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연극 <레인 맨> 공연을 마친 후 뮤지컬 배우 고영빈의 모습은 어떤 무대에서도 볼 수가 없었다. 배우로서 좀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뉴욕 유학길에 올랐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나이에 감행한, 조금은 갑작스러웠던 그의 유학 생활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 소식이 궁금한 이들을 위해 고영빈이 직접 전해 온 편지와 사진을 공개한다.
안녕하세요? 고영빈입니다. 제가 뉴욕에 온 지도 벌써 5개월이 지났습니다. <레인 맨> 공연을 마치고 뉴욕행을 결심했을 땐 많은 것을 경험하고 크게 변화해서 한국에 돌아가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5개월이 지난 지금은 어떠냐고요? 제 생각을 말로 다 표현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세상은 정말 넓고, 나와 전혀 다른 사람들이 너무나 많고, 나라고 특별할 것이 없으며, 못할 일도 없고, 아직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이 있으며, 아직은 도전해볼 만하다는 것입니다.
영어 초보 고영빈의 자기 발견
저는 지금 뉴저지 잉글우드에 위치한 조용하고 조경이 좋은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25분 정도 걸어야 편의점이나 식당 등을 만날 수 있어 조금 불편하지만 괜찮습니다. 매일 맨해튼을 다녀오는 길에 장을 봐오거든요. 뉴욕에 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어학 학교에 등록하는 것이었습니다. ‘맨해튼 42번가에서 가장 가까운 학교여야 한다’는 것이 제 조건이었죠.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나 아침 식사를 하고, 15분을 걸어 뉴욕행 버스를 타고 40여 분을 달려가야 하지만 다행히 아직까지는 규칙적으로 잘 생활하고 있답니다. 처음 3개월은 학교에서 온종일 수업만 들었던 것 같아요. 오전 8시 45분부터 오후 5시 45분까지 9시간을 학교에서 보냈죠.
조금 창피한 얘기지만, 전 영어라면 온몸이 경직될 정도로 거리를 두고 살았거든요. 누구와 대화를 하다가도 영어가 나오면 창피해서 못 들은 척할 정도였다고나 할까요. 뉴욕에 와서 혼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말도 안되는 영어를 쓰는 저를 보면서야 제 안에 뻔뻔스러움이 내재되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도 참 다행이죠? 한국에서처럼 점잔빼고 조용히 지내지 않아서 말이에요.(웃음) 그렇게 맨해튼 여기저기, 다운타운에서 업타운으로, 이스트에서 웨스트로 걷기도 참 많이 걸었습니다. 처음 3개월은 모든 것이 처음이라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는데, 요즘은 괜찮다 싶으면 들어가서 먹어보고, 입어보고, 읽어보고, 만져보곤 합니다. 점원과 서로의 이름을 알려주며 담소를 나누는 것도 또 하나의 놀이가 됐습니다. 아직도 대화의 절반 이상은 웃음이지만 말입니다.
가난한 유학생의 공연 관람기
당연히 공연도 보러 다닙니다. 가난한 유학생이 다 그렇겠지만 비싼 공연 앞에서는 저 역시 짠돌이가 되더라고요. 주로 학생 티켓이나 반값 티켓으로 공연을 보는데, 할인 혜택이 거의 없는 인기 공연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매일 TKTS를 찾아 확인을 하곤 합니다. 가끔은 극장에 가서 직접 물어볼 때도 있고요.
제 기억으로 손드하임의 <소야곡>이 학생 티켓으로 관람한 첫 번째 뮤지컬이었던 것 같아요. 스탠딩으로 관람해야 한다는 걸 극장에 들어가서야 알았는데, 여주인공 버나뎃 피터스의 뛰어난 연기력에 2시간여를 힘든 줄 모르고 보냈어요. 무대를 꽉 채우는 배우들의 연륜과 내공에 감동했습니다. 뛰어난 가창력을 뽐내는 배우가 있었던 게 아닌데도 음악이 무척 편안하게 들렸고,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느낄 수 있었어요. 노래도, 대사도 모든 것이 정확히 제 눈에서 보이는 거리만큼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처럼 들려서 편안했고요. 공연을 보고 나서 ‘나도 저 나이, 아니 저들보다 훨씬 더 나이가 들어서도 무대에 서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배우가 배우로서 나이 드는 모습만큼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겠어요. 중견을 지나 원로 배우가 되어서도 설 수 있는 무대가 있기를 바라야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중견 배우의 활약이 돋보였던 <새장 속의 광인>도 기억에 남습니다. 정말 웃고 또 웃다가 결국 울어버린 공연이에요. 중년의 게이 부부 이야기였는데, 아내 역을 맡은 배우의 연기는 단연 일품이었어요. 무반주로 노래를 해도 객석에서는 이미 리듬을 타고 있을 정도였죠. 뛰어난 가창력 때문이 아니라 그가 갖고 있는 음악성의 힘이었던 것 같아요. 그가 몸으로 느끼는 리듬이 그대로 객석에 전달되고, 관객들은 그와 같은 리듬을 타면서 그의 얘기를 듣게 되는 거죠. 어쩌면 그렇게 배역에 100퍼센트 빠져들 수 있는 것일까요? 오랜 시간을 들인 수많은 관찰과 실험, 연륜에서 나오는 진실함이 그 답이 아닐까 싶습니다. 젊은 배우들의 짧은 경험과 끼만으로는 감동을 주기는 힘든 일이니까요.
가장 운 좋게 본 공연은 <넥스트 투 노멀>이 아니었나 싶어요. 뉴욕 마지막 공연이니 당연히 티켓이 없을 줄 알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무작정 공연장을 찾았습니다. 공연을 볼 수 있는 단 하나의 기회는 바로 로터리 티켓에 당첨되는 것이었어요. 16장뿐인 티켓을 얻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족히 3~4백 명은 되어 보였죠. 과연 이들 중에 내가 당첨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순간, 극장 직원이 또렷한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얼마나 기뻤는지 ‘으악’ 하고 소리 한 번 지르고는 ‘Here! Here!’ 하며 달려 나가 티켓을 받았어요. 공연은 물론 좋았죠. 행운의 티켓을 거머쥔 기쁨도 한몫했겠지만 배우들의 연기며, 음악이며 무엇 하나 빠질 것 없이 정말 좋았어요. 태어나 얼마 안되어 죽은 아들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상상 속에서 17~8년 동안 아들을 느끼고 키워온 엄마가 주인공이에요. 그로 인해 딸은 본 적도 없는 오빠 때문에 상처받고 남편은 그런 아내를 고치려고 무던히 노력하고… 슬플 것 같은 내용이지만 록 음악을 감상하는 재미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만한 작품이에요. 아들 역으로 출연한 배우는 가창력도 가창력이었지만 자유로운 몸놀림이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현실의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지 철제 3층 무대를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가볍게 뛰어다니고, 기둥을 많이 이용한 동작들이 약간 위험해 보이긴 했지만 멋있었어요. 다른 배역과 어울리기보다는 제3자 입장에서 감정의 폭이 큰 연기를 선보이는 매력적인 아들 역은 기회가 닿으면 한번 도전해보고 싶더라고요.
뉴욕에서 맞은 2011년의 첫 선물
새해에는 롱아일랜드로 일출을 보러 갔습니다. 올해 하고 싶은 일 모두 다 이뤄지게 해달라고 기도도 했죠. 근데 참 이상한 것은, 일출을 보러 온 사람들이 대부분 한국인이었다는 거예요. 나중에 들으니 이곳 사람들은 밤새 파티를 하느라 일출을 볼 수 없대요. 그래서 왜 잠도 안 자고 일출을 보냐며 의아해 하더라고요. 왜 그런 걸까요?(웃음)
뉴욕에 와서 오랜만에 동료 배우를 만났어요. (안)유진이로부터 뉴욕에 여행 왔다는 전화를 받고는 반갑고 또 신기한 마음에 바로 약속을 정했죠. 뉴욕에서 데이트하기에 가장 좋은 곳은 역시 패션의 거리 소호 아니겠어요. 멋쟁이들, 특히 예쁜 여자들은 전부 소호에 모여 있는 것 같아요. 모델 같은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 또한 이곳에서만 즐길 수 있는 특별한 재미인 듯해요. 유진이와는 소호의 거의 모든 매장을 돌아다녔어요. 맛있는 커피도 마시고 타르트와 피자도 먹고, 사진도 많이 찍고…. 지하철과 도로 걷기를 수차례 반복하면서 차이나타운, 리틀 이태리, 노호, 소호, 그리니치빌리지 등을 돌아다니면서 밤늦게까지 시간을 보냈어요. 누군가와 함께 길거리 데이트를 즐긴 건 정말 오랜만이라 더 재밌지 않았나 싶어요. 또 언제 그런 데이트를 하게 될까요.(웃음)
뉴욕에는 앞으로 5~6개월 정도 더 있을 계획입니다. 배우로서 트레이닝은 지금부터예요. 올해에는 어학 공부뿐만이 아니라 이곳 드라마 스쿨 봄 워크숍에도 참여할 계획이에요. 그동안 브로드웨이 댄스 센터(Broadway Dance Center), 스탭스(Steps), HB 스튜디오(HB Studio), 스텔라 애들러(Stella Adler), 뉴욕 필름 아카데미(New York Film Academy), 등 여러 아카데미를 둘러보면서 다닐 만한 곳을 살펴봤는데, HB 스튜디오가 가장 적당할 것 같더라고요. 다양한 워크숍이 준비되어 있는 데다, 수업 시간이 겹치지만 않으면 음악(보컬, 리딩)과 신체 활동, 스피치 수업 12주 프로그램을 중복해서 신청할 수 있거든요. 사실 뉴욕에 오자마자 듣고 싶었던 수업이었는데 사람들과 소통할 수 없으면 안될 것 같아 봄 학기를 목표로 준비를 했어요. 영어로 대사를 하면 과연 어떤 느낌이 들까요? 이제 곧 시작될 수업이 무척 기다려집니다. 이곳에서의 수업이 배우 고영빈을 얼마나 변화시킬지 궁금하지 않나요? 기회가 되면 본격적으로 배우 수업을 시작하는 고영빈의 소식도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 안녕!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90호 2011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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