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연 뮤지컬 평론가가 매월 주목할 만한 뮤지컬계 이슈를 심도 있게 들여다봅니다.
세 달에 걸쳐 연재된 최승연 평론가의 [창작뮤지컬에서 '뮤지컬'로] 칼럼은 일본, 중국에 이어 영미권 시장에서의 한국 뮤지컬의 활약에 주목하며 마무리됩니다.
영미권: 현지화를 위한 모색
2022-2023년 브로드웨이의 총매출은 약 2조 1천295억 원이었다. 같은 기간 한국 연극(630억 원)과 뮤지컬(4,590억 원)을 합한 총매출 5,220억 원보다 4배 정도 높은 수치다. 웨스트엔드는 대체로 이보다 다소 낮지만 한국 시장의 3배 정도로 유지되고 있다. 2021-2022년 웨스트엔드는 1조 4천억 원을 기록했다. 영미 시장의 시스템은 한국과 매우 다르기 때문에 이러한 격차가 의미하는 바를 단순 비교식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격차가 그동안 한국 뮤지컬 업계를 도전적으로 이끌어왔다고 말할 수는 있다.
사진=예술경영지원센터
예술경영지원센터의 K-뮤지컬 시장 활성화 기반구축사업
이에 대한 좋은 예가 예술경영지원센터(이하 예경)의 K-뮤지컬 시장 활성화 기반구축사업이다. 예경은 2016년부터 창작뮤지컬의 해외 진출 기반을 마련하고 유통을 활성화하기 위해 ‘K-뮤지컬로드쇼’라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2020년부터는 인력 교류와 뮤지컬 공동 제작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K-뮤지컬 피칭’ 행사도 추가했다. 당시 이 두 가지 사업은 모두 ‘중국 진출’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창작뮤지컬이 더욱 활성화됨에 따라 ‘영미권 진출’이라는 비전이 추가되어, 사업이 세분화됨과 동시에 범위 역시 확장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2021년 ‘K-뮤지컬국제마켓’이 런칭되며 더욱 두드러졌다. 국제 마켓에 참여한 한국 프로덕션 팀들이 영미권을 포함한 해외 인사들과 함께 쇼케이스 및 네트워킹까지 ‘직접’ 경험할 수 있게 되었으며, 2022년 신설된 ‘K-뮤지컬로드쇼 in 영미권’. ‘영미권 중기(2개년) 개발 지원’ 사업을 통해 창작뮤지컬의 영미권 공연 가능성을 직접 타진할 수 있는 기회를 공식적으로 갖게 된 것이다. 아래 표는 2022년부터 2024년 올해까지 두 사업을 통해 선정된 공연들을 정리한 것이다.
위의 표를 통해 다음의 사항을 읽을 수 있다. 첫째, 본 사업은 스테디셀러로서 혹은 재연까지 성공하여 국내에 잘 알려져 있는 작품과 비교적 신생작 혹은 현지에서 개발되고 있는 작품까지 총 12편을 포괄하고 있다. 영미권 진출 가능성은 전체 프로젝트를 감당할 수 있는 프로덕션의 역량과, 한국적 정서와 보편적 가치가 잘 부합되어 있는 작품 내부적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는 판단이다. 둘째, 단발성과 중기 프로젝트의 수혜를 모두 받아 현지화 작업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작품들이 눈에 띈다. <크레이지 브레드>, <인사이드 윌리엄>, <라흐헤스트>가 대상작으로서, 모두 김한솔 작가의 작품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셋째, 본 사업을 토대로 하여 공연까지 완료한 작품들도 있다. 영국에 진출한 <마리 퀴리>와 <유앤잇>이다. 두 작품을 제작한 라이브(주)와 EG뮤지컬컴퍼니는 사업이 종료된 이후 현지 공연이라는 최종 목표까지 완수했으며, 현재 <유앤잇>의 경우 웨스트엔드 공연을 위한 프로세스를 진행 중이다.
번역과 각색 그리고 협업의 중요성
이렇듯 지원사업을 통해 영미권 진출에 더 많은 가능성이 열리고 있으나, 양적 증가 이전에 고려되어야 할 중요한 사항이 있다. 바로 현지화 작업이다. 특히 영미권은 동아시아와 달리 문화 코드와 공연 관습이 현저히 달라 감성과 취향의 장벽이 문제시될 수밖에 없다. 현재 브로드웨이에서 흥행 중인 오디컴퍼니의 < The Great Gatsby >(<위대한 개츠비>)와 10월 16일 브로드웨이 공연을 앞두고 있는 <어쩌면 해피엔딩(Maybe Happy Ending)>도 철저한 현지화 작업에 공을 들였다.
< The Great Gatsby >는 올해 5~8월 보스턴 A.R.T.에서 트라이아웃으로 공연되었던 레이첼 차브킨의 < Gatsby: An American Myth >(이하 < Gatsby >)와 비교하면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 Gatsby >는 인물의 성정체성을 아예 바꾸는 방식으로 젠더와 인종의 측면에서 다양성을 추구하고 개츠비의 ‘아메리칸 드림’이 열정과 자기파괴의 두 측면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이 방향은 < The Great Gatsby >와 완전히 다른 정서를 만든다. < Gatsby >가 ‘깨어진 꿈’을 초점화하여 전체적으로 어둡고 냉소적으로 연출되었다면, < The Great Gatsby >는 개츠비와 데이지의 사랑에 주목하여 1920년대를 매우 낭만적으로 묘사한다. 특히 오묘한 형광 초록색으로 시각화된 갯츠비의 ‘그린 라이트’는 공연이 말하는 ‘아메리칸 드림’을 상징한다. 이러한 각색은 < The Great Gatsby >의 목표가 명확하게 낭만적 정서와 압도적인 ‘쇼’의 스케일에 놓여 있음을 보여주는데, 이는 미국의 일반 관객들이 편하게 수용할 수 있는 수위를 찾은 것으로 결과적으로 현재의 흥행을 이끈 성공적인 전략이었음을 증명한다. 한편 <어쩌면 해피엔딩>의 윌 애런슨&박천휴 콤비(이하 윌&휴)는 2016년 한국 초연과 동시에 영어 대본과 가사를 완성함으로써 브로드웨이 공연 프로세스를 시작했다. 박천휴 작가에 의하면, 이들은 당시 뉴욕 리딩 공연을 2차례 완수하며 미국 관객들에게 넘버와 가사가 자연스럽게 전달되고 서울과 제주도라는 지역적 배경이 무리 없이 수용되고 있음을 느꼈으나, 동시에 삭제되고 추가되어야 할 요소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이후 이들은 대사와 가사로 간단히 처리한 장면들, 가령 클레어와 전 주인과의 사건, 올리버와 제임스 가족 사이의 관계를 펼쳐놓아 관객의 더 명확한 이해를 도모했다. 또한 리딩 공연 전후로 과도하게 정서적이라고 판단했던 발라드 넘버 2개를 과감하게 삭제하여 미국 관객의 정서에 편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조율했다.
뮤지컬 < The Great Gatsby > 공연 장면. (c) Matthew Murphy and Evan Zimmerman
이러한 두 공연의 명확한 콘셉트는 참여 인력들의 ‘협업’에 근거한다. 오디컴퍼니의 <데스노트>를 포함한 다수의 한국 대극장 뮤지컬의 편곡 작업을 완수했던 작곡자 제이슨 하울랜드를 포함하여, 그간 신춘수 대표가 미국 활동을 통해 쌓은 관계들이 < The Great Gatsby > 의 협업 안에 잘 녹아 있을 것이라 보인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윌&휴가 한국어와 영어 ‘이중언어자’들이기 때문에 두 언어를 매개하는 번역 작업이 생략되어 있다는 것, 다시 말해 그들이 ‘직접’ 텍스트 작업을 하고 리드 프로듀서인 제프리 리처드의 매니징으로 전체가 방향을 공유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같은 맥락에서 2024년 8월 에든버러 공연 당시 큰 폭으로 현지화 작업을 완료했던 <유앤잇>의 이응규 대표는 영국 공연이 결정된 이후부터 현지에 머물며 프로덕션의 모든 과정을 함께 했는데, 이 과정을 통해 양자 간의 충분한 이해 안에서 현지화 작업을 완결지을 수 있었다. 한국 버전 <유앤잇>이 따뜻하고 서정적이었던 반면 영국 버전은 미나가 복제된 로봇이었음을 공연 말미에 극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서스펜스가 강화된 어두운 버전으로 변화되었다.
하지만 현지화를 이끄는 ‘번역과 각색 작업’은 근본적으로 매우 지난한 일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과 현지 스태프들 간의 협업이 수월하지 않게 풀릴 가능성은 언제든 존재하며, 이를 통해 크레딧 정리와 양자 간 위계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가령, 현재 현지화 작업 중인 <말리의 어제보다 특별한 오늘> 프로덕션은 말리가 혼자 여행을 떠남으로써 스스로 주체화의 가능성을 찾는다는 원래의 결말 대신, 말리가 영국 사회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밝고 쾌활한 결말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현지 창작진들의 관점을 두고 논의가 한창 진행 중이다. 관련한 또 다른 문제는 스캔션(scansion) 작업이다. 원래 영시의 운율을 다루는 방법을 의미하는 스캔션은 뮤지컬 넘버의 가사 작업에도 적용된다. 멜로디의 진행에 맞춰 영어 단어의 강세 및 고조를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것을 뜻하는 스캔션은 가사는 근본적으로 시적이어야 하며 멜로디와 정교하게 통합됨으로써 ‘잘 들리도록’ 해야 한다는 목적을 향한다. 매우 전문적인 영역인 만큼 정교한 정리가 필요하다.
구성되는 개념, K-뮤지컬
사실 ‘K-뮤지컬’은 명확한 실체를 가진 용어는 아니다. 이는 ‘K-pop’의 ‘K’에서 파생된 용어로서 이때 ‘K’는 글로벌한 소구력을 가진 한국의 대중문화 현상을 가리킨다. K-뮤지컬이라는 용어는 2011년 언론에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했으나 K콘텐츠의 전체 담론장에서는 오랫동안 소외된 영역이었다. 한편으로 여타 콘텐츠의 K현상과 균형을 이루고 싶은 업계의 바람을 담은 용어였으며, 다른 한편으로 도전적인 미래를 향한 응전을 담은 용어이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K-뮤지컬은 특히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분명한 ‘현상’으로 존재하며 미래의 작업 결과물에 따라 전체 지형도와 정체성은 계속 새롭게 구성될 것이다. 창작뮤지컬에서 ‘뮤지컬’로 존재할 때까지 K-뮤지컬의 도전은 지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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