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경종수정실록>은 조선시대 18세기 초, 숙종과 장희빈에 대한 트라우마를 안고 왕위를 지키고 있는 조선의 20대 임금 경종, 흔들리는 왕권의 혼란을 틈타 왕위를 위협하는 연잉군, 모든 일을 기록하는 사관 홍수찬 세 사람의 이야기다.
정준 작가, 조한나 작곡가의 작품으로, 2019년 초연, 2021년 재연됐다. 첼로와 피아노, 기타로 구성된 3인조 라이브 밴드의 연주와 인물 간의 갈등, 대립이 돋보이는 대본으로 호평받았다. 지난 8월 개막한 세 번째 시즌을 이끄는 성종완 연출가의 연출 노트를 함께 펼쳐 보자.
1. 홍수찬의 서가
뮤지컬 <경종수정실록>의 무대는 홍수찬의 서가를 기본으로 옥좌가 겹쳐 있는 모습입니다. 경종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가상의 사관을 극 중 해설자로 두어 겉으로 드러난 역사적 사실들과 그 이면의 이야기들을 추적해 나가는 극적 구성입니다.
'M9. 대리청정'은 이를 가장 극대화한 장면으로, 사건과 관련된 수많은 인물들의 말과 행적이 홍수찬의 사초에 기록되는 형식으로 표현됩니다. 'M11. 나만 아는 이야기'와 'M13. 왕손의 운명'에서 삼급수와 관련된 진실이 밝혀질 때도 홍수찬의 기록이 활용됩니다.
이렇듯 관객들은 홍수찬의 서가에 앉아 그가 묵묵히 기록한 사초들을 들여다보며, 경종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과 이면의 진실들을 생생히 목격하게 됩니다.
2. 연잉군과 옥좌
무대 중앙에 놓인 옥좌는 작품 속 모든 갈등의 원인이 됩니다.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두 왕손의 번민도, 노론과 소론의 첨예한 다툼도 결국 옥좌를 둘러싼 갈등에 기인합니다. 현재 옥좌의 주인은 경종이지만 그 자리를 끊임없이 위협하는 자는, 다름 아닌 그의 동생 연잉군입니다.
연잉군은 왕세제가 되어 첫 문안을 드리는 순간부터, 옥좌에 대하여 경종과 상반된 시선과 신념을 드러냅니다. 이는 'M2. 왕이라는 자리'에서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M3. 어쩌면 내게'에서는 옥좌를 향한 자신의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냅니다. 'M8. 무엇을 위해'의 논쟁 역시 옥좌를 지키는 방법에 대한 두 사람의 타협점 없는 생각의 차이가 두드러집니다.
이렇듯 둘 중 하나가 죽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갈등 속에서 경종은 연잉군을 향해 칼을 겨눌 수밖에 없고, ('M9. 대리청정', 'M12. 절대군주', 'M13. 왕손의 운명') 연잉군은 깊은 번민 끝에 역모를 결심하기에 이릅니다. ('M10. 나 역시도', 'M14. 하얀 무지개')
3. 경종의 꿈
사실 경종은 조선의 왕 중 가장 덜 알려진 왕입니다. 그의 아버지 숙종, 어머니 희빈 장씨, 동생 영조(연잉군)에 비하면 거의 무명에 가까운 왕이지요. 재위 기간도 매우 짧았고, 눈에 띄는 업적도 남기지 못한 채 젊은 나이에 병사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늘 불안한 왕권 속에서, 자신이 사초에 어떻게 기록될지, 또 후세에 어떤 왕으로 전해질지 민감했고, 꿈에서조차 심리적 압박에 시달렸습니다.
실제로 경종은 재위 기간 내내 기면증을 앓았고, 때때로 꿈과 현실을 혼동했습니다. 이는 그가 강력한 왕권을 가질 수 없는 치명적인 흠결로 작용하여, 반대 세력인 노론으로부터 연잉군의 국사 참정을 요구받는 빌미가 됩니다.
작가는 경종이 꿈속으로 빠져드는 주요한 순간들을 총 4개의 넘버로 표현하였고, 이는 그의 심리상태가 반영된 핵심적인 장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M1. 악몽'에서 경종은 옥좌를 버거워하고 신음하면서, 정체불명의 자객으로부터 습격을 받습니다. 그러는 동안 홍수찬은 그 주변을 돌며 묵묵히 사초만을 기록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악몽은 더욱 구체화되어, 'M4. 무엇을 할 것이냐'에서 그는 선왕 숙종으로부터 동생 연잉군과 비교당하며, 왕으로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 질책 받습니다. 반대로 'M15. 세자 세자'에서는 어머니 희빈 장씨로부터 왕이 되어도 그 옥좌를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것에 대해 질책 받습니다.
이렇듯 경종은 ‘꿈’으로 인해 내내 고통받고 조롱받으며, 끝내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여기까지가 겉으로 드러난 역사입니다.
4. 수정실록
꿈은 모두가 알다시피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잠자는 동안에 일어나는 심리적 현상.
(2) 실현시키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
새로 쓰인 <수정실록>에 의하면 경종은 죽기 전 마지막 꿈(1)을 꿉니다. 다행히 그 꿈은 악몽이 아닙니다. 어릴 적 스승이자 친구였던 홍수찬이 찾아와 진정한 성군이 되어줄 것을 당부합니다. 이는 두 사람이 어린 시절에 함께 꾼 꿈(2)입니다. ('M16. 왕이 되소서')
경종은 연잉군이 가져온 (독이 든) 부자인삼차 앞에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며 연잉군에게 성군이 되어줄 것을 당부합니다. ('M17. 나를 꿈꾸게 하라') 이후 경종의 뜻은 다음 왕 연잉군(영조)에게로 이어지고, 영조 대에 이르러 양전 사업 등 경종이 품었던 꿈들이 이뤄집니다. 당대에는 조롱받았던 경종의 꿈이, 영조 대에 이르러 꽃을 피우게 됩니다.
이는 뮤지컬 <경종수정실록>의 가장 중요한 테마입니다. 꿈과 현실을 구분 짓지 못했던 라만차의 기사 돈키호테처럼, 구약성서의 요셉처럼 경종 역시 ‘꿈을 꾸는 사람’ 내지 ‘꿈속에 사는 사람’이라 불릴 만합니다.
이는 그가 앓았던 기면증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가 간절히 바랐던 이상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 두 가지 모두로 인해 고통받고 조롱을 받았지만, 이름 대신 뜻을 남겼고 끝내 그 꿈은 이루어져 꽃을 피웠습니다. 이것이 새로 쓰인 <경종수정실록>이 후대의 사람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이자 격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