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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젠틀맨스 가이드> 정문성, 나에게 손 내미는 법

글 |이솔희 사진 |자이언엔터테인먼트, 쇼노트 2024-08-29 1,286

 

정문성이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 무대로 돌아왔다.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는 1900년대 초반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가난한 청년 몬티 나바로가 어느 날 자신이 다이스퀴스 가문의 여덟 번째 후계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몬티 나바로는 가문의 백작 자리에 오르기 위해 자신보다 서열이 높은 후계자들을 한 명씩 제거해 나가는데, 이 과정에서 다이스퀴스 역 배우가 1인 9역으로 몬티 나바로에 의해 제거되는 여러 후계자를 연기한다. 지난 2021년 세 번째 시즌에 이어 다시 한번 다이스퀴스 역을 맡은 정문성은 특유의 능청스러운 연기력과 탁월한 순발력을 무대 위에서 한껏 발휘하며 관객을 자연스럽게 작품 속으로 이끌고 있다.

 

어떤 상황에서든 무대 위 상대 배우를, 객석의 관객을 여유롭게 포용해 온 정문성은 이제 그 포용의 범위를 자기 자신에게로 넓히기 시작했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그리하여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 스스로에게 손을 내미는 법을 익히고 있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젠틀맨스 가이드>와는 두 번째 만남이에요. 다시 만난 소감이 어떤가요?

사실 2018년 초연 때 제작사인 쇼노트에서 몬티 나바로 역을 제안해 주셨는데, 다른 스케줄과 겹쳐서 출연하지 못했어요. 그러다가 세 번째 시즌에 다이스퀴스 역을 제안받아 작품과 연을 맺게 되었고요. <젠틀맨스 가이드>라는 작품 자체의 매력도 크지만, 저는 지난 시즌의 아쉬움을 채우고 싶다는 마음이 커서 이번 시즌에도 출연을 결심하게 됐어요. 물론 어떤 작품이든 늘 열심히 준비하지만 아무래도 처음 참여하는 작품은 완전히 정리가 되지 않은, 조금은 거친 상태로 연기하게 되는 경우가 있어서 아쉬움이 남을 때가 많거든요. 이번 시즌에 다시 참여하면서 조금 더 다듬어지고 여유가 생긴 다이스퀴스를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다이스퀴스 역 배우들은 1인 9역을 소화해야 해요. 숨 돌릴 틈 없이 캐릭터 체인지를 해야 하는데, 여유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어떤 부분에 신경을 썼나요.

우선 ‘옷 갈아입고 나온 아까 걔’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어요. 아홉 개의 역할을 한 사람이 연기하는 거긴 하지만 관객분들 입장에서는 전혀 다른 인물로 느껴지길 바랐죠. 그래서 아홉 개의 역할을 다 다르게 소화해 보자고 다짐했고, 각 인물을 구분해서 표현하고자 노력하고 있어요.

 

사실 다이스퀴스 역이 연기하는 입장에서는 그렇게까지 고난도의 캐릭터는 아니에요. 아홉 개의 캐릭터를 오가야 해서 체력적으로 조금 힘들긴 하고, 정신도 항상 똑바로 차려야 하긴 하지만…. (웃음) 여러 인물을 연기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는 역할인 만큼 무대 뒤에서 많은 분이 도와주세요. 가장 큰 난관이 퀵체인지인데, 다행히도 백스테이지에서 많은 스태프분들이 의상, 가발 퀵체인지를 도와주셔서 공연 중에 큰 어려움은 없어요.

 

 

문성 씨는 <젠틀맨스 가이드>뿐만 아니라 <헤드윅> <사의찬미> <빨래> 등 출연했던 작품에 다시 출연하는 경우가 많았잖아요. 이 역시 앞서 말한 ‘아쉬움을 보완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기인한 걸까요?

<빨래>에 여러 시즌 출연하면서 느꼈어요. 한 작품에 여러 번 출연하는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게 정말 많다는 걸요. 어떤 작품에 출연하고, 다음 시즌에 다시 도전하고, 아쉬웠던 부분들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고, 나를 또 한 번 돌아보고. 그러면서 배우로서 단단해지는 경험을 여러 번 했어요. 그래서 그런지 어떤 작품에서든 저 스스로 아쉬웠던 부분은 다음 시즌에서라도 꼭 해결하고 넘어가고 싶더라고요.

 

<빨래>가 알려준 것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가르침은 무엇인가요?

아마 제가 솔롱고 역할을 처음 맡게 되었을 때였던 것 같은데, 공연하다가 갑자기 나영 역의 배우가 신경 쓰이더라고요. 저를 계속 쳐다보고 있어서요. 처음에는 그냥 ‘왜 나를 계속 쳐다보지?’라고 생각하면서 연기했는데, 문득 ‘아, 나영은 나를 계속 보고 있는데 나는 나영을 안 보고 있었구나’ 싶었어요. 그때부터 저도 나영에게 더 집중했고, 그제야 진짜 상대방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런 경험을 하고 나서 ‘그래, 무대 위에서는 단순히 대사를 늘어놓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대화를 해야지, 상대방의 눈을 보면서 말을 해야지’라는 깨달음을 얻었어요.

 

또 한 번은, 비 오는 장면이었어요. 암전 중에 비 내리는 소리가 들리다가 제가 대사를 뱉으면 조명이 들어오면서 시작되는 장면이었죠. 대사 칠 타이밍을 보면서 집중하고 있는데 뭔가가 제 어깨에 툭툭 떨어지는 거예요. ‘뭐지?’ 하면서 정신을 번쩍 차렸는데, 분명히 암전 중이라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눈앞에 공연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졌어요. 어깨에 빗방울이 떨어지고, 길이 펼쳐지고, 슈퍼가 보였죠.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그 순간의 벅찬 마음을 품은 채로 공연을 마쳤어요. 그날 알았어요. 이 작품, 대본 안에서 내가 어디에 있어야 하고, 어떤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요. 제 상상력의 범주를 넓혀준 날이었어요.

 

 

<빨래>를 통해 매번 새로운 가르침을 얻던 2~3년 차 배우에서 이제는 여러 장르에서 러브콜을 받는 18년 차 배우가 되었네요. 배우로서의 성장을 얼마나 체감하고 있나요.

저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만의 때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건 배우 생활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힘들어하는 제 모습을 보고 저의 친한 친구가 제게 해준 말이기도 해요. 그때 그 친구가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때가 있고, 그 시기는 각자 다 다르다. 하지만 분명히 온다’고 말해주더라고요. 그 말을 믿었어요. 그런데 막상 이렇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제게 ‘그 때’가 왔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웃음) 그래서 저는 그냥 그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현재에 충실하려고 해요. 언젠간 올 거라고 생각하면서요. 저는 그저 제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고, 여러 장르에서 여러 역할을 연기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고 행복해요.

 

그럼 배우로서 살아온 시간 동안 인간 정문성은 얼마나 성장했다고 생각해요?

이제 삶을 조금 더 잘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얻은 것 같아요. 2022년쯤 건강이 안 좋았던 기간이 있어요. 병원에 가봤더니 내가 나 자신을 너무 혹독하게 대해서, 내가 나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 거라고 하더라고요. <사의찬미> 공연을 앞둔 때였는데, 몸이 안 좋다는 사실을 알게 돼서 원래 정해진 회차보다 훨씬 줄여서 무대에 섰던 기억이 나요. 제작사와 동료들이 먼저 배려를 해주셔서 가능한 일이었죠. 그 후에 잠시 쉬면서 많은 걸 깨달았어요. 뭐가 행복한 거고, 뭐가 중요한 건지.

 

좋은 사람이 되어야 좋은 연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저는 이미 저 자신에게 좋은 사람이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저 자신에게 조금 더 너그럽기 위해 노력해요. 스스로에게 관대해지는 건 여전히 쉽지 않지만 이제는 무조건 잘해야 한다고 채찍질하기보다는 제 마음과 먼저 대화를 나눠 보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 이렇게 인간 정문성이 조금씩 나아지면, 좋은 사람이 되어서 더 좋은 연기를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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