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기 위해 우리가 한 것들
한 여자와 두 남자가 있었다. 일국을 호령하는 절대 권력을 쥐고도 누구보다도 고독했던 여자는 그 공허를 견디기 위해 한 남자의 전부를 원했다. 하지만 남자는 그가 아직 남자가 아니라 아이였던 시절부터 모든 것을 함께했던 동무와 자신의 전부를 공유하고 있었다. 낳아준 부모보다도 서로와 함께한 시간이 더 길었고, 부모의 손길보다 서로의 보살핌에 대한 기억이 더 많았다. 한날한시에 태어나지 않았고 피가 섞인 동기간도 아니고 기질도 달랐지만 언제나 함께였고, 함께인 것이 당연했다. 해가 지면 다시 뜨고, 숨을 들이시면 내쉬게 되는 것처럼 당연한 그 일이, 여자의 결심 앞에서는 전혀 당연하지 않은 일이 되었다. 여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 권력의 무게는 두 남자가 서로를 위해 어디까지 견딜 수 있고, 무엇까지 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시험대가 되었다.
바람과 달의 주인이라는 멋스러운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남자 기생, 현대로 빗대면 ‘호스트’인 화류계의 남자들을 주인공으로 한 이 가상의 역사 로맨스물에서 핵심이 되는 열과 사담의 관계는 한마디로 단정 짓기가 곤란하다. 연애 관계인 두 남자가 서로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고, 상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줘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차라리 관객들을 설득시키기 쉬울 것이다. 공개 리딩을 했을 뿐인 창작뮤지컬의 프리뷰 공연 티켓이 유례없는 속도로 팔린 것도 언제부터인가 한국 뮤지컬계에서 흥행하는 소재가 된 동성애 코드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진단이 틀린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많은 관객들이 이 작품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기대하는 요소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두 배우도 이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도 굳이 그 길을 마다하겠다니 이유가 궁금했다. “그렇게 해도 되겠죠, 물론. 한 사람은 여리고 여성스럽고 섬세하고 한 사람은 남자답고, 누가 봐도 연애 관계고, 그래도 되죠. 그런데 그렇게 안 해도 되니까.(웃음) 많은 분들이 그렇게 예상하고 예측하고 있다는 걸 알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실망할 분들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안타깝지만, 할 수 없죠.” 김재범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풍월주>를 두고 ‘퀴어 코드에 대한 관객들의 기호를 너무 노리고 들어간 작품 아니냐’는 일각의 의심에 대해 성두섭은 고개를 저었다. “노리고 가는 건 아니에요. 노렸다면 굳이 이렇게 피해 가지 않겠죠.”
많은 이들이 설정만 듣고도 ‘뭔지 알겠다’고 말했던 작품에 대해 두 주연 배우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이건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작품이 아니라고 하니, 더 궁금해진다. 그런 작품이 아니라면, 그럼 어떤 작품일까?
여느 창작뮤지컬이 그렇듯이 <풍월주>도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배우들의 목소리가 반영이 되고 있다. 김재범은 사담의 입장에서 대본을 보면서 너무 남녀 간의 대화처럼 보일 때는 오히려 반대로 해본다거나, 현실적으로 남자로서는 좀 간지러운 말이다 싶은 대사는 의견을 내서 다듬기도 했다. 조곤조곤한 말투로 단호하게 말하는 김재범처럼 성두섭도 작품의 방향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래야 더 매력 있을 것 같아요. 너무 전형적이고 기존에 나온 작품들과 다를 바 없는 것보다는 좀 다른 관계를 보여주고 싶어요. 그리고 사실 설정만 보면 사담은 여리고 열은 남자다울 것 같은데 오히려 반대예요. 열이 더 여린 면도 있고, 사담이 더 강인한 면도 있고.”
열과 사담의 관계에 대해, 또 <풍월주>라는 작품에 대해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면서 이야기를 할 때는 꼭 한 사람이 하는 말처럼 걸리는 부분이 없이 이어졌다. “둘은 그냥 남자들이에요. 함께 자라고 서로를 필요로 하지만 의외로 서로 속 이야기를 다 털어놓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속으로는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딱 보통 남자들이죠.”(김재범) “서로 말도 잘 안 하고 속내를 다 보여주는 것도 아닌 남자들인데 그러다 보니 어느 지점까지는 둘의 마음이 잘 안 보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렇게 조금씩 쌓이다가 뒤로 가서야 아 저들의 결론이 저거구나, 이런 마음이구나 하는 게 뒤늦게 터질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더 마음이 아픈 거고요.”(성두섭)
성두섭은 열이 풍월주가 된 것도 그 길이 두 사람이 함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운루에서 목숨을 걸고 여자들에게 웃음과 몸을 팔면서 살아가는 친구를 지켜보며 사담이 화를 내도 열은 이게 우리가 함께 있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고, 너와 함께 있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해주지 않는다. 등 따시고 배부르게 살고 있으면 됐지 뭘 그러냐고 무뚝뚝하게 응수할 뿐이다. 입이 있는데 말을 못하는 남자인 것은 마찬가지인 사담에 대해서 김재범이 부연을 했다. “사담은 나만 없으면 쟤가 잘될 것 같고, 잘 살 것 같아서 괴로우면서도 ‘고맙다’나 ‘미안해’가 아니라 ‘야, 넌 왜 그러냐’는 식으로 괜히 화를 내고 툴툴대기만 해요. 그렇게 마음이 엇나가고 마음에 없는 말로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는… 아, 아니다. 열은 사담에게 말로 상처를 주지 않네요. 사담만 상처를 많이 주죠. 아, 사담 엄청 못됐어요.(웃음) 정 떼려는 모진 대사를 할 때 섭이 눈을 보면 눈빛이 흔들흔들하는데, 미안해서 죽는 줄 알았어요.(웃음)”
아무리 봐도 닮았다기보다는 오히려 상반된 인상의 두 사람이 <김종욱 찾기>, <빨래>, <오! 당신이 잠든 사이에>, <극적인 하룻밤>까지 네 편의 작품에서 같은 역을 맡았으니 예사 인연은 아니다. 그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같은 작품을 거쳐 오면서도 한 무대에 마주 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니 그것 또한 신기한 일이다. “섭이랑은 옛날부터 봐왔지만 친해질 기회는 없었어요. 이번에야 호흡을 맞추게 됐는데 제가 뭔가를 주면 굉장히 좋은 걸 돌려줘요. 그래서 일단 주고받는 게 잘되니까 지금 공연에 대한 기대가 커요.” 형이자 파트너인 김재범의 칭찬에 성두섭은 애교 있게 웃으면서 “나돈데”라고 응수한다. 목숨도 기꺼이 내놓는 열과 사담의 절대적인 유대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관계를 표현할 수 있을 만큼의 신뢰와 케미스트리는 확실히 보여준다. 좋은 징조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04호 2012년 5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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