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간의 개발 과정을 거쳐 브로드웨이 초연을 앞둔 <어쩌면 해피엔딩>과 웨스트엔드 관객을 만나고 있는 <마리 퀴리>, 해외 시장에서 가능성을 입증하고 있는 <유앤잇>, 그리고 중국 시장을 중심으로 아시아권 국가 곳곳에서 공연 중인 각종 창작 뮤지컬까지! K-뮤지컬은 탄탄한 대본과 뛰어난 만듦새를 인정받아 빠른 속도로 세계를 향해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더뮤지컬이 6, 7월 두 달에 걸쳐 한국 뮤지컬의 해외 시장 진출 현황과 글로벌 뮤지컬 시장의 흐름을 들여다봅니다. 먼저 한국 창작 뮤지컬을 해외 시장에 선보인 제작자, 창작자의 이야기를 들어본 뒤, 최승연 평론가가 세계 시장 속 한국 뮤지컬의 활약을 다시 한번 짚어봅니다.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은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인간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헬퍼봇’ 올리버와 클레어가 만나 가장 인간적인 감정인 ‘사랑’을 느끼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로봇이라는 소재와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을 엮어 재즈와 클래식을 기반으로 한 서정적인 음악으로 풀어내어 관객을 사로잡았다. 2016년 국내 초연되어 올해로 다섯 번째 시즌을 맞으며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작품이다. 작품의 흥행은 해외에서도 이어졌다. 2020년 미국 애틀랜타에서 트라이아웃 공연을 선보였고, 같은 해 일본에서 라이선스 공연을 진행했다. 이후 중국에서도 라이선스 공연을 선보이며 글로컬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오는 10월에는 브로드웨이 정식 공연을 앞두고 있다. <어쩌면 해피엔딩>을 탄생시킨 창작 콤비 박천휴 작가, 윌 애런슨 작곡가를 만났다.
<어쩌면 해피엔딩>이 올해로 다섯 번째 시즌을 맞았다. 소감이 어떤가.
박천휴 이번 시즌에는 새롭게 합류하는 배우들이 많다. 새로운 캐스트가 합류하면 그 배우가 가지고 들어오는 각자의 에너지, 정서가 있다. 대본이나 연출적인 방향에서의 변화가 없더라도, 공연은 배우의 예술이다 보니 배우의 변화가 알게 모르게 작품에 영향을 끼친다. 그게 창작자에게도 많은 영감을 준다. 그런 미묘한 변화를 관객분들에게 보여드릴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렌다.
윌 애런슨 미국에서는 트리플 캐스팅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한국 공연계의 특이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편으로는 이 점이 흥미롭다. 배우별로 개성이 다르기 때문에 관객들이 같은 시즌 공연에서도 다양한 매력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천휴 한국 관객들은 어떤 공연이 마음에 들면 그때그때 다른 캐스트의 공연으로 재관람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게 한국 공연 문화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한 배역을 여러 배우가 맡게 되면 연습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을 때도 있지만, 이번 시즌 <어쩌면 해피엔딩> 같은 경우는 이미 공연이 완성되어 있고, 공연에 필요한 약속이 다 짜여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트리플 캐스팅의 어려움보다는 장점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2014년 개발을 시작해 2016년에 국내 초연을 올렸다. 미국에서는 2016년 뉴욕 리딩 공연, 2020년 애틀랜타 트라이아웃 공연을 거쳐 오는 10월 브로드웨이 벨라스코 시어터에서 초연을 올린다. 오랜 시간에 걸쳐 작품을 개발한 뒤 브로드웨이에서 정식 공연을 선보이게 된 소감이 궁금하다.
박천휴 <어쩌면 해피엔딩> 미국 공연이 약 8년에 걸쳐서 작업 되었는데, 사실 브로드웨이 기준으로 보면 그렇게 오랜 기간은 아니다. 한 작품을 개발하는 데에 들어가는 평균적인 기간이라고 볼 수 있다. 저희도 저희의 속도대로, 서두르지 않고 꼼꼼하게 공을 들였다. <어쩌면 해피엔딩>뿐만 아니라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는 작업이다. 저희는 어떤 영감이 떠오르면 그걸 바로 대본으로 써 내려간다기보다는 여러 아이디어를 모은 다음 소설처럼 이야기를 쭉 만들고, 그 이야기를 다시 뮤지컬화하는 작업을 거친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렇게 만든 작품을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감사하다. 사실 처음 저희끼리 <어쩌면 해피엔딩>이라는 작품을 썼을 때는 그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정서나 이미지를 무대 위에서 온전히 구현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브로드웨이 공연은 워낙 스케일이 크고, 여러 사람이 관여되어 있다 보니 이렇게 많은 분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면 창작자로서 맡은 바를 최선을 다해서 해내야겠다는 책임감이 든다. 좋은 기회를 얻은 만큼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공연을 선보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윌 애런슨 브로드웨이 공연이 성사되었을 때 믿을 수 없을 만큼 기뻤고, 놀라운 마음이 컸다. 최선을 다해 좋은 작품을 보여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브로드웨이 공연이 성사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나.
박천휴 처음 대본을 쓸 때부터 한국어 버전과 영어 버전을 동시에 작업했다. 2015년 한국에서 먼저 트라이아웃 공연을 했고, 2016년 뉴욕에서 리딩 공연을 진행했다. 이 리딩 공연은 우란문화재단의 지원 프로그램의 일환이었다. 당시 뉴욕 리딩 공연을 하고 바로 다음 날, 현재 <어쩌면 해피엔딩> 브로드웨이 프로듀서인 제프리 리차즈에게 연락이 왔다. ‘너희의 공연을 브로드웨이에서 올리고 싶다’고 하더라. 2017년 1월에 계약이 성사됐으니,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된 것이다. 그 후 2020년에 애틀랜타에서 트라이아웃 공연을 했다. 트라이아웃 공연에 대한 반응이 좋았던 덕분에 바로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하자는 얘기가 나왔는데, 코로나19로 인해 무기한 연기됐다. 그렇게 연기되는 기간에도 내부적으로 워크숍을 2회 정도 진행해서 조금 더 발전시키는 과정을 거쳤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한국을 배경으로 하지 않나. 브로드웨이 공연은 어느 정도 현지화했나.
박천휴 기본적인 설정은 같다. 근 미래의 한국을 배경으로 하고, 올리버의 옛 주인인 제임스 역시 한국인이다. 오디션을 볼 때도 제임스 역 배우는 무조건 동양인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인을 대표하는 캐릭터이니까. 올리버와 클레어는 로봇이다 보니 인종을 특정하지는 않았다.
윌 애런슨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한국에서는 올리버와 클레어가 제주도로 떠날 때 터널을 통해 간다는 설정이 있는데, 미국은 페리를 타고 간다는 설정으로 바뀌었다.
박천휴 무대가 한국에서 공연할 때보다 훨씬 커서, 무대를 조금 더 다양하게 사용하고 싶다는 현지 연출의 제안을 받아들여 페리를 타고 가는 걸로 바꾸었다. 올리버와 클레어가 차를 타고 목포까지 가서 페리를 갈아타는 설정이다. 그래서 배우들이 제주, 목포 발음을 저에게 자주 물어본다. (웃음) 또, 한국 공연에서는 제임스 역을 맡은 배우가 재즈 싱어 역할까지 소화하는데, 미국 공연에서는 그 두 배역을 분리했다.
윌 애런슨 그래서 음악적인 부분에도 조금 차이가 있다. 한국 공연에서만 들을 수 있는 넘버가 있고, 미국 공연에서만 들을 수 있는 곡이 3~4곡 정도 있다.
<어쩌면 해피엔딩>이 브로드웨이에 진출할 것이라고 예상했나.
박천휴 저는 제가 이렇게 뮤지컬을 오래 하게 될 줄도 몰랐다. <어쩌면 해피엔딩> 초연 때까지만 해도 직장인이었으니까, ‘회사에서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연봉을 높일 수 있을까’ 같은 생각만 했었다. (웃음) 솔직히 말하자면, 이야기의 규모가 크지 않은 대신 우리의 정서가 잘 표현된 작품이니, 이왕이면 오프 브로드웨이처럼 작은 극장에서 뉴욕의 관객에게 이 이야기를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다. 그게 내가 꿀 수 있는 가장 큰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뉴욕 리딩 공연 당시 제프리 리차즈에게 연락이 왔을 때도 브로드웨이보다는 오프 브로드웨이가 낫지 않겠냐고 말했다. 그랬더니 제프리 리차즈가 브로드웨이와 오프 브로드웨이를 나눠서 생각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일단은 최선의 버전으로 작품을 선보이는 게 훨씬 현명한 방법이라고 하더라. 그러면서 저희에게 약속했다. 우리의 작품이 지닌 정서나 이미지를 훼손하지 않겠다고. 그 약속을 정말로 지켰다.
<어쩌면 해피엔딩> 국내 초연 때까지만 해도 회사원이었다고 했는데, 안정적인 회사 생활을 하다가 뮤지컬 업계에 발을 들이게 된 계기가 있나.
박천휴 윌 때문이다. (웃음) 윌이 없었다면 혼자 일기장에 썼을 법한 가사들이 음악이 된 거고, 혼자만의 상상으로 그쳤을 이야기들이 대본이 됐다. 그래서 가끔 뮤지컬 작업을 하다가 힘들 때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윌에게 ‘네가 내 인생을 망쳤다’며 투정을 부린다. 그러면 윌도 ‘네가 아니었다면 나도 뉴욕에서 더 유명해졌을 것’이라고 농담을 던진다. (웃음)
윌은 한국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작업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나.
윌 애런슨 저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 와서 뮤지컬 작업을 하며 여러 훌륭한 경험을 하면서 ‘나 정말 운이 좋구나’라고 생각하게 됐다. 한국 뮤지컬 업계는 굉장히 폭발적으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저에게는 새로우면서 흥미로운 시장이다. 특히, 미국 관객은 나이대가 있는 편인데 한국의 관객은 젊은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마침 한국에서의 협업자도 제대로 찾았다. (웃음)
<번지점프를 하다>부터 <어쩌면 해피엔딩> <일 테노레>까지 꾸준히 창작 콤비로 활동하고 있다. 두 사람의 시너지는 어디서 시작되는 것인가.
박천휴 저희는 창작 파트너 이전에 친구다. 취향과 가치관이 비슷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 서로 예술적인 영향력을 주게 됐다. 음악, 영화, 소설 등을 같이 향유하고, 그에 대해 토론하면서 창작 파트너로서의 색깔이 형성된 것 같다.
윌 애런슨 저희가 영감을 나눌 때 공연 외적인 요소에서도 영향을 많이 받는다. 특히 박천휴 작가가 작사나 디자인 쪽에서도 전문가적인 경력을 쌓았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서도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다.
윌&휴 콤비의 창작 세계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박천휴 12월 개막을 앞둔 신작 <고스트 베이커리>를 포함해서, 저희의 작품은 모두 한국을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관객분들 입장에서는 묘하게 한국 문화와 서양 문화가 섞인 듯한 느낌을 받으실 것이다. 우선 한국 창작자와 미국 창작자가 함께 만드는 작품이기 때문이고, 특히 제가 뉴욕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느끼는 이방인의 정서와 윌과 함께 지내면서 느끼는 이중 문화적인 감성이 작품에 녹아 들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어딘가 조금은 이질감이 드는 정서가 저희의 유니크함이라고 생각한다. 여담이지만, 저희 작품이 한국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이 제게는 굉장히 중요하다. 브로드웨이에서 선보이게 된 작품이 한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뿌듯함이 더 크기도 하다.
윌 애런슨 저희가 여태까지 쓴 작품들은 대부분 따뜻하고 밝은 이야기다. ‘어두운 이야기를 써볼까’ 하고 작업을 시작해도, 결국에는 따뜻한 감성이 추가된 채로 마무리가 되더라. 사실 인생이라는 게 슬픔과 즐거움이 공존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어둡거나 슬픈 장르를 써보자고 다짐하고 작업을 시작하더라도 결과물을 보면 다양한 감정을 포함하고 있는 작품이 태어난다. 다만 저희는 항상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을 즐긴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가 이후에 만드는 작품은 완전히 다른 분위기일 수도 있을 것이다. 덧붙이자면, 저는 식상하지 않은, 색다른 이야기를 탄생시키는 것을 좋아한다. 친숙하지 않은 이야기 안에서 친숙한 것을 찾아내는 경험을 선물하고 싶다. 관객분들이 저희 공연을 보고 극장을 떠나실 때, 비록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이야기일지라도 그 안에서 현실과의 접점을 발견해 가셨으면 좋겠다.
박천휴 사실 공연을 보는 것 자체가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돌아보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공연장에 앉아 다른 인물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삶이란 게 저런 거지’,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할 거리를 얻어가는 게 공연의 즐거움인 것이다. 그래서 관객분들이 저희의 공연을 보시고 ‘결국에는 이것도 나의 이야기구나’ 느끼게 만드는 것이 저희의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