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발의 레어티스를 기억하십니까
하루는 클럽에서 연주를 마치고 나오는데 모르는 사람이 다가왔습니다. “혹시 오디션 볼 생각 없어요?” 자신은 뮤지컬 관계자라면서 제게 오디션 제의를 하더군요. 그때는 뮤지컬이 대중적인 장르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제안을 받아서 놀랐고, 또 궁금했어요. ‘록 뮤지컬’이라고 하니까 더욱 호기심이 갔고요. 그래서 가보기로 마음을 정했는데…, 실은 뮤지컬 배우들은 어떻게 생겼나 얼굴 한번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어요.
오디션 날. 전 평소 모습대로 하고 오디션 장에 갔어요. 로커의 교복이라고 할 수 있는 가죽 잠바에 딱 붙는 가죽 바지, 웨스턴 부츠 차림이었죠. 그런데 아뿔싸. 현장에 도착해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남자들이 전부 무용복을 입고 헤어밴드를 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약 3초간 정지 상태로 굳어 있다가 문을 닫고 나왔어요. 그리고 분명 노래만 부르면 된다고 했는데 춤을 춰보라는 겁니다. 춤이라뇨. 다들 춤추고 있을 때 전 혼자 박수치고 서있었어요. 저의 첫 오디션은 그렇게 끝이 났지만, 연기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전화가 왔고 최종적으로 합격이라는 연락을 받았죠.
이렇게 참여하게 된 작품이 제 데뷔작 <록 햄릿>입니다. 당시에 <록 햄릿>은 제작비가 많이 들어간 블록버스터급 뮤지컬이었어요. 여러모로 신선한 작품이었고요. 일단 ‘록 뮤지컬’이라는 점이 그렇고, 이야기도 좀 파격적인 면이 있었죠. 레어티스가 오필리어를 사랑하는 근친상간 요소가 있었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뭉친 스태프들이 젊었어요. 러시아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전훈 연출의 첫 번째 작품이었고, 오재익 안무도 이 작품으로 안무가로 데뷔했죠. 당시에 어리고 귀여웠던 (원)미솔이가 조음악감독으로 합창 지도를 했고요. 앙코르 공연으로 두 달 더 공연해서 네 달 정도 공연했는데, 그렇게 크게 흥행하진 못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시대에 너무 앞서갔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위에 호랑이 무늬 코트 입고 긴 머리 휘날리고 있는 사진이 있죠? 드레스 리허설 사진이에요. 제 배역은 레어티스였어요. 햄릿은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신성우 형이었고요. 형하고 같이 길을 걸을 때면 여자들이 달려와 옷에 사인을 받았어요. 저는 무명의 로커였으니 그런 일은 없었죠. 하지만 공연이 시작되고 나서는 저도 인기 좀 끌었죠. 그때는 새로운 얼굴이었고 20대 중반의 젊은 배우였으니까요. 특히 1막 마지막의 솔로곡을(그 곡이 진짜 멋있는 노래였어요) 그 곡을 부르고 나면 객석에서 핑크빛 하트가 뜨는 걸, 전 느꼈습니다. 하하. 조금 더 자랑하자면 다른 배우를 인터뷰하러 왔다가 저를 인터뷰 해가기도 했어요. 3대 스포츠 신문사와 모두 인터뷰를 했고요.
그때 재미있는 일이 참 많았어요. 제일 기억에 남는 사건으로는 아버지 플로니어스 실종 해프닝을 꼽을 수 있겠네요. 아버지를 죽인 햄릿에게 복수를 다짐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1막이 끝나는 거였는데 아버지 역의 배우가 무대에 안 나오는 거예요. 어어, 하는 순간 소대에서 막내 앙상블 배우가 튀어 올라와서 그 친구를 붙잡고 “아버지!!!”하면서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가 초반에 등장하고 계속 안 나오다 죽으러 나와야 했는데 분장실에서 깜빡 잠이 드셨던 거예요. 물론 관객들도 사고라는 걸 다 알았지만 그래도 잘 넘어갔죠.
이게 벌써 13년 전의 일이에요. 참, 이건 나중에 알게 된 건데 허스키한 보이스가 성우 형하고 잘 어울려서 뽑힌 거였대요. 생각지도 못한 계기로 뮤지컬과 인연이 돼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거죠. 가끔 그때를 회상하며 재밌게 이야기하곤 하는데 새삼 놀랍네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고요. 이제 어딜 가나 저보다 선배는 별로 없는 걸 보면 시간이 진짜 많이 흐르긴 흘렀군요. 어쨌든 전 앞으로도 지치지 않고 뜨겁게 달릴 겁니다. 계속 지켜봐 주세요!
1 스포츠 신문사와의 첫 인터뷰 사진. 그때는 뭘 모르니 총 쏘는 포즈 같은 촌스러운 포즈 취하고 그랬죠. 2 사진 오른쪽에 있는 (오)만석이 형 보이시나요? <포비든 플래닛> 공연 때 맥주 마시러 가서 찍은 기념사진이에요. 그때 인상적이었던 게 만석이 형이 맡은 캐릭터가 대본에 작은 역할이었거든요. 조연 중의 조연이었죠. 근데 연습할 때 만석이 형이 잘하니까 역할이 커지더라고요. `와, 잘하는 배우는 이렇구나` 하고 느꼈어요. 3 2003년 <그리스> 초연 당시 분장실에서 찍은 사진이에요. 제 배역은 두디였죠. 이 역할을 위해 스무 살 때부터 고수해오던 물론 장발의 참머리 긴 머리를 싹둑 잘랐다는 사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91호 2011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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