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걸 다 가졌지만 사랑에는 서툰 남자 한기주, 생존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여자 강태영. 두 사람의 꿈같은 사랑 이야기가 무대 위에서 펼쳐진다. <파리의 연인>의 주인공으로 발탁된 배우는 정상윤과 방진의이다. 두 사람은 올봄 관객들의 마음을 핑크빛으로 물들일 수 있을까?
젖어드는 물안개처럼, 정상윤
2009년은 정상윤에게 어떤 기점이 될 만한 중요한 해였다. 적어도 우리가 보기엔 그랬다. 데뷔 이래 드라마성이 짙은 소극장 뮤지컬에 주로 출연해 왔던 그가, 대형 뮤지컬의 대명사 <오페라의 유령>의 라울로 발탁되면서 배우 정상윤의 1막 2장이 시작될 것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는 예상외의 행보를 보였다. “<오페라의 유령>이 크고 유명한 작품이긴 하죠. 그런데 사실 <오페라의 유령>도 그냥 한 편의 공연인 거잖아요. 어떤 작품을 한다고 해서 제가 달라지는 건 아니에요.” 이 말이 허공 속으로 흩어지는 괜한 말이 아니라는 건, 화려한 무대에서 내려 온 뒤 그가 차기작으로 선택한 작품들만 봐도 알 수 있다. 글로벌 프로젝트 <천국의 눈물>과 워크숍 공연 <풍월주>, 정통 로맨스 <파리의 연인>과 스릴러 <블랙 메리포핀스>. 그는 대극장과 소극장, 또 여러 장르를 오가며 부지런히 무대에 선다. “‘나? 팬텀 했던 배우야’가 아니라 ‘나는 라울을 했어. 그런데 <쓰릴 미>에서는 동성애자를 했다. 그리고 이번엔 <파리의 연인>에서 한기주를 해’ 전 이런 게 좋아요. 다양한 작품에서 여러 캐릭터로 관객과 만나는 게 행복한 거죠. 앞으로도 쭉 이랬으면 좋겠고요.”
그의 최근작에서 배우로서 정상윤이 지향하는 바를 감지할 수 있는데, 모두 초연 창작뮤지컬이라는 것이다. 연기하는 배우에 따라서 캐릭터가 달라진다고 해도, 캐릭터를 창조하는 역할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어떤 작품이든 기본 틀이라는 게 있기 마련이잖아요. 창작뮤지컬, 게다가 초연 창작뮤지컬은 밑바닥부터 차근히 쌓아갈 수 있으니 그만큼 더 의의가 있어요. 힘든 만큼 보람찬 일이죠.” 작품에 대한 고민들이 하나씩 풀려나간다는 느낌이 들 때 가장 큰 즐거움을 느낀다는 정상윤. 그가 지금 실타래를 풀어내고 있는 인물은 여자들의 로망 한기주다. 그는 무대 위의 한기주를 탄생시키기 위해 어떤 고민을 했을까? “진부하고 빤한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신선하게 다가갈 수 있을지 고민했어요. 정작 공연을 볼 때는 몰랐는데 보고 나서 ‘아, 이런 것도 로맨스지’ 라는 생각이 들었으면 좋겠는 거죠.”
정상윤이 보여줄 ‘한기주’가 기대되는 이유는, 그는 한 남자가 변해가는 과정을 점층적으로 보여 주기에 적합한, 디테일한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배우이기 때문이다. “쇼적인 작품보다는 연극적인 작품”을 좋아하고 “미지근한 물에 뜨거운 물을 부었을 때 천천히 퍼져나가는 열기 같은 느낌의 연기”를 지향하는 이 배우는 어떤 로맨티스트를 보여줄까? “제가 생각한 기주는 냉철하고 무뚝뚝한 사람이 아니라, 완벽하면서도 허점이 있는 인간적인 사람이에요. 다재다능하고 자유분방했던 사람이 정해진 길을 가면서 자기 방어벽을 쌓게 됐는데, 자신이 경험하지 못했던 인생의 다른 면을 보여주는 강태영을 만나 그 방어벽을 하나씩 허물어뜨리게 되는 거죠. 기주가 새로운 사람으로 변하는 게 아니라, 예전의 순수했던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인 거예요.” 어찌됐든 한기주는 여성들의 로망에 가까운 인물이다. 여성 관객들은 한기주의 어떤 점에 반한다고 생각할까? “여자들은 기주의 외적인 모습 때문이 아니라 자기 일에 열심이고 이성적인 모습에 섹시하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렇게 이성적으로 보이는 사람이 벽을 깨뜨리고 감성적인 면을 보여주려는 모습 때문에 더 좋아하는 게 아닐까요?”
정상윤은 자연인 정상윤의 성격이 연기에 묻어나는 배우다. 최근 치른 결혼이라는 개인 경험이 그의 연기에도 영향을 미칠까?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 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좀 더 넓게 세상을 볼 만큼 연기가 더 깊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어요. 그렇게 되려면 노력을 해야겠죠. 자만심에 빠져 고민을 멈추는 것, 배우가 경계해야 하는 첫 번째 일이니까. 연기는 어차피 죽기 전까지 제가 해야 할 일이니까 앞으로 더 많이 경험하고, 끊임없이 다양한 무대에 설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다양한 인물을 연기할 수 있는 어떤 점이 그를 즐겁게 하는 걸까? “작품을 하다 보면 나와는 성향이 전혀 다른 인물을 만날 때도 있잖아요. 그럴 때의 설렘이 있다고 할까. 어떤 인물을 관찰하고, 연구하면서 알아가는 과정이 재미있어요. 다양한 사람들의 여러 인생을 두 시간으로 압축해서 관객들이 보러 와 주고 같이 공감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낄 때, 그게 제일 좋아요.”
건강한 자기애의 발현, 방진의
“그냥,하자고 그러셔서… 하하! 제의를 받으면, 어우, 저는 그냥 감사하죠. 하하!” <파리의 연인>에 어떻게 참여하게 됐느냐는 질문에 대한 방진의의 ‘솔직한’ 대답이다. “어? <파리의 연인>이 뮤지컬로? 나와는 상관없는 남의 작품 이야기를 하듯 말하곤 했는데, 저하고 이렇게 인연이 될 줄이야”라며 그녀는 천진한 소녀처럼 명랑하게 웃었다. 지금의 방진의를 묘사하는 데 ‘명랑하다’보다 더 적절한 수식어는 또 없을 것이다. 흐린 구석 없이 밝은 그녀의 얼굴 위로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훌훌 털고 일어나 “아자, 아자, 파이팅!”을 외치는 강태영의 얼굴이 포개진다.
솔직하고, 진실 되며, 독립적으로 삶을 헤쳐 나갈 줄 아는 여자, 강태영. 드라마 속의 강태영처럼 무대 위의 방진의는 언제나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세상의 편견과 맞서 싸우는 <헤어스프레이>의 트레이시나 꿈을 향해 내달리는 <브로드웨이 42번가>의 페기 소여였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가차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마이 스케어리 걸>의 이미나일 때조차도 그녀는 사랑스러웠다. 잠깐, 여기서 말하는 ‘사랑스럽다’는 인형 같은 사랑스러움이 아니다. 국적도, 생김새도 각기 다른 이 인물들이 한없이 사랑스러워 보였던 이유는 콤플렉스가 없고, 자존감을 가졌으며, 결정적으로 사랑과 삶을 쟁취할 줄 알았다는 데 있으니까. 물론 이는 방진의라는 사람의 자아가 투영된 결과다. 따라서 텍스트로 존재하는 강태영이라는 캐릭터에게 숨을 불어 넣어줄 적임자로 방진의를 떠올리는 건, 당연한 일처럼 느껴진다. 그녀는 분명 캐스팅 1순위로 지목된 배우였을 것이다.
방진의 스스로는 어떻게 느낄까? 그녀도 자신과 강태영이 닮았다고 생각할까?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려는 점이 비슷한 것 같아요. 전 요즘 강태영이라는 인물이 주는 에너지가 너무 좋아요. 강태영은 몸도 마음도 정말 건강한 사람이잖아요. 저도 그렇게 보이나요? 하하.” 그녀는 강태영이 사람들의 마음을 당길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부연했다. “강태영을 보면 꼭 나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 것 같아요. 어떤 상황에서도 씩씩하게 헤쳐 나가는 그녀에게서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겹쳐지는 거죠. 나도 저런 경험이 있는데! 이런 식으로. 아, 혹시 저만 그렇게 치열하게 산 건 아니겠죠? 하하.” 새로운 배역을 맡게 됐을 때 이 인물은 어떤 캐릭터라고 단정 짓는 것보다 상황에 충실하면서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방진의. 그녀는 강태영이라는 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머리를 쥐어뜯는 고뇌의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전 국민적 사랑을 받았던 캐릭터를 연기해야 하는 부담감은 없었을까? “솔직히 드라마를 뮤지컬로 만든다는 점에서 걱정을 하긴 했어요. 원작이 워낙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고, 방대한 분량을 어떻게 압축할까 하는 걱정이 좀 있었죠. 하지만 스태프들에 대한 신뢰가 있었어요. 창작뮤지컬은 한마음으로 협력해서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나가는 거니 누구와 함께하느냐가 중요하거든요.” 그러고 나서 그녀는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감추지 않고 이렇게 덧붙였다. “당시에 드라마에 푹 빠져 살 만큼 재미있게 봤거든요. 그런데 뮤지컬은 원작과는 다른 시선으로 작품을 풀었기 때문에 또 다른 느낌의 <파리의 연인>이 나올 것 같아요. 부디 작품이 <파리의 연인>이라는 제목에 국한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문득 떠오르는 궁금증 한 가지. 평소 닭살 돋는 행동, 노! 낯간지러운 말, 노! 로맨틱과는 거리가 멀다는 그녀가 계속해서 정통 로맨스물의 주인공을 맡게 되는 이유는 뭘까? “그러게 왜 그렇게 되는 걸까요? 전 쑥스러움도 많이 타고, 특히 낯 뜨거운 건 진짜 못 참거든요.” 잠깐의 고민 끝에 방진의 스스로 내린 결론은 이거였다. “제가 상상을 잘하는 것 같아요. 현실에서 사랑을 못하니까, 상상해서 그런 연기가 막 나오나 봐요. 그런데 극과 극인 두 사람이 만나서 편견을 깨가면서 사랑을 이뤄 나가는 모습, 정말 아름답지 않나요? 부러워.” 그녀가 현실에서 그 꿈을 이루게 될지, 그건 하늘의 뜻에 달렸겠지만, 우리는 화창한 봄날 무대 위에서 완벽하게 사랑에 빠진 그녀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극장을 나오는 길에는 이렇게 외치게 되지 않을까? 나도 저런 꿈같은 사랑을 해보고 싶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03호 2012년 4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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