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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Memory] 평양 무대에 서서 양준모 [NO.100]

글 |양준모 사진 |양준모 정리|배경희 2012-01-25 4,831

 

 

 

2004년, 음악원 재학 시절. “연극원 교수가 괜찮은 놈 좀 추천해 달래서 너를 추천했으니 오디션 한번 봐.” 교수님께선 대뜸 내게 공연 오디션을 보라고 하셨다. 그리고 며칠 후 그 연극원 교수님이란 분과 스태프 몇 분이 직접 음악원으로 찾아오셨다. “자신 있는 노래로 한 곡 불러 볼래요?” 음악감독님의 주문에 내가 부른 노래는 한국 가곡. 노래를 부르고 나자 대본이라는 걸 주면서 한번 읽어보라고 하셨는데, 난 아직까지 그게 어떤 대본인지 모르겠다. 다만 사투리 발음으로 그 글을 읽어 내려갔던 기억만 난다. 

 

그렇게 난 <금강>이라는 어마어마한 팀에 합류하게 됐다(<금강>은 故 신동엽의 서사시 ‘금강’을 바탕으로 만든 민족 가극으로 장민호, 양희경, 강신일 등 쟁쟁한 배우들이 참여했다). 내 역할은 명학 역을 맡은 이정열 선배의 언더스터디였다. 정열 선배가 연습실에 못 나올 때는 내가 대신 연습에 참여했는데, 그때마다 다른 배우들에게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른다. 아니, 연습실에 같이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죄스러운 기분이었다. 지금도 많이 부족하지만 그때의 난 징그러울 만큼 못했다. 연기의 ‘연’도 모르는 나에게 김석만 연출님은(나에게 배우라는 타이틀을 붙여주신 그 연극원 교수님이 바로 김석만 연출님이다) 연기의 ‘연’부터 차근히 가르쳐주셨다. 지금 생각해봐도 난 참 운이 좋았다.


하지만 그해 남북 관계가 악화되면서 공연은 무산됐다. 그리고 이듬해 우리의 최종 목표였던 평양에서의 공연이 결정됐다. 다소 갑작스럽게 잡힌 일정이라 다른 공연에 참여하게 된 정열 선배를 대신해 내가 명학 역으로 평양에 가게 됐다. 그곳에서 얼어붙은 북한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경험하고 나는 인생의 행로를 180도 바꿨다.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뮤지컬 오디션 사이트를 뒤졌다. 당시 준비 중이던 미국행 유학을 포기하고 말이다. 뮤지컬이 뭔지도 몰랐던 나는 공지 사항 제일 윗줄에 있는 작품부터 지원을 시작했다. 나의 첫 오디션은 <갓스펠>! 격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에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오디션을 보러 가서 가스펠 노래를 벨칸토 창법으로 불렀다. 춤도 양복을 입고 췄다. 결과는 당연히 탈락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튀어도 너무 튀었던 거지. 그때 김문정 음악감독님의 눈에 들어서 그 덕분에 <명성황후> 오디션을 볼 수 있는 기회도 얻게 되고, 감독님은 뮤지컬을 시작하던 당시 내게 정말 많은 힘이 되어 주셨다.


지금도 그때 고마웠던 사람들과 그때의 추억을 이야기하곤 하는데, 그것은 나를 겸손하게 만드는 좋은 보약이나 다름없다. 벌거벗은 처음의 나를 아는 이분들에게는 어떤 싫은 소리를 들어도 기분이 좋다. 왜냐하면 나를 있게 해주신 분들이기 때문이다.  

 

 

 

(좌) 이때가 24살 때니까 거의 9년 전 사진이다. 왠지 지금이 더 젊어 보인다. 그럼 한 5년 후엔 내가 (조)정석이보다 더 어려보일까? (우)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내가 (오)만석이 형보다 나이가 많은 역할이었다. 지금도 형과 그때의 얘기를 하면서 미소를 짓는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99호 2012년 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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