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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COVER STORY]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김무열 [No.69]

글 |김영주 사진 |심주호 2009-06-16 7,121

봄이 눈 뜰 때처럼, 배우는 다시 태어난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원하는 것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히 아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 누구인지 제대로 인지하는 그들과의 대화는 담백하고 깔끔해서 탄산수 같은 청량감을 남긴다. 지난 3년간 몇 번을 거듭한 만남에서 김무열은 언제나 그러했다. 무대에서 다시 만날 때마다 한 뼘씩 자란 모습으로 의심 많은 관객들까지 기분 좋게 승복하게 했던 청년은 스튜디오에서도 자신이 무엇을 ‘연기’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짚어내는 반짝이는 배우였다.
조금 빠르게, 하지만 되짚어 생각해 보면 신기할 정도로 노련하게 속도 조절을 하면서 배우로서 살아가야 할 제 영역을 확보하고 있는 스물일곱 살의 젊은 남자. 그가 지금까지와는 좀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흥미롭지 않을 수가 없다.

 

 

정면을 바라보고 둘러서 가는 법

<지하철 1호선>과 <암살자들>을 거쳐 <그리스>, <알타보이즈>의 비중 있는 역으로 무대에 서는 동안 그를 먼저 발견하고 사랑한 것은 관객들이었다. 여성 관객을 따로 분류해서 말하기가 민망한 한국 뮤지컬계의 특성상 훤칠한 외모에 대한 가산점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다시 말해서, 그의 커리어 초반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던 ‘뮤지컬계의 아이돌’이라는 별명이 온전히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는 뜻이다.
고질적인 배우 기근에 시달리는 뮤지컬계에서 춤, 노래, 연기가 모두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이고, 외적인 매력까지 상당한 젊은 남자 배우는 언제나 환영받는 존재다. 애초에는 김무열 역시 시즌마다 새롭게 등장하는 매력적인 루키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대로 소비되느냐, 아니면 그 이상을 증명하느냐. 진짜 승부는 사실 그때부터였다.


새 얼굴을 찾아내는데 혈안이 된 미디어와 변덕스런 관객들을 상대로 김무열이 멋진 한판승을 따낸 것은 <쓰릴 미>의 탐욕스런 어린 살인자 역을 통해서였다. 그는 사랑과 지배욕이 현과 활처럼 부딪혀서 연주되는 이인극 <쓰릴 미>에서 포식자의 가면 아래 불안정한 열등감을 숨긴 열아홉 살 법대생을 연기했다. 그때부터 관객들에게 배우 김무열이라는 ‘캐릭터’가 확실하게 각인되기 시작했다. 무서울 정도로 자기 관리에 철저한 신인, 집중력이 대단한 배우, 엄청난 연습벌레, 카포에라, 기계체조까지 연마하면서 몸을 만들고, 언제나 반듯한 태도를 유지하는 모범적인 청년.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잔혹한 ‘나쁜 남자’로서의 면모와는 상반된 그 모습은 사실 젊은 배우에게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차라리 객기와 치기를 친구 삼아서 삶의 모든 것을 느끼고 경험하기를 원하는 방탕아인 것이 자연스러운 나이가 아닌가.

“어렸을 때 워낙 많이 놀았어요. 막 불량스럽게 사고를 치고 다니고 그랬던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때 그렇게 죽도록 놀았으니까 내가 진짜 좋아하는 일,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면서는 이를 악물고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게 있었어요. 자기관리라는 것도 그 맥락에선데, 요즘은 생각이 좀 달라졌죠. 담배도 다시 피우고, <스프링 어웨이크닝> 팀을 만나면서부터 술을 진짜 많이 마시게 됐어요. 일부러 흐트러지려고 사람들과 술을 많이 마셨다는 건 아니고요. 이번 작품이 제가 제 자신에게 걸었던 제약들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까요. 기준이 바뀌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동안의 제약들이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기고 저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싶은 욕심에서 비롯된 거였다면, 이제는 저와 함께 무대 위에 서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중히 하기 위해서 그런 제약들을 좀 풀어도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서로를 신뢰하는 사람들이 감정을 나누면서 진심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됐을 때 비로소 만들 수 있는 무대가 있는 것 같아요.”


서글서글한 인상과는 달리 의외로 넉살이 좋거나 사람들과 금방 친해지는 편이 아닌 김무열이지만, <스프링 어웨이크닝>을 준비하면서는 평소와는 달리 동료들에게 먼저 적극적으로 접근을 했다. 오랜만에 비슷한 연배의 어린 배우들과 공연을 하는 것이라서 기대하는 마음이 컸다는 그는 혹시나 후배들이 자신에게 거리감을 느낄까봐 처음부터 어깨에 힘을 뺐다. “어떤 게 저의 가식적인 모습이고, 어떤 게 진짜 모습인지는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어쨌든 지금은 풀어진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 있어요. 그런데 그러다보니 부작용이 좀 있는 게 멜키오가 주인공이고 나름 멋있게 보여야 하는 인물인데, 이 친구들이 저를 동네 아저씨 보듯 해서 큰일이에요. 이렇게 같이 놀다가 무대에 올라가면 연기를 해야 하는 거죠. 일을 해야죠, 이제.(웃음)”

 

 

원하는 마음만큼 노력할 수 있다
김무열은 한 세기 전 유럽의 청교도 학교 고교생들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이 공연이 2006년 브로드웨이 화제작의 텍스트를 가지고 한국에서 카피하는 뮤지컬이 되고 말 거라는 우려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 10대의 억눌린 성적 욕망,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과 같은 표면적으로 불거지는 문제들을 무작정 발산시키는 것이 아니라 짓눌린 채로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다는 욕심도 있다.
“고민해야 할 것도 많고, 공부해야 할 것도 많은 작품이에요. 연습하면서 매일매일 놀라요. ‘아!’ 하면서 기분 좋게 놀라는 순간들이 있어요. 거의 실험극을 하는 것처럼 알아갈수록 재미있고, 도전의식을 자극하는 작품이에요. 대본을 외우는 것보다도 작품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사상, 정신을 이해하는 게 먼저일 수밖에 없는 뮤지컬이라서 표현주의 양식에 대해 따로 공부를 하기도 하고 괴테의 <파우스트>도 읽고 있어요. 멜키오나 다른 등장인물들이 저보다 열 살은 어린 친구들이고, 100년 전 이야기라는 것도 있지만, 일단 배경이 독일이잖아요. 그 사람들의 정서, 스타일을 알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어요.”


<쓰릴 미>와 마찬가지로 <스프링 어웨이크닝>에서도 무리 중에서 두드러지는 영민한 10대를 연기하게 되었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몰래 연기학원을 다녔던 중학생이었고, 배우가 되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었던 예고생이었던 실제의 그는 어땠을까.
“중학교 때까지는 조숙한 아이는 아니었어요. 그런데 고등학생 때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여러 가지 생기면서 다른 친구들보다는 좀 성숙했다고, 저 혼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친구들을 내려다보거나 했던 건 아닌데, 어떤 입장차라는 걸 느꼈죠. 일종의 자격지심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멜키오 같은 경우는 갖고 있는 지식이 다른 친구들과 차이가 있었다면 저는 ‘경험’이 달랐던 거죠. 그런데 제가 멜키오를 연기하기 위해서 공부하면서 느끼는 것도 그래요. 분명 다른 아이들과 다른 것을 갖고 있지만 그래도 다들 친구니까 어떤 막무가내의 잘난 척이나 우월감을 드러내는 건 아니겠구나 싶었어요. 멜키오는 어른들을 비웃을 만큼 똑똑하지만 알면 알수록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어린애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런 미묘한 것을 표현하는 게 어렵더라고요.”


한국 뮤지컬계에서 활동하는 주연급 배우 중에 드물 정도로 춤에 능숙한 배우이지만, 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몸짓에 가까운 빌 T 존스의 파격적인 안무는 그로서도 해결하기가 쉽지 않은 숙제다. “사실 그 춤이 정말 감동적인데요, 진짜 감동적이긴 한데 너무 죽을 것 같은 거죠. 그냥 춤을 추라는 거면 할 수 있겠는데, ‘감정을 가지고 음악과 함께 움직임으로 표현을 하는 거야. 그런데 이게 절대 춤은 아니야’라고 하시니까…” 해결된 것보다 풀어야 하는 것들이 더 많다. 하지만 죽을 것 같이 어렵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신이 나 있다는 걸 감추지 못한다.
“큰 인기를 얻고 유명해지고 싶어서 배우를 하는 건 분명히 아니지만, 배우로서 사랑받고 싶고, 관심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있긴 하죠. 그런데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게 먼저라는 것도 알아요. 제가 이 일을 계속해나가는 이상 김무열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한 사람이라도 계속 늘어나는 거잖아요. 그 분들에게 보이는 제 모습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 배우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요. 당연한 일이지만 늘 좋은 말만 들은 건 아니에요. 하지만 어떤 작품이 되었든 무대 아래에서 이건 아닌데 싶고, 몸이 아프고 소리가 안나올 것 같아도 무대에 섰을 때는 기쁘지 않았던 적이 없고, 최선을 다하지 않은 적도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라면 저는 아직 한 번도 실패를 해보지 않은 것 같아요.”

 

<알타보이즈>를 공연 하면서 ‘뮤지컬계의 아이돌’이라고 불리기 시작했을 때도, 싫지 않았다. 어쨌든 김무열이라는 배우를 기억하고 좋아하는 관객들이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기 관리를 잘하는 배우’라는 칭찬을 들을 때도 그 신뢰가 흩어지지 않게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김무열은 정말로 중요한 건 그 모든 말들이 다 사라진 후라는 것을 알고 있다. ‘뮤지컬계의 아이돌’도 아니고, ‘자기 관리를 잘하는 배우’도 아니고 그냥 ‘배우 김무열’이라는 이름만 남았을 때, 무대는 그 이전과 다른 공간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도 있다. 하지만 채웠던 것을 비우고 다시 채우기 위해 애쓸 때마다, 인간으로서의 자신까지 조금씩 넓어지는 것을 느낀다고 조심스럽게 고백하는 그라면, 무대는 전장이지만 터전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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