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젊은 뮤지컬을 만들다
2003년은 젊은 관객들이 뮤지컬과 부담 없이 유쾌한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진 해다. 기름기를 뺀 청춘 뮤지컬 <그리스>는 대학로와 뮤지컬, 데이트라는 세 가지 조건에 부합하는 맞춤형 공연이었다. <지하철 1호선>과는 또 다른 스타일과 장점을 가진 뮤지컬 배우들을 배출하는 믿을 만한 아카데미이기도 했다. <오페라의 유령>은 가격이 부담스럽고, <렌트>는 내용이 부담스러운 젊은 관객들을 밝고 낙천적인 에너지로 매혹시켜서 새로운 관객들로 끌어들인 공연이 바로 <그리스>다. 또한 이 작품은 연출가 이지나와 한국 뮤지컬계가 그 후로 오랫동안 계속될 시끌벅적한 인연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계기이기도 하다.
2003년 <그리스> 이전까지는 ‘뮤지컬 연출가 이지나’보다는 ‘연극 연출가’로 자주 언급되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영국에 있을 때도 뮤지컬을 많이 봤던 건 아니에요. <오페라의 유령>, <레 미제라블>, <미스 사이공>, <미녀와 야수> 정도를 챙겨 봤던가. 보다가 나온 적도 있고. 무용극을 좋아하고 음악을 좋아하기는 했어요. 무용과 음악이 함께 가는 극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은 많이 했지만 뮤지컬을 반드시 이래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어요. <그리스> 연출 제의를 받았을 때도 <그리스>는 뮤지컬 영화로만 봤지 극장에서 본 적도 없을 정도였는데 그래도 작업을 굉장히 즐겁게 했어요. <그리스>는 일단 즐겁게 했다는 기억이 제일 커요. 공연 올리기 전 자체 평가에서 ‘이게 대체 무슨 작품이냐’, ‘<그리스>를 어떻게 이렇게 만들어 놓을 수가 있냐’고 인민재판을 당했고(웃음), 공연 오픈 직후에는 관객들에게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세상에 87년 <그리스>에 비해서 너무 떨어진다’ 등등 살벌한 이야기를 많이 듣기는 했지만.
파격적인 연출을 하는 젊은 연출가라는 이미지도 그때부터 생겼습니다. 물론 2003년 전에도 연극 <태>나 뮤지컬 <록키 호러 쇼>를 연이어서 내놓았지만 오히려 가장 대중적인 작품인 <그리스> 때부터 그런 인상이 확고해진 것 같습니다.
왜냐면 <록키 호러 쇼>는 작품 자체가 워낙 컬트적이니까 사실 누가 연출을 하더라고 연출가 때문에 문제작이 나왔다고 하기는 어렵죠. 그런데 <그리스> 같은 경우에 그렇게 말이 많았던 건 작품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화술’을 바꿨기 때문이에요. 그 때까지는 뮤지컬 배우들이 성우 더빙 연기를 하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그리스>에 출연한 배우들에게 힘 뺀 시트콤 식 연기, 평상시 말투로 하는 빠른 연기를 요구했어요. 나는 그 외화 더빙하는 것 같은 연기를 도저히 못 견디겠더라고요. 그런데 생활 연기를 하는 게 더 힘들어요. 무대는 공간성이라는 것이 있어서 배우들이 그 큰 공간을 무시하고 자연스럽게 연기를 하는 게 너무 힘드니까 그걸 할만한 내공이 안 되면 그냥 쉬운 연기, 즉 오버된 연기를 하는 거예요. 그때는 그렇게 온갖 소리를 들었지만 지금은 뮤지컬 쪽에서도 그런 힘 뺀 연기를 하잖아요. 남들이 안 하는 걸 먼저 하면 일단 욕을 먹을 수밖에 없어요.(웃음)
신인 배우 중 좋은 재목을 귀신같이 알아보는 연출가로 명성을 쌓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였습니다.
아, <그리스> 때문에 내가 잘생긴 남자 배우만 좋아한다고 낙인이 찍혔는데(웃음). <그리스>라는 작품을 통해서 내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생생하고 아름다운 청춘이었기 때문에 외모를 많이 봤어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극장에서 보면서 다짐한 게 있어요. 혹시라도 이 다음에 이런 작품을 연출하게 되면 한국 사람들도 청바지를 입고 예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노라고 결심했거든요. 당시 배우들이 입은 데님의 태가 너무 끔찍해서. 그때는 언감생심이었지만 혹시라도 내가 <그리스>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같은 작품을 하게 되면 청바지를 입은 젊은 아이들이 얼마나 예쁜지 보여주겠다고 벼뤘는데 꿈을 이룬 거죠(웃음). 아니, 뮤지컬이라는 건 꿈을 파는 장르인데, 특히 <그리스> 같은 작품이라면 더더욱 배우들이 젊고 매력적이어야죠. 무슨 그로테스크한 심리극도 아니고 실험주의, 사실주의극이 아니잖아요. 드림 팩토리면 당연히 관객들의 눈도 귀도 즐겁게 해줘야죠. 지금도 <그리스>에 대해 애정이 많은 건 그 작품을 통해서 인연을 맺은 좋은 배우들이 정말 많기 때문이에요. 그들이 한국 뮤지컬계에서 새로운 판도를 연 것에 대해서 기쁘고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그리스>를 하면서 가장 즐거웠던 일은 뭔가요?
각색작업. <오페라의 유령>이나 <미스 사이공>처럼 오리지널 프로덕션에서 준 매뉴얼에 충실해야 하는 작업이 아니었어요. 그때 (오)만석이 두디를 맡았을 때인데 ‘뷰티스쿨 드롭 아웃’을 두디에게 마겨서 일약 주인공으로 만들고 리조의 마지막 노래 ‘절대 난 질 수 없어’도 원래 가사는 굉장히 나약하게 고백하는 노래인데 강하고 굳센 마음으로 노래하는 것으로 바꿨어요. 하여튼 2003년에 <그리스> 홈페이지 게시판은 난리도 아니었어요. 난 정말로 확신을 갖고 그 작업을 했는데. 일단 배우들이 성우 연기를 안 하고, 늘어지는 부분들 다 정리해서 젊고, 빠르고, 예쁘고, 안 느끼하게 만들었는데 왜 욕을 먹는 건지 몰라서 어리둥절했던 거예요, 난. 그때 알았죠. ‘아, 난 욕을 먹을 팔자로구나’
그렇지만 <그리스> 오리지널 투어 팀이 왔을 때 반응은 ‘한국 공연이 훨씬 낫다’였죠.
원작과 대사 길이를 그대로 맞췄는데도 오리지널 팀 공연보다 우리 공연 러닝 타임이 20분이 빨랐어요. 암전 한 번 없이 오버랩으로 신 전환을 신속하게 진행하고 배우들은 그냥 말하는 것처럼 빠르게 대사를 했으니까. 그런데 그걸 보다가 원래 공연을 보려니까 너무 느린 거예요. 미국 프로덕션은 정말 오리지널 <그리스> 그대로 80년대에 가깝게 공연을 했는데 한국 관객들이 그동안 기름기 뺀 21세기 걸 보다가 옛날식으로 연출하고 연기하는 걸 보려니 적응이 안 된거죠. 라이선스 뮤지컬을 하면 그런 점에서 좀 섭섭할 수 밖에 없어요. 아무리 새롭게 만들어놔도 외국 걸 그대로 가져왔다고만 생각하니까. 어쨌든 결론적으로 <그리스>는 평단에서는 끝내 인정을 못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관객들은 손을 들어준 작품이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