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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Beyond Lyrics] <아이다> `과거는 또 다른 땅` [No.115]

글 |송준호 사진제공 |신시컴퍼니 2013-05-07 5,327

꺾이지 않는 저항정신 <아이다>의 `과거는 또 다른 땅`

 

 

 

 

침략자와 피침략자 간의 러브스토리는 낭만적이면서도 비극적인 결말 때문에 다양한 장르에서 차용되고 있다. ‘사랑이냐, 조국이냐’의 도식은 분명 진부하지만, 선택 뒤의 상황이 주는 파장은 언제나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멀리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야기, 가까이는 영화 <아바타>의 혁신적인 변주가 그랬다. 이야기 속 커플들은 항상 더 위험한 쪽을 선택하며 이 난감한 딜레마에 종지부를 찍는다. 죽음을 통해 영원한 사랑을 확인한다는 극단적인 낭만주의랄까. 하지만 그 덕분에 이야기는 엔딩 유형에 관계없이 긴 여운을 남길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로맨스의 한 축이 흑인이라면 분위기가 약간 달라진다. 뮤지컬 <아이다>의 주인공 아이다는 흑인 왕국 누비아의 공주다. 수단 북동부와 이집트 남부에 걸쳐 있던 누비아는 이집트의 속국으로 노예 공급지 기능을 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환기하면, 철없는 이집트 공주 암네리스가 부르는 ‘My Strongest Suit’가 그저 신나게 들리지만은 않는다. 반대로 아이다의 신분을 상징하는 ‘The Dance Of The Robe’나 가스펠 송으로 불리는 ‘The Gods Love Nubia’는 흑인의 역사성과 맞물리며 더 큰 울림을 준다.

 

특히 ‘과거는 또 다른 땅(The Past Is Another Land)’는 그런 로맨스나 영웅담마저 없는, 단지 ‘흑인 노예’로서의 아이다를 그린다는 점에서 특별한 곡이다. 전쟁에서 패하고 다른 누비아인들과 함께 이집트 군인들에 포획된 아이다는 잠깐 사이에 공주에서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그 앞에 서 있는 라다메스는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는 침략자일 뿐이다. 적국의 선박에 구속된 몸은 고향에서 점점 멀어지고 끝내 침략자의 땅에 이송된다. 어린 공주의 몸으로서는 앞으로 펼쳐질 기구한 노예의 운명이 서러울 만도 하다. 2005년 초연 이후 협력연출과 음악 슈퍼바이저로 번역과 개사에 참여해온 박칼린 연출가는 “누비아의 지난 몇 년간의 역사와 전쟁으로 인한 아픔, 그리고 아이다의 현재의 처지에 대한 한탄, 그리고 앞으로도 나아질 것 없는 절망스러운 미래가 이 한 곡에 다 담겨 있다”고 설명한다.

 

방대한 내용과는 달리 ‘과거는 또 다른 땅’은 아주 짧은 곡이다. 격정적인 인트로와, 같은 멜로디의 아리아가 세 번 반복되는 형식으로 구성된다. 비록 신분을 숨기고는 있지만 공주의 기개를 표현하는 장면에서 노래는 시작된다. 시중 들 것을 명령하는 라다메스에게 맞서며 분노와 박탈감이 어우러진 감정을 폭발시키듯 부르는 레치타티보가 이 노래의 도입부를 차지한다. 뒤에 이어지는 아리아는 온통 좌절과 서글픔으로 채워지기 때문에 이 곡 전체의 메시지는 온전히 이 다섯 마디의 가사에 압축돼 있다고 할 수 있다. 박 연출가는 이 장면에서 원어의 어휘를 그대로 살려 침략자(라다메스, 이집트)에 대한 원주민(아이다, 누비아)의 심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신 날 전혀 몰라 우리 텅 빈 가슴 You know nothing about me and care even less

 

당신 같은 사람이 어찌 알겠어 How could you understand our emptiness

 

넌 우리의 모든 걸 빼앗아갔어 You`ve plundered our wisdom, our knowledge, our wealth

 

헌데 이젠 우리의 영혼까지 원하다니 In bleeding us dry, You long for our spirit

 

절대 빼앗을 순 없어 But that you will never possess

 

 

이 노래는 스태프들 사이에서 ‘씬 전환용 곡’이라는 농담이 오갈 정도로 배경이 계속해서 바뀌는 대목에 불린다. A-A`-A`로 이뤄진 아리아는 각각 누비아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아이다의 정서를 담는다. 각 구절의 첫 마디도 그에 맞춰 ‘The Past-The Present-The Future’로 명확히 구분돼 있다. 그래서 배경이 누비아에서 나일강을 거쳐 이집트로 바뀌는 동안 관객은 누비아인들이 끌려와 배에서 내리기까지의 과정을 이 짧은 곡으로 볼 수 있다.

 

 

과건 이제 저 멀리로 사라져갔어 The past is now another land Far beyond my reach

 

침략자의 발 아래 무참하게 짓밟혀 Invaded by insidious Foreign bodies, foreign speech

 

나의 어릴 적 꿈들도 산산이 깨졌네 Where timeless joys of childhood Lie broken on the beach

 

 

박 연출가는 인트로에서도 ‘Our Wisdom, Our Knowledge, Our Wealth’를 ‘우리의 모든 것’으로 압축한 것처럼, 첫 번째 아리아에서도 ‘Foreign Bodies, Foreign Speech’를 ‘침략자의 발’로 부드럽게 의역했다. 초연 당시에는 원곡의 어감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가급적 직역에 가까운 번안을 했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우리말의 특성을 반영한 개사를 시도해왔다. 그는 “국내 작가들이 번역할 때 예쁜 단어를 많이 쓰는 경향이 있는데, 말은 안 예뻐도 그 작품에 맞는 어휘를 쓰는 게 뮤지컬에서는 중요하다”며 국내 번안 풍토에 쓴소리를 냈다. 원어 단어들을 그대로 쓰려고 명사들만 나열하기보다는 의역을 하더라도 노랫말 자체가 자연스럽게 스토리텔링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의 이런 신조는 직역이라면 건조했을 두 번째 아리아에 그대로 실려 예의 부드럽고 무난한 노랫말로 표현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의역의 경제성이 언제나 최선이 되는 것은 아니어서, 박 연출가도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 있다. 어두운 미래에 대한 절망이 담긴 세 번째 아리아가 바로 그렇다. 그는 “마지막의 ‘Evil Sun’은 자신들의 고향을 불태워버린 이집트에 대한 누비아인들의 시각을 보여주는 표현이어서 어떻게든 넣고 싶었지만 잘 안 됐다”고 털어놓았다. 확실히 이집트에 도착한 ‘노예 아이다’의 눈에 작렬하는 직사광선은 악마의 눈빛처럼 보였을 것이다.

 

 

미래는 심장 뛰지 않는 거친 불모의 땅 The future is a barren world From which I can`t return

 

이 비참한 나의 미래가 내 자신을 비웃고

Both heartless and material Its wretched spoils not my concern

 

어린 시절 꿈들도 부서지며 불타네 Shining like an evil sun As my childhood treasures burn

 

어린 시절 꿈들도 부서지며 불타네 Shining like an evil sun As my childhood treasures burn

 

 

이 같은 아이다의 분노와 절망의 뿌리를 떠올리면 <아이다>의 성격을 규정하는 1막의 첫 곡 ‘Every Story Is A Love Story’의 메시지에는 반감이 들 수도 있다. 그런데 이처럼 뿌리부터 공존할 수 없는 두 남녀가 잠시 후 사랑의 밀어를 속삭인다. 심지어 이들의 사랑은 전쟁을 끝내는 불씨가 되기도 한다. 초현실적인 결론임에도 <아이다>는 어쩐지 관객들의 동의를 순순히 받아내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이런 순수하면서도 대책없는 사랑 지상주의야말로 오랫동안 인기를 유지해온 디즈니식 판타지의 힘일 수도 있겠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5호 2012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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