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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Persona] 가면이 상처를 감쌀 때 <아이다>의 암네리스 [No.90]

글 |박민정 일러스트레이션 | 권재준 2011-03-15 5,475

막연한 희망이 아닌 열망의 명령을 따를 뿐이다. 중요한 일 앞에서 오래 고민하고 우물쭈물하는 사람들이 그녀로선 이해되지 않았다. 모호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분명했고 그녀의 선택은 옳았다.


‘당신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군요.’
사람들은 종종 암네리스에게 충고한다. 겉모습이 다가 아니라며 즉흥적인 성미를 고치고 이면을 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입는 옷, 우리가 먹는 음식, 우리의 생김새는 우리의 영혼과 무관하지 않다. 그것은 행동이나 말보다 더 직접적으로 우리 내면을 드러낸다. 암네르스가 “보여지는 게 바로 ‘나’이고 내 드레스가 바로 ‘나’”라고 말해왔던 것도 그 때문이다.


“아름다운 옷을 입은 나는 아름답다는 찬사를 듣고, 아름다운 사람에 어울리는 몸가짐을 하지요.”

암네리스는 움직이고 나아가고 실천한다. 그녀를 둘러싼 타인들과 어떻게 얽히고설킬 것인가를 끊임없이 의식한다. 그렇다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하는 행동은 진실을 은폐하는 것일까? 


“드레스와 보석, 고고한 말투와 행동은 내 상처를 감싸주는 가면이에요. 사랑받지 못하면 상처도 받지만, 부드러운 가면을 쓴 나는 더 당당하고 너그럽고 따뜻한 사람이 되지요. 가면은 익숙해진 또 다른 내 얼굴일 뿐 진실을 가리는 도구는 아니에요.”
그녀 곁에 아무도 없었다면, 연민도 사랑도 미움도 느낄 수 없었다면, 그야말로 제멋대로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암네리스는 혼자가 아니었기에 주변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 가면은 노력의 다른 이름이었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진실을 무기로 ‘이게 바로 나야.’라며 가까운 이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암네리스가 사랑했던 남자 라다메스도 그런 사람이다. 조금이라도 그녀를 생각했다면, 그녀를 ‘배려하는 척’이라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사람들은 진실, 진실 생각 없이 목소리를 높이지만 진실은 손에 잡히는 개념이 아니다.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 진실이 되는 것이다. 노력하다보니 그녀의 가면이 이내 그녀의 얼굴이 되어버린 것처럼.

 


“가끔 사람들의 말에 더 이상 귀기울일 수 없을 때가 있어요. 그 사람의 겉모습이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걸 말해줄 때죠.”
하지만 세상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게 전부인, 속이 빤한 인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의외성을 가진 사람들도 많다.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아도 무엇이 있을까, 무엇을 말할까, 궁금증을 자아내는 인물 말이다.


“라다메스에게 난 그 어떤 의외성도 없고 궁금증도 유발하지 않는 여자였겠죠? 매사 그의 예상을 빗나간 적 없었으니까요. 어린 시절부터 알던 사이라는 건 이유가 될 수 없어요. 사랑에 빠진 난 늘 조급했고 들떠 있었으며 히스테리를 부렸으니 절대적인 약자에 지나지 않았던 거죠.”
대부분의 관계에서 한 사람은 사형집행인이 되고 만다. 어쩔 수 없이 어느 한쪽은 약자가 되고, 강자에게는 유희나 놀이의 문제가 되는 것이 약자에게는 생존의 문제가 된다. 하지만 암네리스는 끝까지 속이 들여다보이는 약자 역할을 자처하지는 않았다. 아이다와 라다메스를 한 무덤 속에 죽게 한 그녀의 사형 선고는 무엇보다 의외의 선택이었다. 


“사람들은 내 선택을 아이다와 라다메스의 사랑을 존중한 처사였다고 추켜세우지만 사실 별다른 의미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난 무엇보다 현실적인 사람이죠. 9년이라는 긴 약혼기간 동안에도 지치지 않고 라다메스를 기다렸던 건 구체적인 현실에 대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지 내 사랑이 지고지순해서는 아니죠.”
그러다가 마음을 돌리게 된 ‘어떤 계기’는 그녀도 모르는 새 갑자기 찾아왔다. 라다메스와 아이다가 만나는 장면을 목격한 후, 슬픔과 증오와 분노를 느낀 건 잠깐일 뿐, 평화로움과 자유로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녀는 실체도 없고 손에 만져지지 않는 것은 재빨리 단념해버리는 현실적인 여자였다. 긴 세월, 라다메스를 기다렸던 행동은 자신에 대한 억압이자 소극적인 사랑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조국보다는 사랑을 택한 아이다와 라다메스, 이 연인의 선택은 적극적인 사랑일까.


“국경을 거스른 사랑이라는 말은 너무 거창해요. 사실 여자들에겐 사랑이 곧 조국인 거죠. 스파이로 잠입했다가 제 임무를 저버리고 사랑에 빠지곤 하는 여자들 이야기는 이미 고전이 되었잖아요. 여자들은 ‘조국’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에 사로잡히기엔 너무 현실적이에요. 제도와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자기 나름의 행복을 실현할 구체적인 세계를 찾는 거죠.”
진열장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던 그녀가 잠시 뒷걸음질 쳤다. 어둡고 흐린 유리에 어떤 그림자가 어린 것이다. 앙상한 몸에 버거울 정도로 거대한 옷을 걸치고, 얼굴 가득 커다란 미소를 짓느라 볼 사이에 깊은 주름이 팬,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얼굴. 암네리스는 한참이 지나서야 바로 그 그림자가 그녀 자신의 모습이라는 걸 알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90호 2011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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