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로얄 패밀리의 코믹 가족사
빵 터졌다. <라스트 로얄 패밀리> 리딩 공연장 관객들의 반응이 어느 공연보다 뜨거웠다. <라스트 로얄 패밀리>는 조선 말기 암울했던 시대적 배경을 유쾌하게 뒤틀면서 웃음을 주었다. 내시들로 이루어진 고종 임금의 비밀 결사단 777(007를 본땄다)은 애수앵애수로 고종과 연락하고, 시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조선 최초의 양악대를 만든 독일인 에케르트를 등장시켰다. 치매에 걸린 순종의 내시가 남긴 책이라는 설정으로 픽션 사극을 자유롭게 꾸민 것이다. 발랄한 상상을 도모한 전미현 작가는 아직 학생이고 조미연 작곡가는 갓 졸업한 신인 창작자지만, 올해 대구에서 <노른자 동동 불량남녀>를 공연했고, 작년 우수작품 지원작에 선정된 <언더니스 메모리>를 올해 공연하는 등 이미 적지 않은 작품을 협업해냈다. 미래가 기대되는 두 창작자를 만났다.
* CJ크리에이티브 마인즈는 신인 뮤지컬 창작자들에게 작품 개발 기회를 제공하고 이를 선보이는 프로그램입니다.
작품 소개
열다섯 사춘기 소년 척(순종)은 어머니 명성황후의 강압적 교육에 고통스러워 하며 궁궐 밖 생활을 동경한다. 그의 유일한 친구였던 영어 선생님 로버트(로버트 할리를 연상시키는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인물)가 새로운 문물로 척의 공부를 방해한다는 이유로 명성황후는 로버트를 내쫓는다. 순종을 불쌍히 여기고 명성황후에게 복수를 하고팠던 로버트는 순종을 가방에 숨겨 궁 밖으로 도망치려고 한다. 로버트의 환송 연회일, 남사당패 일원인 꼭지와 꼭두는 순종이 들어있는지도 모르고 가방을 훔쳐 궁 밖으로 달아난다. 궁 밖을 나간 순종을 찾기 위해 고종은 경연 대회를 벌인다. 해설자의 잘못된 소개로 시대에 앞서 한국 땅에 온 에케르트는 순종과 꼭지, 꼭두와 양악대를 꾸리는데…
어떤 계기로 작품을 구상하게 됐나?
전미현 구한말을 배경으로 스파이 영화를 써보려고 했다. 왕자를 납치하는 스토리로 구상하고, 사전 조사를 했다. 서양 문물과 충돌이 있었던 시기였고, 조선 최초의 양악단이 만들어진 시기이기도 해서 뮤지컬로 만들면 좋겠다 싶었다. 그래서 CJ 크리에이티브 마인즈에 기획안을 제출했는데 선정되어서 본격적으로 고민할 수 있었다.
‘픽션 사극’이라는 형식이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이번 작품은 기존 사극들과 접근하는 태도가 남달랐다.
전미현 중심 컨셉은 차별화였다. 기존의 역사 뮤지컬들은 <영웅을 기다리며> 정도를 제외하고는 애국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과거라는 시간적 공간은 현재와 다른 공간이어서 좀 더 다른 세계를 다룰 수 있고 그럴 때 역사물의 장점이 발휘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파격적인 장면들이나 상상력을 발휘한 장면들이 많았지만 중심 이야기를 놓고 가진 않았던 점이 좋았다.
전미현 제목이 ‘라스트 로얄 패밀리’이지 않나. 고종, 순종, 명성황후 세 사람이 망국의 길을 걷던 세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 이미지가 요즘 가족들과 비슷하다. 자료를 조사하다 보니 명성황후는 아들 교육에 관심이 많았고 합궁할 때 앞을 지키고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아이들을 과보호하고 사교육 열풍을 일으키는 우리 어머니들과 비슷했다. 고종은 무능력한 아버지 같고, 순종은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한 인물 같았다. 이들을 통해 현대 가족들의 문제를 건드리고 싶었다. 그런데 작품 속에서 인물을 바라보는 시각이 식민사관의 평가와 비슷해서 그 점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시간적 배경이 과거지만 현대 문물들을 충돌시키면서 재미를 주었다. 삼각김밥을 먹는 법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 ‘밑바닥 인생’은 슬픈 멜로디에 재밌는 가사를 입혀 재미를 더했다.
조미연 처음부터 의도했던 것은 아니고 원래는 슬픈 가사였는데 너무 처지는 것이 아니냐고 해서 앞부분의 가사를 바꾼다. ‘애수앵애수(哀愁)’(조선왕조에 내려오는 비기라는 설정으로 지금의 SNS를 음차한 노래)는 아이디어가 재미있고 가사가 유머 있게 비튼 것이기 때문에 노래도 비틀어서 발라드로도 재밌는 내용을 담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한자로 된 것이니 하늘 천 따지 하는 식의 구음으로 풀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만든 곡이다.
‘애수앵애수’도 그렇지만 ‘기별이 온다’ 같은 코믹한 곡의 노랫말이 주로 귀에 쏙쏙 들어오면서 기억에 남는다.
조미연 작곡가로서 멋있는 노래를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는데 코믹 송들은 드라마를 위해 그런 욕심을 다 내려놓고 만든다. 그냥 노래만 듣기에는 멋있는 곡은 아니지 않나. 드라마랑 잘 맞고 재밌으니까 기억에 남는 것인데 곡을 만들고 처음 배우들에게 보여줄 때면 부끄러워서 숨고 그랬다. 다행히 드라마와 잘 맞아서 더 좋아해주곤 했다.
전미현 작가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영어 교사 로버트는 로버트 할리를, 에케르트는 강마에를 패러디 했다. 시대극과 현대물의 충돌, 패러디를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전미현 패러디에서 웃음이 나온다. 시대를 뒤튼 이야기니까 콘텐츠도 뒤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장금이도 기존이랑 다른 인물로 끌어들였다. 재미있는 방향을 추구한 것은 맞는데 내가 재미있어야 쓸 수 있는 타입이라 너무 오버하나 싶긴 했지만 일단 하고 싶은 것은 다 해봤다. 재밌는 요소들을 다 던져놓고 줄여 나가자는 생각이었다.
웃음을 준 데에는 해설자의 역할도 컸다.
전미현 해설자를 통해 극의 컨셉과 구조를 전달하고 싶었다. 시간을 당긴다거나 패러디한 인물들을 어색하지 않게 나오게 하는 장치였다. 작품에서 공간 이동이 좀 많은데 해설자의 설명만으로 빠르게 전환하게 했다.
리딩 형식으로 발표하다 보니 축약해야 했을 텐데, 보여주지 못해서 아쉬운 부분은 없었나?
전미현 극 초반에는 가족 간의 드라마가 전개되다가 경연 대회 연습 장면부터는 패러디와 코믹으로만 나온다. 그 사이에 가족 문제를 끼워 넣기가 힘들어서 양악대 멤버들이 친해지는 과정이나, 명성황후가 순종을 생각하는 장면이 삭제되었다. 나 스스로도 확정 짓지 못하고 있던 부분이라 아쉽지는 않다.
조미연 작가님한테 미안할 정도로 드라마를 삭제하고 곡을 살리는 방향으로 발표했다. ‘최초의 애국가’를 넣기로 했다가 보류했다. 리딩을 본 분들이 마지막에 갈등의 해소가 약하다는 말을 많이 했는데, 그것까지 보여줬으면 어느 정도 해결되지 않았을까.
마지막 부분에 대해 아쉬움이 있었나?
전미현 순종이 떠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내적으로 성장하는 구성인데 잘 표현되지 않았나 보다. 마지막 곡 ‘최초의 양악대’ 사이에 간주가 나오고 그때 순종이 마음을 바꿔 양악대로 돌아간다. 길게 끌면 억지로 감동을 주려고 하는 것 같아 넘버 안에서 해결하고자 했다.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리딩 무대를 준비하면서 낼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이었다.
조미연 많은 분들이 마지막 장면에서 순종의 마음이 너무 금방 바뀌고 정확한 사건을 만들어주지 않았다는 지적을 했다. 그 장면에서 좀 더 강한 감동을 바랐던 것 같다.
기자 순종이 궁으로 되돌아가는 설정이지만 이전과 다른 것이라면 스스로 결정했고, 자신을 이해하고 아끼는 친구들이 생겼다. 드라마적으로는 충분히 해결되었다고 본다. 문제는 그 해결을 노래로 느끼게 해야 하는데 마지막 곡은 그 점이 약했다. 양악대가 먼저 노래하고, 간주가 지나면 다시 마음을 바꾼 순종이 합세해 노래를 한다. 그런데 순종이 없을 때와 있을 때의 노래 변화가 없다. ‘원 밴드 원 사운드’라는 가사가 귀에 남지만 순종의 참여로 비로소 하나가 된 느낌을 주진 못했다. 그리고 ‘최초의 양악대’의 가사가 순종의 변화와 성장을 보여주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밴드와 국악기, 오케스트라 등 악기 사용이 다양하다.
조미연 작품을 구상할 때부터 국악, 클래식, 록 밴드 세 가지 음악을 생각하고 이것들이 잘 섞이기를 바랐다. 너무 규모가 커지니까 MR로 가야하나 고민하다가 사정상 밴드 위주로 편성하게 된 것이다.
조미연 작곡가
실제 공연을 한다면 어떤 무대를 생각하나?
전미현 기획 때부터 퍼포먼스가 강한 작품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장거리의 살판은 비보잉으로 풀어낼 수도 있고, 여건이 된다면 <시카고>처럼 무대 뒤쪽에 밴드를 올려놓고 마지막 경합 장면에서는 이들이 마치 양악대의 일부인 양 연출할 수 있을 것이다. 진짜 하고 싶었던 것은 마칭 밴드 20~30명이 등장해서 행진하는 것이다.
기자 국악, 오케스트라, 록 밴드에 20명의 마칭 밴드! 현실적이지 않은 꿈이지만 젊은 창작자의 상상력만큼은 유쾌하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05호 2012년 6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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