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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Scene Scope] <레베카> 무대 디자인 [NO.114]

사진제공 |정승호(무대디자이너) 정리 | 배경희 2013-04-02 8,963

기억의 재생 <레베카>

 

<레베카>는 대형 유럽 뮤지컬이다. 그 어떤 공연보다 화려하고 웅장한 무대를 볼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국내에서 제작한 라이선스 공연에는 스타일을 뽐내는 화려함이 없다. 대극장 뮤지컬만의 압도적인 비주얼을 보여주는 대신, 어둡고 상징적인 디자인을 선보이는 건, 분명 대단한 도전이었을 것이다. <레베카>를 통해 새로운 출발점에 선 기분이라고 말하는 정승호 무대디자이너. 그에게 <레베카>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사각 박스 컨셉의 세트 디자인. 내가 무대디자이너로서 추구하는 스타일이지만, 경우에 따라 믿음으로 밀고 나갈 때와, 확신에 가득 차서 작업할 때가 있다. <레베카>는 후자다. <레베카>는 레베카를 둘러싼 인물들이 비밀과 관계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일단 어둡고 가라앉은 극 분위기가 상징적인 박스 디자인과 어울린다. 또한 <레베카>는 ‘나’가 기억하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박스 컨셉으로 디자인하기 좋은 요건을 갖추고 있다. 무대 위의 상자들이 그 자체로 ‘나’의 기억 저장소처럼 보인다면, 회상 이야기를 이보다 더 매끄럽게 풀어갈 방법이 또 있을까?

 

무대에는 수십 개의 작은 상자로 만든 벽면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각각의 상자에는 시계와 밧줄, 의자 같은 다양한 물건들이 담겨있다. 짐작대로, 이 물건들은 ‘나’라는 사람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보여주는 오브제다. 하나의 상자가 곧 한 개의 기억임을 보여주기 위해 선택한 방식은 이야기에 해당하는 상자에 조명을 비추는 것이었다. 기차역 장면에서는 역 간판과 시계가 담긴 상자에 불이 켜지는 것처럼 말이다(이는 동시에 공간을 설명해주는 기능을 한다). ‘나’의 기억 상자에 하나씩 조명이 켜지면서 이야기가 흘러가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박스 정렬 순서대로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머릿속 한곳에서 집중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아닌 곳곳에서 번쩍하고 펼쳐지는 게 기억이니까.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느낌에 따른 거지만, 내가 보여주고 싶은 기억의 이미지는 그런 것이었다. 드로잉 영상을 넣은 것도 기억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배우가 도화지에 풍경 스케치를 하면 배경막 위로 그림이 그려지는데, 마치 그때의 기억이 머릿속에 펼쳐지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러한 장면 연출은 ‘나’의 인생에서 중요한 한 장면인, 막심과 사랑에 빠지는 신에서 딱 한 번 사용된다.

 

 

 

 

하지만 상징적인 무대 세트라 하더라도, <레베카>처럼 장면 전환이 많고, 사실적인 장소와 상황이 그려지는 공연에서는 분명히 현실의 공간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관객들이 볼거리를 기대하는 대형 뮤지컬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사실적인 세트를 넣을 경우 ‘현실’과 ‘상상’ 사이에 충돌이 생긴다는 것이다. 상반된 두 요소의 이질감을 최소화하기 위해 색 사용에 제한을 두어야 했다. 따라서 <레베카>에서 사용한 색은 차콜 그레이(Charcoal Grey)와 화이트와 실버, 이렇게 세 가지 컬러가 전부다. 주요 공간인 맨덜리 저택에 잿빛을 쓴 이유는 단순했다. 저택이 불에 타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세트의 색을 잿빛으로 통일했다. ‘나’의 인생이 전환점을 맞이하기 전, 다시 말해 막심을 만나기 전의 공간인 몬테카를로 호텔을 제외하고 말이다. 몬테카를로 호텔은 전후의 극명한 대비를 주기 위해 화이트와 실버를 사용했다.

 

매번 어떻게 상자를 활용할 것인가 고민한다. 어떤 때는 한눈에 보이게, 또 어떤 때는 드러나지 않게. 항상 염두에 두는 것은 지나치게 컨셉이 보이면 극에 몰입하는 데 방해될 수 있다는 점이다. 상자가 세트의 주인공이 될 순 없다. 이야기의 흐름을 쫓아가야 하는 작품이라면 더욱. <레베카>에서 어두운 색으로 컬러를 통일하고, 박스 세트를 위와 양쪽으로 배치한 이유다.

 

 

 

관객들이 사랑한 <레베카> 디자인 포인트                                                       

거대한 맨덜리 저택
<레베카>에서 화려함을 보여줄 요소를 찾는다면, 그건 맨덜리 대저택이라고 생각했다. 디자인 시 참고했던 이미지는 미국 로드아일랜드주에 있는 항구 도시 뉴포트의 저택들이다. 대부분의 저택들이 19세기~20세기 초 거부들의 별장으로, ‘세상에 이런 부자들도 있구나’ 놀랄 정로도 화려하다. 제작비의 한계로 큰 규모로 승부하기보단 디테일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레베카의 존재를 드러내는 법
실제로는 등장하지 않는 레베카를 실재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게 중요했다. 소품에 레베카의 약자인 ‘R’을 많이 넣었는데, 가장 크게 눈에 들어오는 건, 프로시니엄 아치 정중앙에 배치된 로고 문양이 들어간 박스일 것이다. 맨덜리 저택이 불타기 시작하면, 박스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가 다시 제 위치로 올라가는 아이디어를 냈는데, 여러 이유로 구현되지 못했다. 만약 실현이 됐다면 조금 더 레베카의 상징성을 드러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회전하면서 무대 앞으로 나오는 발코니 
제대로 구현이 될 것인지 우려가 컸던 장면이다. 하지만 맨덜리 저택을 지배하고 있는 레베카의 존재를 임팩트 있게 보여주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관객들이 발코니를 기계로 움직이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세트 안에 두 명의 크루가 들어가 직접 움직인다. 사람이 세트를 리듬에 맞춰 움직이기 때문에 훨씬 자연스럽고 매끄러운 모습을  연출할 수 있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4호 2012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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