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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LETTER] 우리는 이 과정을 이토록 괴로워하면서도 도대체 왜 이 일을 계속하는 걸까요? [No.209]

글 |한정석(극작가)·이선영(작곡가) 사진 | 2022-08-30 512

우리는 이 과정을 이토록 괴로워하면서도

도대체 왜 이 일을 계속하는 걸까요?

한정석 × 이선영 두 번째 편지

 


인싸 중의 인싸 이선영 작곡가님께 
보내 주신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우리끼리의 사소하면서도 사적인 대화를 책으로 다시 읽으니 새삼 신기하면서도 조금 부끄러웠습니다. 냉면이나 멜론이 되고 싶은 제 희망 사항이 공개된 것도 민망했고요. 당분간은 이와 같은 부끄러움이 계속될 거라는 생각에 아찔한 기분까지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극내향 인프피(INFP)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어릴 때도 눈치를 많이 보는 편이었지만, 작가라는 직업을 갖게 된 후부터 그 정도가 더 심해진 것 같아요. 지난 편지에서 작곡가님이 말씀하신 대로 사적인 글쓰기도 어려워졌고요. 대본을 쓸 때는 등장인물 뒤에 숨어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지만, 제 모습으로 목소리를 내야 할 때는 이런저런 걱정들이 앞서 시간을 오래 끌게 됩니다. 눈치를 하도 보다가 결국 무색무취의 글을 쓰게 되는 경우도 많고요. 


그래서 이번 연재가 저에게는 작은 도전 같습니다. 산문이나 사적인 글쓰기에 자신이 없지만, 작곡가님을 향해 쓴다고 생각하면 조금 안심이 됩니다. ‘내가 명색이 작가인데, 글이 이게 뭐람? 이딴 걸 누가 읽겠어?’ 같은 걱정을 ‘작곡가님이 읽겠지’ 하는 마음으로 달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소심한 제가 여러 사람을 직접 만나야 하는 뮤지컬을 쓰고 있다니, 참으로 인생은 얄궂은 것 같습니다. 특히 연습 초반에 그 얄궂음은 극에 달합니다. 제가 쓴 글을 배우들의 입을 통해 다시 듣게 될 때 극도의 긴장감을 느낍니다. 마치 학창 시절 같은 반 친구들이 일기장을 빼앗아 돌려 보는 사이, 책상에 엎드려 우는 아이가 된 기분입니다. (사실 그런 경험은 없습니다. 기분이 그렇다는 겁니다.) 


배우가 대본에 의문을 가질 때, 대사를 씹거나 버벅댈 때, 겉으로는 티벳여우 같은 얼굴을 하고 멍하니 앉아 있지만, 마음속으로 ‘내가 뭘 잘못 쓴 거지?’ 하는 불안과 사투를 벌입니다. 머리로는 ‘자연스러운 진행 과정이다’, ‘배우들도 대본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하다’ 수없이 되뇌지만, 혹시 모를 제 실수가 있을까 전전긍긍하느라 집에 오면 늘 녹초가 됩니다. 


반면 작곡가님은 배우들과 스스럼없이 대화하고, 작곡 의도에 관한 설명도 잘해 주시지요. 배우들이 노래가 어렵다고 투덜댈 때도 “그러게요. 제가 왜 그렇게 썼을까요?” 하며 가볍게 넘기시고요. 대체 그 비결이 뭔지 궁금합니다. 작가와 작곡가, 역할의 차이가 있는 걸까요? 아니면 작곡가님이 말잘하고 사교적인 엔프제(ENFJ)라서 그런 것일까요? 


지난 편지에서 작곡가님이 말씀하셨죠. “나는 이 과정을 이토록 괴로워하면서도 도대체 왜 이 일을 계속하는 걸까?” 저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지셨고요. 덕분에 한참을 고민해 봤습니다. 시작은 그저 뮤지컬을 좋아하고, 마침 기회가 생겨서 하게 됐는데, 지금은 어떠한가? 데뷔 때와 뭐가 달라졌는가? 하지만 놀랍게도 딱히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습니다. 여전히 뮤지컬을 좋아하고, 기회가 있기 때문에 계속하는 것 같습니다. 창작은 늘 버겁고, 종종 회의감이 몰려오지만, 아름답게 곱씹을 만한 기억들이 많아 버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전 제가 쓴 가사가 노래로 만들어지는 순간을 가장 좋아합니다. 별 볼 일 없던 단어와 문장에 멜로디가 붙었을 때, 애벌레가 나비가 되어 날아다니는 것 같은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이게 다 좋은 파트너를 둔 덕이겠지요. 


작곡가님의 뮤지컬과 관련된 아름다운 기억은 무엇일까요? 어떤 기억을 통해 현실을 버틸 힘을 얻으시나요? (참고로 제가 훈훈한 태도를 보였다고 해서 굳이 저와 관련된 이야기를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2. 1. 5. 
정석 드림

 


명색이 작가인 한정석 작가님께 


작가님께서 ‘이딴 걸 누가 읽겠어?’라고 생각하신 글, 제가 아주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지난번 글보다 훨씬 더 편안해지고 솔직해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작가님은 제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웃긴 사람 중의 하나라, 제가 주변 사람들에게 종종 작가님의 일화를 퍼뜨리고 다니는 걸 알고 계시지요? 달가워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저만 알고 있기엔 너무 아깝습니다. 제가 엔프제(ENFJ)라 그렇다고 이해해 주세요. 


작가님이 평소 모습과 달리 연습실에서 얼마나 쭈그러져 계시는지 제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저에겐 작품에 대해 그렇게 자신 있게 설명하시던 작가님이, 배우들에게 질문을 받으실 때면 갑자기 일시 정지가 되곤 하시죠. 사실 악보를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고, 글은 모두가 읽을 수 있으니 연습실에서 작가들이 작곡가에 비해 더 쉽게 공격을 받게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저에게 연습실에서 어떻게 여유가 있을 수 있는지 물으셨죠. 제가 쓴 뮤지컬 넘버들이 극악하다고 거의 10년을 귀에 인이 박이게 듣다 보니, ‘그래. 극악한 여자야. 나는 극악한 여자. (feat.나는 야한여자)’라고 스스로 인정해(?) 버린 듯합니다.

 

곡을 다시 쓸 수도 없고, 결국에는 배우들이 잘 해낼 걸 알기에 언젠가부터는 마음을 놓게 되었달까요. 또 다른 이유로는, 5년의 음악조감독 생활을 하며 배우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하다 보니 작가님보다는 살짝 더 편안한 마음으로 배우들을 만날 수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새로운 프로덕션에서는 작가님의 마음가짐이 좀 더 편안해지길 기도해 보겠습니다. 


창작 작업의 과정 중에 힘을 얻는 순간에 대해 질문하셨는데, 그런 순간이 너무나 많지만, 지면이 부족할 것 같아 두 가지로 추려 보았습니다. 첫 번째 순간은, 작가님의 많은 요구에 부합하는 곡을 써냈을 때입니다. 우리의 신작 <쇼맨_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의 일곱 번째 뮤지컬 넘버 ‘사람들이 있었죠’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작가님은 저에게 ‘과하게, 과장되게, 취한 상태로, 재미가 있지만 무섭게 광기가 보였으면 좋겠고, 여주인공이 즐기고 있어서, 보는 사람은 짜증나지만 심각한 것보다는 가벼운 쪽으로, 착! 착! 진행되는 느낌으로, 광고 카피 같은 느낌인데, 단순하게, 천진하게 못된 느낌, 섬뜩하지만 유머러스하게, 여주인공이 즐거워 보여서 사이다처럼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곡’을 써 달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한 글자도 빼지 않고 받아 적어 놓아서 그대로 옮길 수 있음에 뿌듯하군요. (물론 작가님이 이 정도를 요구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아무튼 이런 어마어마한 요구를 받고 곡을 완성하여 들려줬을 때, “오! 좋다!”라는 피드백을 들으면 저는 힘을 얻습니다. 두 번째 순간은, 악보에 없는 것을 배우들이 표현해 줄 때입니다. 글이나 음표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 감정을 배우가 알고 채워 줄 때 저의 음악이 비로소 완성되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말 그대로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순간입니다. 


저는 요즘 바이올린과 첼로, 트럼펫의 선율을 그리며 지내고 있습니다. 편곡을 하며 4분음표가 나을까, 8분음표가 나을까? 차라리 16분음표로 갈까? 계속 붙들고 있다 보면 아무도 관심 없고, 끝내 아무도 모를 고민을 하는 기분이 듭니다. 그 고민 끝에 드는 생각은, ‘40대 첫 작품인데 나는 왜 이렇게 아직도 할 말이 많은 걸까?’입니다. 


어떤 면으로는 아직 에너지가 넘치나 싶으면서도 아직 뭔가를 더 보여 주고 싶은 욕심이 있는 건가 싶기도 합니다. 이런저런 고민과 함께 이번 작품은 과연 저에게 어떤 의미가 될지, 어떤 것들을 남겨 줄지 저 또한 궁금하고 기대가 됩니다. 작가님은 이 작품을 통해 어떤 얘기를 하고 싶으신가요? 그리고 관객들에게 어떤 작품으로 남길 바라시나요? 한 달 앞선 질문을 던지며 글을 마무리해 봅니다. 


2022. 1. 6. 
좋은 파트너라 다행인 선영 드림

 

첫 번째 편지 바로가기>>

세 번째 편지 바로가기>>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09호 2022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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