌어안는 것이니, 이야기는 상처받은 사람들의 고통에서 상처에 직면하는 사람들의 용기로 방향을 바꾼다.


그렇기에 뮤지컬의 가족들은 희곡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나은 선택을 한다. 나탈리는 헨리와 새로운 관계로 연결되기를 선택한다. 부모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전의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 역시 관계의 망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테너시 윌리엄스의 인물들은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사랑을 꿈꿨다. 하지만 나탈리에게 사랑은 현실에 뿌리내리는 용기다. 자기 삶도 엄마처럼 불행할 거라는 불안에 스스로를 홀로 내버려 뒀던 그가 두려움을 딛고 끝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사랑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 선택 때문에 ‘미쳐버릴지’ 몰라도 언제나 삶은 가치를 선택하는 어리석음에 기대어 조금씩 나아져 왔다.


나탈리가 이런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다이애나 때문이다. 자신의 아픔이 정신적 질병이 아니라 영혼의 상처였음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다이애나는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말할’ 수 있다. 다이애나는 나탈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 오빠는 8개월 만에 장폐색으로 죽었어. 이 얘길 못 했어. 미안해.” 이 말을 하는 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가. 말하지 못해 빈 공간으로 남아있던 상처의 자리에서 두 사람은 처음으로 서로를 만난다. 얼굴을 마주하며 마음을 나누는 관계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토록 바라던 평범한 가족의 모습은 이런 것이었음을 두 사람은 깨닫는다.


다이애나는 댄을 향해서도 말을 건넨다. “아이 이름은 뭐였어?” 만약 이 질문에 댄이 대답했다면 다이애나는 집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대답할 수 없다. 이 위태로운 가족을 묵묵히 이끌기 위해서는 자기의 상처와 고통에 정직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좋아질 거야, 다 잘 될 거야” 같은 무의미한 독백뿐이다. 겉으로 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내면 깊은 곳에 해결되지 않은 상처를 품은 사람, 댄은 지금 여기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장면의 댄의 모습은 짠하면서도 뭉클하게 다가온다. 불 꺼진 집에 촐촐히 혼자 남겨진 모습도, 상처와 마주하는 자리에 홀로서기를 선택할 때도, 지금껏 한 번도 말하지 못했던 아들의 이름을 조용히 부를 때도, 그는 슬퍼 보인다. 하지만 이 슬픔은 그에게 절망이 아닌, 슬픔의 밑바닥까지 자기를 던질 수 있는 용기이고 마음껏 슬퍼할 수 있는 자유이다. 이제 그는 이 상처가 자기 자신의 일부분임을 알기 때문이다. 자기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에게 인생의 어둠은 ‘밤으로의 긴 여로’가 아니라 ‘한 줄기 빛’을 기다리는 시간일지니. 삶을 견뎌야 하는 이유는 이 빛을 기다리기 위함이다.


뮤지컬이 문학과 다른 점은 희망에 대한 태도에 있다. 음악으로 마음을 열어놓아 감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자리에서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넥스트 투 노멀>에 배어있는 뮤지컬의 고집스러운 세계관이 새삼 뿌듯할 따름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12호 2022년 5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네이버TV

트위터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