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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Focus] 라이선스 뮤지컬이 안전하게 회수를 건너는 법 [NO.109]

글 |김영주 2012-10-18 4,402

우리는 할리우드나 유럽, 일본에서 만들어진 영화를 그대로 보는 것에 대해 아무런 의문도 위화감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브로드웨이나 체코에서 만들어진 뮤지컬을 서울에서  공연할 때, 한국적인 색채를 더해 관객들이 좀 더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조율하는 것 또한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왜 그럴까?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촬영과 편집을 마치고 극장에 걸리면 고정된 형태로 완성이 되는 영화와 달리, 뮤지컬은 대본과 악보가 있다고 해도 끊임없이 수정하고 보완할 수 있는 공연 장르라는 점이다.

 

 

 

 

 

 

고전을 비롯한 남의 작품을 거침없이 재해석하는 것에 있어 좋은 의미로나 나쁜 의미로나 겁이 없는 한국 창작자들의 기질은 뮤지컬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문화권에서 만들어진 작품을 우리네 식으로 지역화(Localization)하는 작업을 끝까지 밀어붙인 형태를 번안극이라고 한다. 극단 학전이 <지하철 1호선>이나  <의형제> 등을 통해 꾸준히 해온 작업이 이에 해당한다. 시대성과 사회성이 강한 작품의 경우에 특히 효과적인 방식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뮤지컬이 적극적인 지역화 작업을 거치는 것은 아니다. ‘여기 팬텀 오브 디 오페라 있어’라는 문법 파괴 수준의 번역을 해야 할 정도로 세부적인 부분까지 철저하게 규정을 정해놓고 라이선스 작품을 관리하는 <오페라의 유령> 같은 경우에는 지역화를 위한 어떤 수정도 할 수 없다.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의 콧대 높은 뮤지컬 프로덕션들이 자신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성공작일수록 함부로 토씨 하나 손을 대지 못하도록 관리하는 것과 달리, 독일어권을 비롯한 유럽 대륙의 뮤지컬들은 지역화에 대해 매우 관대한 편이다. 이 경우에는 유럽과 아시아, 북미와 유럽처럼 문화적 차이가 뚜렷한 경우에만 지역화가 시도되는 것도 아니다. 같은 유럽 국가이지만 헝가리에서 공연한 프랑스 뮤지컬 <로미오 앤 줄리엣>은 우리에게 상당히 낯설고 새로운 작품이다. 이는 프랑스 뮤지컬 <로미오 앤 줄리엣>이 헝가리 관객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데 문화적인 장벽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동일한 대본과 음악이라고 해도 새로운 해석을 통해 창조성을 발휘하고자 하는 것은 크리에이터들의 당연한 욕망일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라이선스 뮤지컬이 영미권이나 유럽 대륙에서 들어오는 한국 시장의 경우 창작자의 욕망 이전에 작품의 생존을 위해서 지역화가 필수적인 경우가 많다. 올해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작품으로 손꼽히는 <엘리자벳> 역시 그러했다. 빈 극장 협회가 제작한 이 작품은 19세기 말이라는 시대 배경, 그리고 역사 속의 실존 인물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없이는 공감하기가 쉽지 않은 뮤지컬이다. 다수의 한국 관객들이 영국 여왕이 아니라 오스트리아 황후인 엘리자베트에 대해서는 그다지 아는 바가 없는 것도 문제이지만, ‘죽음’이라는 독특한 캐릭터가 상징하고 있는 의미를 관객들에게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도 큰 숙제였다. 멸망해가는 세계의 절망과 탄식이 안개처럼 깔려있던 세기말 빈의 감성은 <엘리자벳>의 또다른 주인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황실을 배경으로 한 엄청난 자본이 투입된 뮤지컬이면서도 빈판 <엘리자벳>에는 관객들이 코스튬 드라마에 기대하는 과시적인 호화로움을 찾아볼 수 없다. 오리지널 공연의 미니멀하다 못해 건조하기까지 한 무대 미술은 고가의 티켓값을 지불한 관객들이 기대할만한 화려한 왕실 판타지와 완전히 거리가 먼 것이었다. 오리지널 공연과 한국판 <엘리자벳>의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는 그 휘황찬란함일 것이다. 빈에서 모든 등장인물들이 죽음의 그림자에 짓눌려 있던 심리극은 서울에서 ‘평민이나 황제나 가정 내 불화로 고생하는 건 매한가지’라는 훨씬 이해하기 쉬운 갈등을 중심으로 재구성되었다.

 

 

 

 

작품 안에 있는 가족 문제를 부각시키는 것은 한국 뮤지컬계에서 지역화를 시도할 때 종종 드러나는 특징 중 하나다. 가족관계에 대한 한국인들의 유별난 집착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인데, 게이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대극장 뮤지컬이라는 점에서 부담이 적지 않았을 <라카지> 역시 그 방법을 썼다. 오리지널 공연 역시 좀 유별난 구성으로 이뤄졌지만 다른 보통 가족들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서로 사랑하고 투닥거리며 사는 게이 커플의 모습을 보여준 것은 마찬가지다. 그런데 한국 공연의 경우 마담 자자가 장 미쉘에게 보이는 모성애가 좀 더 강조되었다. 생물학적 남성이 여성의 정체성을 가지고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는 아이를 사랑으로 키우는 모습에서 보수적인 관객들도 동질감을 느끼고 마음의 벽을 허물어야 이 작품은 성공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의 관객들이 기억하는 엄마의 지극한 사랑은 브로드웨이 관객들이 생각하는 그것보다 훨씬 강렬하고 적극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마담 자자가 한국 관객들에게 ‘어머니’로서 받아들여지기 위해 표현해야 하는 모성애의 총량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지역화를 거치지 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경우는 인종문제나 자국의 특수한 상황에 대한 풍자가 등장할 때이다. 다인종 사회인 미국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문제들이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반영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한국인들이 이를 무대에서 표현하기란 여러모로 쉽지 않다. <드림걸즈>나 <헤어 스프레이>처럼 오리지널 공연이 흑백 갈등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일 경우에 포커스를 좀 더 넓게 잡는 방식으로 관객들이 똑같은 피부색의 한국인들이 인종 갈등을 연기하는 것에 위화감을 느끼지 않도록 유도했다. <미스 사이공>에서 언제나 흑인으로 등장하는 마이클의 친구 존이 한국 공연에서는 인종 요소가 전혀 드러나지 않음으로 인해서 작품 안에 겹겹이 쌓여있는 여러 층 가운데 하나가 헐거워진 것처럼 아쉽지만 포기를 해야 하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스팸어랏>처럼 원작의 주제와 호흡을 살리는 것에 중점을 둠으로써 표현 그 자체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몬티 파이톤 식 유머의 핵심을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방식도 있다.

 

 

 

 

<삼총사>, <잭 더 리퍼>는 한국 뮤지컬계를 벗어나면 좀처럼 보기 힘든 독특한 방식으로 지역화가 된 공연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해외 뮤지컬의 판권을 구입해서 라이선스 공연으로 올리겠다고 결심을 하는 것은 그 공연이 완성도가 있고 한국 관객들에게 어필할만한 매력이 있다고 판단했을 때여야 한다. 그런데 왕용범 연출이 각색 작업을 한 이 작품들은 처음부터 대본을 완전히 다시 쓰는 수준의 대대적인 수정보완 작업을 염두에 두고 판권을 구입했다. 당장 각색 작업이 가능한 연출가는 있지만 작곡가는 확보하기 힘든 한국 뮤지컬계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자유로운 수정이 가능하고 한국과 음악적인 정서가 상당 부분 겹치는 체코 뮤지컬이 좋은 소스가 되어준 것이다.

 

글로벌 시대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세세한 부분으로 들어가면 바로 옆 나라의 문화에도 벽이 있다. 창작뮤지컬이 빠른 성장을 보여주고 있지만 작품 편수에 있어서 라이선스 공연이 우세한 상황은 앞으로도 달라지기가 힘들 것이다. 귤이 회수를 건너서 탱자가 되는 식으로 퇴보한 작품을 우리 관객들 앞에 내놓지 않기 위해 또 한 가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있다. 뮤지컬 <서편제> 같은 작품을 부다페스트에서 지역화 한다고 가정해보자. 헝가리 관객들에게 <서편제>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무엇을 바꿀지 고민하기 이전에 그 시도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인지, 차라리 작품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이 낫지 않은지부터 냉철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09호 2012년 10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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