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인> 모르는 척
“이제 내가 네 곁에 영원히 있을게.”
지민은 세진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이면서도 자신이 생각해도 그 말이 좀 허풍인 것 같아서 피식 웃었다. 소믈리에 과정을 밟기 위해 프랑스로 떠나는 것도 단념하고 세진 곁에 있기로 한 그였지만, 세진과 결혼을 하게 되면 자신 곁을 맴도는 여자들과의 관계도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정착은 하고 싶었지만 구속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평소 탐탁지 않게 여겼던, 아내 몰래 젊은 여자들에게 찝쩍대는 유부남들처럼 사는 것도 구질구질하고 귀찮은 일이다.
‘자꾸만 옛 추억이 떠오른다는 건, 내가 지금 세진에게 집중하지 못한다는 걸 의미할까.’
한동안 떠나고 싶다는 생각 따위는 들지 않을 만큼 현실에 흥미를 느꼈던 지민은 다시 트렁크를 꾸리고 싶고 꿈속에서 말을 거는 옛 연인들을 만나러 가고 싶고 소믈리에 공부도 다시 시작하고 싶다. 세진과 함께 있을 땐 세진이 사랑스럽고, 다른 예쁜 여자가 옆에 앉아 있으면 다른 여자와 데이트를 하고 싶다. 대부분의 바람둥이들처럼 그의 이상형도 ‘처음 본 여자’인지도 모르겠다. 무리라는 건 알지만, 지민은 자신의 마음속에 여러 개의 방이 있다는 걸 세진이 이해해줬으면 했다.
“너 오늘 너무 낯설게 보여. 다른 사람 같아. 그때처럼 변장을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런 거야?”
세진이 상기된 뺨을 유리창에 기댄 채 말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지민이 웃으며 노래가사를 흥얼거리다 묻는다. “근데 너 오늘 너무 예민한 것 같다? 왜 그래?”
세진은 누군가에게 느끼던 친밀감을 잃으면 갑자기 그 사람을 딴 사람처럼 여겼다. 그래서 아는 사람도 모르고 지나친 적이 많다. 사람들은 그녀가 일부러 모른 척 한다고도 생각했지만, 그녀는 상대의 겉모습이 특별히 변하지 않아도 그들을 못 알아보곤 했다. 시력이 그다지 좋지 않아도 먼 곳에서부터 절대적으로 믿는 가족만큼은 용케 구별해내는 개처럼, 익숙한 체취나 목소리로 좋아하는 사람만 알아보는 것일까.
“왜 이럴까…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내 마음이 문제일까?”
지민을 좋아하면서 세진은 포도주도 커피도 마시지 않았다. 지민과 함께 있으면 커피를 많이 마시지 않아도 기분 좋은 긴장감을 느꼈고 포도주 없이도 취한 듯 정신이 혼미했다. 지민은 늘 세진의 예상을 빗나가는 남자였다. 바람둥이일 것 같았으나 성실했고 무성의할 것 같았지만 강박적이다 싶을 만큼 약속을 잘 지켰다. 이런 지민을 만나기 전까지는 세진은 베케트의 ‘고도’처럼 ‘오지 않는 막연한 희망’을 기다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기다린 것은 구체적이고 단순한, 손에 잡히는 사랑이 주는 공감이었다.
“우울할 땐 언제든 날 찾아. 내가 기분 풀어줄게!”
얼마간 허풍이라는 건 알아도 세진은 의미 없는 말 한마디만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별생각 없이 허세를 부리는 지민 앞에서 그녀는 자신 안의 여러 모습을 자유롭게 풀어놓았다. 지민의 말이 진심일까 따져 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지민이 휴대폰을 두고 화장실에 가도 세진은 그것을 훔쳐보지 않는다.
‘그에게는 여러 모습이 있고 그 중 어떤 모습은 나를 당혹스럽게 해도, 다정한 모습도 이기적인 모습도, 소심한 모습도 허풍떠는 모습도, 다 그의 모습이겠지. 나는 그런 모습 모두 이해해야해.’
세진도 예전에는 연인 사이라면 상대가 좋아할 만한 모습만 보여주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좋아하는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는 모습을 연출하려 애썼다. 그녀 안에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모습도 있었지만 어리석고 나약하고 보잘 것 없고 게으르고 속물적인 모습도 존재했다. 하지만 그녀가 꽁꽁 싸매둔 여러 가지 모습들은 가끔 무방비상태에서 날 것으로 튀어나왔고 가다듬어지지 않은 모습을 본 사람들은 실망을 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고 다그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난 너의 단순함이 좋아. 열정적이고 순박하지. 넌 사람을 있는 그냥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알잖아. 너 덕분에 난 더 이상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연기’는 하지 않게 된 것 같아. 그래서 말인데….”
“그래. 말해봐.”
세진은 대답하지 않고 한참을 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지민은 침묵하고 있는 세진을 깨우지 않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할 말이 없어서인지 그냥 그녀를 가만히 둔다.
‘어떻게 해야 할까?’
지민은 왜 자신이 세진에게 조언을 해주고 연민을 느끼고 그녀의 삶을 바꿔주고 싶다는 의지를 가졌는지 이해할 없었다. 세진은 좋아한다던 지민의 단순함은 때론 문제를 일으키는데, 그는 책임질 수 있는 말인가를 고민하지 않고 그때그때 느끼는 감정에 충실해서 큰소리쳤기 때문이다.
“넌 나도 모르는 나에 대해, 어쩌면, 내가 아닐 수도 있는 나에 대해 말했지. 너에게 익숙해지는 동안, 나는 바보가 되어버린 것 같아. 결정 능력을 상실하고 네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게 현명하게 사는 거라고 생각했어. 왜 그렇게도 사랑에 대해 정의를 못 내려 안달을 냈는지. 정답은 없고 영원한 것도 없는데 말이야.”
세진은 너무도 낯설게 보이는 지민에게 담담히 말한다. 지민은 세진의 눈을 보고 그녀의 마음속에 큰 동요가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아도 아무 것도 묻지 않는다. 그들의 마음이 온전한 진실은 아니라 해도, 진실에 조금이나마 가까워진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당분간은 덜 외로울 것 같았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84호 2010년 9월호 게재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