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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리히터> 이정윤 연출·최나혜, 얼어붙은 심장이 녹는 순간

글 |이솔희 사진 |국립정동극장 2024-10-15 190

 

연극 <리히터>는 머지않은 미래를 배경으로, 남극에서 실종된 전 아내 혜인을 찾기 위해 남극으로 떠나는 성진의 이야기다. 남극에 도착한 성진은 ‘기억의 물질화’ 현상을 유발하는 미확인 운석 ‘리히터’(Re-Heater)를 발견하고, ‘리히터‘의 영향으로 인해 혜인의 환상을 본다. 그러면서 잊고 있었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고, 지나간 사랑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남극이라는 특수한 배경, ’기억의 물질화‘라는 판타지적인 소재를 통해 사랑의 본질적인 의미에 대한 메시지를 전해 관객에게 울림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2019년 SF연극제에서 초연된 후, 국립정동극장 ‘창작ing’ 시리즈를 통해 약 5년 만에 다시 관객을 만나게 됐다. 이번 시즌을 이끄는 이정윤 연출가와 <리히터>를 통해 배우로서 첫발을 떼는 혜인 역의 최나혜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오랜만에 재공연되는 만큼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많은 신경을 썼을 텐데, 공연을 준비하며 어떤 고민을 했나요. 

이정윤 연출 미래를 배경으로, 남극과 서울, 현실과 실제를 교차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보니, 처음 대본을 읽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어렵다’는 거였어요. (웃음) 하지만 이 작품의 중심이 되는 건 결국 성진과 혜인의 사랑이라는 점이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이들의 사랑이 어떻게 변화해서, 어떻게 마무리되는지에 초점을 맞춰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시공간을 오가는 이야기라서, 무대 위에서 극 중 공간을 어떻게 분리해야 할까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았어요. 성진의 집, 남극의 벙커 등을 한 무대에서 보여줘야 했죠. 그래서 공간을 크게 반으로 나누고, 한쪽은 서울로, 한쪽은 남극으로 설정했어요. 벽면을 여닫으면서 공간의 안과 밖을 구분하고자 했고요. 또 하나 중점을 둔 것은 ‘기억의 물질화’라는 키워드였는데, ‘리히터’의 영향으로 잊고 있던 기억을 눈앞에서 확인하게 된 인물들의 상황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무대를 전체적으로 눈이 쌓여있는 모습으로 꾸미고, 쌓여있는 눈 아래에 기억 속 물건들을 배치해 놨어요. 

 

초연 당시 없었던 캐릭터인 로봇 에디가 이번 시즌에 새롭게 추가되었죠? 이 캐릭터가 어떤 역할을 하길 바랐나요?

이정윤 연출 혜인과 성진의 사랑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둘의 사랑을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봐주는 인물이 등장하길 바랐어요. 그래서 작가님과 상의해서 로봇인 에디를 탄생시켰죠. 비록 로봇이지만 인간의 사랑을 온전히 이해해 주는 캐릭터로 그리고 싶었어요. 

 

 

최나혜 배우는 이번 <리히터>가 데뷔작이에요. 공연을 준비하면서 긴장감과 설렘이 정말 컸을 텐데, 첫 공연을 올린 뒤 기분이 어땠나요?

최나혜 가장 먼저, 무대에 섰다는 사실 자체가 행복했어요. 그토록 꿈꾸던 공간에 서게 된 거니까요. 다음으로는 ’이제 시작이다‘라고 생각했어요. 약 20일 동안 원 캐스트로 17회 공연하는데, 이걸 무사히 마쳐야만 ’데뷔 성공’인 거죠.(웃음) 

 

오디션을 통해서 발탁된 거죠? 오디션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됐어요?

최나혜 사실 오디션 보기 전까지 회사에 다니고 있었어요. F&B 브랜드를 운영하는 회사였는데, 3년 동안 열심히 일해서 무려 팀장 자리까지 올라갔어요. (웃음) 그런데 무대에 대한 마음이 사라지질 않더라고요. 그러다가 <리히터> 오디션 소식을 들었어요. 작품의 메시지처럼, 새로 시작하고 싶은, 다시 불타오르고 싶은 배우와 함께할 거라는 오디션의 취지가 제 마음에 와닿았어요. 그 길로 퇴사 선언을 했죠. 대표님이 연봉도 올려주겠다고 했는데! (웃음) 그렇게 오디션에 지원해서 3차 오디션까지 본 뒤에 합격했어요. 

 

회사를 뛰쳐나와 오디션에 지원했다니, 정말 쉽지 않은 도전이었겠네요. 그럼 처음 배우를 꿈꾼 건 언제인가요?

최나혜 고등학생 때부터 뮤지컬을 좋아했는데, 그땐 제가 뮤지컬 무대에 선다는 걸 상상도 못해서 대학은 실용음악과로 진학했어요. 그런데 대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뮤지컬이 포기가 안 되더라고요. 마음만 품고 있다가, 어느 날 <위키드>를 보고 본격적으로 뮤지컬 배우를 꿈꾸게 됐어요. 무대 위의 배우들이 너무 행복해 보였거든요. 그래서 대학 입시를 다시 준비해서 서울예대에 들어갔고, 남들보다 조금 늦은 만큼 빨리 성장하기 위해 대학 입학 후에 여러모로 많이 노력했어요. 

 

대학 재입학부터 회사 퇴사·오디션까지…도전의 연속이었는데,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나요?

최나혜 ’더 이상 미룰 수는 없다.‘ 이번에 오디션에 지원하면서는 이 생각만 가득했어요. 저는 1992년생인데, 신인 배우로서 활동을 시작하기에 이른 시기는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도전하는 것에 두려운 마음이 들기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누군가가 알아봐 줄 거라는 믿음이 더 컸어요.

 

 

연습실에서 함께 호흡을 맞춰본 최나혜 배우는 어땠나요?

이정윤 연출 회사를 다니다가 왔다는 사실을 저희도 연습 중간에야 알았어요. 연습실에서 샐러드만 먹길래 ’왜 샐러드만 먹느냐‘고 물었더니 사실은 자기가 다니던 회사에서 샐러드 브랜드까지 론칭하고 왔다는 거예요! (웃음) 그런데 사실 저도 작년에 잠시 광고대행사에서 일을 했었거든요. 그래서 다른 일을 해보고 무대로 다시 돌아오는 이 마음을 너무나 잘 알아요. 그런 사람들에게는 간절함을 넘어선 무언가가 있죠.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의 행복감을 그 누구보다 크게 느끼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나혜 배우는 굉장히 단단해요.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보였어요. 첫 공연을 마친 뒤에 소감을 물어보니까 자신이 느낀 떨림이나 긴장감에 대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 가장 먼저 함께 공연한 사람들에게 고마웠다고 말하더라고요. 굉장히 단단한 태도라고 느꼈어요.  

 

최나혜 함께 무대에 서는 조상웅, 박세훈, 문지수 선배와 달리 저는 경험치와 실력이 부족하잖아요. 그런데 연습 기간에도, 공연 중에도 언제나 저를 많이 기다려 주시고, 배려해 주셨어요. 연출님도 애정이 담긴 조언을 정말 많이 해주셨고요. 특히 음악감독님께 정말 감사해요. 혜인의 넘버가 어려워서 연습하면서 애를 먹었는데, 음악감독님이 많은 도움을 주신 덕분에 해낼 수 있었어요. 이렇게 제가 받은 도움들을 생각하다 보니, 공연이 끝나고 감사한 마음이 가장 먼저 들 수밖에 없었어요.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이야기 속에서 인물이 지닌 고뇌를 섬세하게 표현하기 어렵다 보니, 관객의 호감을 사기에 쉽지 않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혜인이라는 캐릭터를 잘 표현하기 위해 인물의 어떤 지점을 고민했나요?

최나혜 표면적으로는 혜인이가 성진과 자신의 아이를 두고 남극으로 떠나는 인물로 그려지잖아요. 하지만 그 속에는 혜인이의 수많은 고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성진과 혜인은 서로를 정말 많이 사랑했지만 현실적인 문제들로 인해서 점차 무뎌졌을 거고, 변해버린 성진의 모습을 보는 게 혜인에게는 큰 상처였을 거예요.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일도, 사랑도, 가족도 못 지켰다는 생각을 하게 된 혜인이는 ’그럼 난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는 거지?‘라는 의문을 스스로에게 품고, 성진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자신이 떠나야겠다고 결심하게 되는 거죠. 단순하게 표현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앞에서 말한 혜인이의 생각들을 최대한 잘 그려내고, 혜인이가 느끼는 여러 감정과 아픔을 보여주는 넘버인 ‘안개’를 잘 전달하는 게 저의 숙제예요.

 

 

성진이 ‘환상을 지우면 현실이 된다’는 말을 하는데, 공연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공연이라는 환상은 곧 현실이잖아요. 이 대사가 두 분에게는 어떤 의미로 가닿았나요?

최나혜 배우에게는 연기가, 작가에게는 글쓰기가, 작곡가에게는 작곡이 현실이죠. 연출가님을 비롯해서 여러 스태프분들이 한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해 다방면에서 노력하시는 것도 현실이고요. 이 수많은 현실이 모여서 결국에는 관객에게 환상을 선물한다는 것이 이 일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성진이는 ‘환상을 지워가면서 어른이 되고, 현실이 된다’고 말했지만, 그와 반대로 저희는 현실을 차곡차곡 쌓아서 환상을 만든다는 점이 참 멋지지 않나요?

 

이정윤 연출 예술을 업으로 삼는다는 건 파도를 타는 것과 같아요. 힘들 때도 있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나씩 해내면서 느끼는 찰나의 쾌감이 정말 크거든요. 저는 이 쾌감을 특히 연습실에서 가장 많이 느껴요. 함께하는 사람들과 서로의 기준에 부합하는 결과물들을 하나씩 만들어 내는 과정이 정말 즐거워요. 저는 표현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들이 예술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작품을 통해 표현하면서 내 하루를 채워가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게 정말 큰 행운 같아요. 

 

극 중 ’리히터’(Re-Heater)는 얼었던 마음을 녹이는, 심장을 다시 뛰게 해주는 존재잖아요. 두 사람의 인생의 ‘리히터’는 무엇인가요?

이정윤 연출 예상 가능한 대답일 것 같지만, 뮤지컬 그 자체예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가 뮤지컬을 자주 보여주셨어요. 중학생 시절 본 <캣츠>가 제 인생 첫 뮤지컬이었는데, 그때 무대와 객석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고양이들을 보며 ‘저 고양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아니라 ‘이런 공연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공연을 보고 나와서 ‘뮤지컬을 만드는 직업’이 뭐냐고 어머니께 여쭤봤던 기억이 나요. 

 

몇 년이 지난 후, 약속이 있어서 잠실에 갔는데 갑자기 누가 다가오더니 <라이온 킹> 공연 티켓이 남는다고, 시간 되면 공연 보러 오라고 티켓을 주는 거예요. 어리둥절한 상태로 샤롯데씨어터로 갔고, 무려 2열 중앙에서 공연을 봤어요. <라이온 킹>의 연출, 퍼펫 디자인 등을 맡은 줄리 테이머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제 우상이에요. 이렇게 운명처럼 인생을 바꿀 작품을 만났다니 신기한 일이죠. 뮤지컬을 꿈꾼 후로 이처럼 작고 우연한 기회들이 많이 찾아왔어요. <리히터>를 만나게 된 것도 그렇고요. 뮤지컬이 앞으로도 제게 좋은 일들을 더 많이 가져다줄 거라고 믿어요.

 

최나혜 <리히터>라는 작품 자체가 저의 ‘리히터’예요. 제게 날개를 달아준 작품이니까요. 사실 이 작품 오디션에 지원하면서도 떨어질 확률이 훨씬 높다는 걸 스스로도 알았어요. 그걸 알면서도 도전한 거죠. 이번에 도전하지 않으면 눈 감는 날까지 후회할 것 같아서요. 오디션 합격 통보를 받았을 때, ’그래,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고 연기하길 잘했다’ 싶어서 눈물이 났어요. <리히터>는 배우로서의 저를 뜨겁게 만들어 준 첫 작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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