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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Culture in Musical] <스칼렛 핌퍼넬> 속 영웅 [No.118]

글 |송준호 2013-08-01 4,911

스칼렛 핌퍼넬과 이중생활 영웅들

 

그의 이름은 ‘퍼시 블레이크니’다. 귀족이며 엄청난 부자인 그는 두 개의 신분을 가지고 있다. 대외적인 것이 퍼시 경이라면, 아무도 모르는 정체는 프랑스 혁명기의 공포 정권에 처형당할 위기에 처한 귀족들을 구해내는 ‘스칼렛 핌퍼넬’이다. 비록 복면은 쓰지 않지만, 감쪽같은 변장으로 이중적인 삶을 산다는 스칼렛 핌퍼넬의 영웅상은 훗날 미국으로 건너가 조로, 배트맨,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등의 슈퍼 히어로들에게 이어졌다. 압제에 시달리는 민중을 돕는 정체불명의 영웅, ‘영웅 모드’와 다소 거리가 있는 평소 모습, 사악하고 야비한 악당들, 적의 추격과 위기 탈출까지 현재의 히어로물에 등장하는 특징들이 이미 스칼렛 핌퍼넬에서 그 씨앗을 틔우고 있었다.

 

 

 

 

 

 

두 개의 신분, 두 개의 정체성
‘스칼렛 핌퍼넬’은 프랑스 공포 정권에 맞선 비밀 결사대의 리더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로베스피에르는 스칼렛 핌퍼넬을 잡기 위해 쇼블랑을 영국에 보낸다. 그는 허술한 영국 귀족 퍼시 블레이크니의 아내인 마르그리트를 협박해 스칼렛 핌퍼넬의 정체를 알아내려 한다. 의아하게도 극 속 인물들은 눈치를 못 채지만, 그 정체를 파악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

 

이런 설정에서 ‘조로’가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국내에서는 조로의 인지도가 압도적으로 높아 스칼렛 핌퍼넬이 이를 따라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조로가 처음 등장하는 존스턴 매컬리의 소설은 1919년에 나왔고, 스칼렛 핌퍼넬은 1905년 바로네스 오르치의 소설에서 출현했다.

 

두 캐릭터는 평소에는 무능하고 유약한 한량 귀족이지만 위급 시에는 사지에 뛰어들어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구하는 양면적인 삶을 산다는 점에서 닮았다. 기존의 전통적인 영웅인 로빈 후드가 변장을 하거나 신분을 위장하지 않고 일관된 정체성으로 의적 활동을 했다면, 스칼렛 핌퍼넬과 조로는 실제 모습과 전혀 다른 영웅의 두 가지 정체성으로 새로운 캐릭터를 출현시켰다.

 

다른 점은 스칼렛 핌퍼넬이 상황에 적합한 변장으로 적의 허를 찌른다면, 조로는 검은 복면에 망토를 두른 유니폼을 입은 영웅의 이미지를 확립했다는 것이다. 물론 스칼렛 핌퍼넬의 경우도 자신만의 정체성을 알리는 상징은 있다. 편지를 봉인할 때 쓰는 ‘스칼렛 핌퍼넬(빨강 별꽃)’ 도장이 각인된 반지다. 매컬리는 스칼렛 핌퍼넬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영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특징을 만듦으로써 이후 등장할 ‘유니폼 히어로’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중 신분 영웅의 탄생은 그로부터 20세기 슈퍼 히어로들의 수많은 철학적 고민들이 파생됐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가령 정의나 윤리, 범죄와 처벌, 개인의 권리와 사회적 책임, 운명과 삶의 의미. 우정과 사랑, 용기, 가족의 의미 등 사소한 것부터 거대담론까지 다양한 주제가 포함된다.

 

 

 

 

 

정체성의 문제를 통해 성장하는 영웅들
스칼렛 핌퍼넬의 변장이나 조로의 복면이 지닌 1차적 목적은 역시 신분 위장이다. 영웅의 활동을 위해서는 실제 정체에 대한 비밀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스파이더맨으로 활약하는 피터 파커는 생계유지를 위해 자신의 두 번째 신분을 팔아먹는 ‘푸어 히어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신분이 노출될 경우 가족이나 연인 등 주변 사람들이 위험에 처할 가능성 때문에 복면으로 신분을 감춘다. 영화 <스파이더맨2>에서 피터 파커는 악당과 싸우던 중 시민들을 구하는 과정에서 그만 복면이 벗겨지고 말지만, 시민들은 자신을 구해준 영웅의 정체를 발설하지 않는다. 그만큼 치명적인 약점을 노출하면서까지 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그의 행동에 감화해서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정체성은 종종 영웅들을 고민에 빠트리는 동기가 된다. 스칼렛 핌퍼넬이 그냥 퍼시 블레이크니이던 시절, 그는 자신의 친구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스칼렛 핌퍼넬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아내 마르그리트는 프랑스 혁명 정부에 협조하며 스칼렛 핌퍼넬을 체포하는 데 조력해야 하는 처지다. 퍼시는 영웅과 남편의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에 빠진다.

 

크립톤 행성의 외계인인 칼 엘은 자신이 원해서 슈퍼맨이 된 것이 아니다. 지구행(行)부터 초능력까지, 그의 의지가 들어간 선택은 아무것도 없었다. 남다른 능력은 오히려 왕따를 초래하고 지구인이 되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일 뿐이다. 그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수많은 고민의 과정을 거친 후에야 클라크 켄트로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을 가진 브루스 웨인은 거대 기업을 운영하면서 틈틈이 범죄 소탕 활동을 한다. 그가 보여주는 사교계 명사이자 호색가의 모습은 배트맨 활동을 위해 위장된 페르소나다. 마치 ‘알바’ 식으로 가끔 출동해 활약하는 초기의 배트맨은 확실히 제2의 신분이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범죄 척결을 위해 모든 것을 걸게 되면서 ‘배트맨’이 첫 번째 정체성으로 거듭난다. 결국 영웅들은 두 정체성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혼란의 과도기를 거쳐 영웅으로서도, 한 인간으로서도 한 단계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영웅이 되기 위한 조건
슈퍼 히어로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는데 하나는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초능력을 가진 이들이다. 슈퍼맨을 비롯해 스파이더맨, 원더우먼, 헐크 등 일반적인 히어로들이 그렇다. 또 하나는 초능력은 없지만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각종 장비를 동원하거나 신체적 능력을 키워 역량을 발휘하는 이들이다. 이 경우는 배트맨과 아이언맨이 대표적이다.

 

계보를 따지면 스칼렛 핌퍼넬은 후자 쪽에 가깝다. 당시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면 부유한 귀족이라는 그의 신분이 일종의 초능력에 가까운 토대가 됐다. 결국 돈과 시간이 충분한 귀족이나 부자가 영웅 활동을 하기에도 용이한 셈이다. 스칼렛 핌퍼넬의 계보가 초능력 히어로들로 연결되지 않고 조로-배트맨-아이언맨으로 자주 언급되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

 

동시에 스칼렛 핌퍼넬은 다른 시각에서 보면 범법자 또는 반영웅의 시초이기도 하다. 영국 귀족이 프랑스 땅에서 사형수들을 구해내 영국으로 탈출시키는 행위는 엄연한 범죄 행위다. 물론 주인공 캐릭터가 공권력을 조롱하며 휴머니즘에 입각한 의적 행위를 펼치는 것은 그 자체로 신나는 활극처럼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률에 근거하지 않고 자신의 판단으로 악당을 단죄하거나 때로 먼저 공격에 나서 처벌하는 히어로들의 행위는 법적, 윤리적으로 문제의 소지가 있다. 실제로 이 문제는 ‘배트맨’ 시리즈나 ‘왓치맨’ 등에서 제동이 걸려 ‘슈퍼 히어로 수정주의’라는 또 하나의 담론으로 이어졌다.

 

히어로물의 꾸준한 인기 요인은 이 같은 인간과 사회의 고민 요소들이 개성 있는 캐릭터와 에피소드 안에 적절히 녹아 있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 현대적인 고민의 흔적이 20세기 초에 등장한 스칼렛 핌퍼넬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8호 2013년 7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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