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고 슬픈 봄을 생각하다
1891년 독일의 극작가 프랑크 베데킨트는 ‘깨어나는 봄(Fruhlings Erwachen)’이라는 제목의 희곡을 자비로 출판했다. 자연주의와 표현주의 사이에 걸쳐 있는 이 작품은 ‘아동비극’이라는 친절한 경고성 부제로 짐작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충격적인 장면들로 곧바로 검열에 걸렸고, 그 후 15년이 지나서야 문제적 요소들을 삭제하고 수정한 끝에 비로소 무대에 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로부터 12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작품이 묘사하고 있는 청소년의 섹스와 동성애, 낙태, 사도마조히즘이 관객들을 얼마만큼 불편하게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19세기 말 독일에서 그 정도 수난만 겪고 받아들여진 것이 오히려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베데킨트의 희곡은 1967년 극단 광장이 동아연극제 출품작으로 국립극장에서 공연할 당시 <사춘기>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고, 2001년 같은 제목으로 성신여자대학교 출판부에 의해 출간되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은 원제를 영어로 직역한 것인데, 사실 이 작품이 처음 국내에 알려질 때는 뮤지컬 <사춘기>로 통용되었다. 같은 원작으로 2009년 초연한 창작뮤지컬 역시 그 익숙한 번역 제목을 선택했다. 독일어로 사춘기(Pubertat)를 의미하는 단어가 엄연히 따로 있지만, 사춘기를 풀어서 읽으면 ‘봄을 생각하는 시기’가 되니 연결고리가 분명히 있기는 하다.
원작 희곡의 국내 초연은 생각보다 빨랐지만,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쪽이나 수용하는 쪽이나 미처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1979년 3월 24일자 동아일보의 ‘횡설수설’이라는 코너에 실린 세태 비판 칼럼에는 대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미팅’에 대해 설명한 후 성 윤리, 도덕률이 무너져 내리면 안 된다는 준엄한 경고를 하기 위해 ‘베데킨트의 희곡 「사춘기」에서 어린 ‘벤도라’가 남자 친구 ‘모리츠’(멜키어가 아니라 모리츠)의 성 충동에 꺾여 임신을 하고 낙태를 하다 목숨을 잃는’ 사례를 끌어온다. 작품이 비판하고 있는 바로 그 주장을 하기 위해 작품의 일부를 원용하는 놀라운 기술이다.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주인공 멜키어는 어른들의 이런 위선과 기만을 이미 눈치 채고 있는 명석한 아이다. 그는 몇 가지 면에서 헤르만 헤세의 초기작 『수레바퀴 밑에서』의 반항아 헤르만 하일러를 연상시키는데, 상대적으로 늦된 모리츠에게 미치는 영향력이나, 그 두뇌의 조숙함으로 인해 오히려 도드라져 보이는 정신적인 연약함과 미성숙함이 특히 그렇다. 『수레바퀴 밑에서』의 헤르만-한스의 관계와 <스프링 어웨이크닝>에서 멜키어-모리츠의 관계는 억압받는 10대를 주인공으로 하는 성장물의 전형적인 인물 구도에 충실하다. 혼돈의 시기에 기성세대가 짜놓은 틀 안에 갇힌 아이들 중에서 예민하고 섬세한 정신을 가진 두 소년 이 부당한 속박을 함께 인식하고 나름의 일탈을 모의하지만 결국 둘 중 하나는 외부에서 가해지는 압력을 견뎌내지 못하고 세상 밖으로 밀려난다. 그리고 살아남은 쪽은 그 고통스러운 자줏빛 여름의 흔적이 멍처럼 남은 채로 유년기와 결별하고 한 사람의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다. 지나간 계절과 함께 남겨진 것은 죽은 친구만이 아니다. 유리처럼 불안하지만 투명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모든 부조리하고 불가해한 것들에 일일이 의문을 품었던 그 시기의 자신 또한 친구와 함께 두고 와야 한다.
같은 독일 출신인 베데킨트와 헤세의 이 대표작들은 15년의 시간 차를 두고 발표되었지만, 작품 속에서 묘사된 교실의 풍경과 기성세대의 태도에는 다른 점이 없다. 한스와 헤르만, 멜키어와 모리츠는 같은 학교의 선후배 사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근대 독일의 청소년 교육은 소수의 뛰어난 엘리트와 획일화된 다수의 순종적 ‘국민’을 키워내는 것이 목표인 철저한 경쟁 위주의 주입식 교육이었다. 나보다 약한 존재에 대한 우월감과 나보다 강한 자들에 대한 열등감, 국가와 조직에 대한 복종과 규율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한 수치심을 가르치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그리고 게오르그와 한셀, 멜키어와 에른스트처럼 교육받은 아이들이 장년이 되었을 1916년, 독일이 주도한 세계1차 대전이 일어난다.
<스프링 어웨이크닝>을 본 관객들은 시대적, 문화적으로 한참 거리가 먼 19세기 말 독일의 청소년들과 21세기 초 한국의 청소년들이 유사한 고민과 갈등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이 신기하다고 입을 모았다. 어느 시대든, 어느 문화권이든 성장기의 고통은 비슷한 법이라는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런데 미국의 저명한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는 1928년에 발표한 저서 『사모아의 청소년』에서 이러한 상식과 전혀 다른 주장을 한다. 사춘기의 혼란이 인간의 신체적 발달과 맞물리는 자연현상이라는 일반론을 뒤엎기 위해 그녀는 남태평양의 사모아 섬으로 갔다. 그녀가 만난 현지의 청소년들은 근대 미국 사회의 청소년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았고, 사춘기라고 할 만한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지 않았다. 단순하고 숨김없는 남태평양의 생활양식 속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은 성적 수치심이나 미래에 대한 스트레스로 혼란에 빠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즉, 우리가 자연스러운 통과의례라고 생각했던 사춘기란 것이 사실 자연보다는 근대 사회가 개인을 사회의 틀 안에 편입시키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문화 사회적인 통과의례에 가깝다는 뜻이다.
우리는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을 금과옥조로 삼고 살아간다. 그 믿음이 없으면 세상의 질서 안에 편입되기 위해 잘라내고 묻어두어야 하는 자신의 일부가 너무 가엾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아픔이 진짜 무엇을 위한 것이냐 하는 점이다. 세상이 만들어놓은 유리 구두에 나를 맞추기 위해 발꿈치를 잘라내는 고통이 나를 성숙하게 해줄 리 만무하다. ‘먼지바람 속에서도 눈을 뜨는’ 일은 고역일 수밖에 없지만 그런 정도의 의지를 가지고 자신과 세계를 통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벤들라의 어머니와 모리츠의 아버지처럼 돌이킬 수 없는 실수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93호 2011년 6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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