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발이 너무해>
“엘은 잘 지내요?”
워너의 물음에 에밋이 고개를 끄덕인다. 한때 연인이었던 엘이 잘 지낸다는 소식에 워너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런데 그 안도감은 갑자기 상실감으로 변해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누구나 각자의 슬픔을 견디며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건만 돌아보니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잘 지내고 있었다. 워너의 불안한 표정을 말없이 지켜보던 에밋은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사람을 오래 바라본 적 있어? 곁눈질로만 바라보는 건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것보다 나쁘지. 누군가를 조금 안다는 건 아예 모르는 것보다 위험해.”
“무슨 말이죠?”
“잠깐 던진 눈길에는 상대방의 진짜 모습은 걸려들지 않아. 간밤에 잠을 못 자서 하품을 할 수도 있고 배가 고파서 인상을 찌푸릴 수도 있어. 그런데 우린 타인을 그다지 오래 응시하지 않잖아. 그렇게 순간순간 스친 표정들을 나름대로 엮어서 그 사람에 대해 상상하면 오해와 억측만 늘어날 게 분명해.”
이야기하는 내내 에밋은 워너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에밋의 진중하고 맑은 눈빛이 워너를 절망으로 빠뜨렸다. 알량한 질투도 덧없는 욕망도 깃들지 않은 그 자체로 충만한 시선은 ‘너 그렇게 아등바등해도 소용없어’라고 말하는 듯했다.
사실 워너는 엘을 오래 바라본 적이 없었다. 그녀와 데이트 하는 동안에도 그녀를 본다기보다 다른 사람들이 환호하는 그녀의 화려한 이미지에 신경을 썼다.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대단한 여자로 인정했을 때 자신에게도 대단한 여자일 수 있었다. 워너는 엘을 거의 모르고 있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매몰차게 떠나도 끝까지 자신만 졸졸 따라다닐 것 같던 엘이 어떻게 에밋에게 청혼을 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솔직히 의아했어요. 당신처럼 촌스럽고 집안도 그저 그런, 그냥 선배였던 남자가 어떻게 엘의 청혼을 받았는지. 엘은 패션 감각 없는 남자라면 질색했거든요.”
에밋은 워너의 경솔한 말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대화를 이어갔다.
“난 멀찌감치 떨어져서 그녀를 바라봤어. 너무 가까이에서 그녀를 들여다보면 자기 아닌 다른 것들로, 가령 화려한 분홍색 가면으로 시선을 분산시킬 것 같았거든.”
“하지만 겉모습도 내면을 드러내 중요한 정보 아닌가요?”
“물론 그래. 하지만 어떤 시선으로 보느냐가 문제지.”
“결국 내가 문제군요. 내 마음속이 이 지경이니 무엇인들 아름답고 좋아 보이겠어요? 내가 보는 게 결국 내 마음속 풍경일 텐데.”
“당신 잘난 사람인데, 뭐가 그렇게 불안해서 갈팡질팡했어?”
“피나게 노력해서 이 자리까지 왔는데 보상받고 싶었던 거죠. 거래 말이에요. 내가 선택한 여자가 나의 상품 가치가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찻잔에 설탕을 넣고 휘저을 때만 해도 에밋은 워너의 마음을 상하게 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찻잔을 다 비운 지금, 그는 워너 입장을 배려해줄 필요가 없다고 결론 내린다.
“그렇다면 이제 혼자인 당신은 빈털터리인가? 엘도 비비안도 당신을 버렸으니.”
“엘은 아직도 내가 밉고 원망스러운가 봐요? 당신더러 여기 와서 대신 복수해 주고 오라고 시켰나보죠? 왜 그렇게 행복을 보여주지 못해 안달입니까?”
결국 워너는 억누르고 있던 감정을 터뜨리고 만다. 누가 누구에게 이래라저래라 훈계할 수 있을까. ‘뿌린 대로 거두는 거야’라는 식으로 다그치는 에밋의 태도에 워너는 마음이 상했다. 현재의 행복은 과거의 착실한 행동에 대한 보상이 아니며 현재의 불행 또한 과거의 행동에 대한 형벌은 아니다. 누군가를 만나고, 기적인 듯 감탄하고 행복과 환희를 느끼다가도 어느새, 의문을 품고 섭섭해 하고 분노를 느끼고 이내 무관심해지다가 망각하기도 하는, 그것이 삶이고 사랑이 아닌가?
“엘은 당신에게 지독하게 집착했어. 그런데 당신 앞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가 없었다고 하더군. 그 순간부터 나는 엘을 사랑하게 된 것 같아.”
사실 에밋은 엘의 밝고 꾸밈없는 태도를 좋아했을 뿐, 처음부터 그녀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엘의 환한 모습 뒤에 드리워진 그늘에 마음이 아팠다. 그녀를 오래 바라보면서 ‘행복은 내 것이 아니야’라는 체념을 본 것이다. 워너와 마주친 날이면 거울을 보고 엉엉 우는 바보 같은 엘을 그는 돕고 싶었다. 아름답고 똑똑한 그녀가 모든 것을 워너의 눈을 통해 보고 자신이 너무 못났다며 투덜거리는 모습이 마냥 안타까웠던 것이다.
“당신만 보면 의기소침해지던 엘이 나와 함께 있으면 늘 여왕인 듯 자신만만하게 행동했어. 자신감이야 말로 바로 그녀의 매력 아니던가. 거절을 두려워하지 않는 당당함 말이야. 나와 함께 있는 엘은 늘 즐거워했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면 ‘선배, 정말 재미있어요. 우리 좀 더 놀다가 가요.’라고 자주 말했어. 그런 엘에게 난 물었지. ‘왜 워너에게는 이렇게 말하지 못했지?’라고.”
“어쩌면 당신을 덜 사랑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그녀다운 모습을 자신 앞에서 당당하게 보여줄 수 있었던 거 아닐까요. 날 대할 때처럼 황홀감에 얼어붙지는 않으니.”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다고 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지는 않아. 알다시피 가장 많이 사랑하는 것과 내 사람이 되는 것은 다른 문제잖아. 난 덜 사랑 받더라도 그녀가 편안하게 생각하는, 그녀 곁에 오래 머무는 사람이고 싶으니까.”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89호 2011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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