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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POTLIGHT] <두 도시 이야기> 이건명 [NO.129]

글 |나윤정 사진 |심주호 2014-06-18 5,382
행복은 바람을 타고

그 어느 때보다 열정적인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는 이건명. <프랑켄슈타인>의 빅터로 냉철한 변신을 꾀하더니 이제는 <두 도시 이야기>의 시드니 칼튼이란다. 새삼 이건명의 ‘제2의 전성기’가 시작됐음을 실감한다. 무대에서 박수받을 때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이건명. 오늘의 그는 얼마나 행복할까? 



밝은 에너지의 원천                 

제2의 전성기! 실감하세요?  
어휴! 자꾸 그렇게 말씀해주시는데, 쑥스러워요. 다만, 무대에 설 때가 제일 좋은데 그 기회들이 더 다양해진 것 같아 기분은 좋죠. 김법래, 류정한, 유준상 등 최근 저랑 작업한 배우들을 보면 대부분 40대잖아요. 우리 세대는 어릴 때만 해도 40대가 되면 뮤지컬 배우로서 생명이 다한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거든요. 그런데 자기 관리만 잘하면 얼마든지 활동할 수 있다는 걸 많은 배우들이 몸소 보여주고 있어서 기분이 좋아요. 서로 이런 농담도 해요. 마흔 넘는 배우들끼리 모임을 만들자! 우리끼리 똘똘 뭉쳐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웃음)

오늘따라 더 밝은 기운이 가득해요. 최근에 특별한 변화라도 생겼나요?  
인생의 가장 큰 변화인 결혼을 했죠. 예전엔 결혼하면 사람이 안정적으로 변한다는 말을 안 믿었어요. 전 충분히 안정됐다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결혼 후에 찾아오는 안정감은 또 다른 차원이더라고요. 총각 때 느꼈던 안정은 새 발의 피였구나! 아무래도 사람의 기운이라는 게 베이스가 탄탄할수록 더 좋아지는 거잖아요. 지금 편안하기 때문에 기운 자체도 그런 게 아닐까요?

<프랑켄슈타인> 얘기를 빼놓을 수 없네요. 터닝 포인트가 됐을 법한데.  
제가 운명론자에요. 근데 운명이란 게 참 재밌어요. <프랑켄슈타인>을 하게 된 계기도 따져보면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가요. 2008년에 박정자 선생님의 부탁으로 <19 그리고 80>에 참여했거든요. 막이 내리고 이 팀이 함께 제주도 여행을 갔는데, 거기 (서)지영 누나의 남편인 왕용범 연출이 합류를 했어요. 전 3박 4일 동안 운전을 맡게 돼서, 그렇게 좋아하는 술도 못 마셨어요. 그래서 마지막 날, 보상의 의미로 한라산을 넘으며 와인 반병을 마셨죠.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니콜라스 케이지처럼! 그 모습이 왕용범 연출한테 꽤 인상적이었나 봐요. 와인 반병이 맺어준 인연으로 왕용범 연출이 <잭 더 리퍼>에 저를 캐스팅했고, 이 작품으로 제작사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한국뮤지컬대상 남우조연상을 탔어요. 이후에도  계속 작품을 함께하며 신뢰를 쌓았고, 지금 <프랑켄슈타인>까지 오게 된 거죠. 물론 이 작품으로 제 인생이 조금 터닝 됐겠지만, 그게 또 어느 방향으로 갈진 모르겠어요. 그래서 기대만 하고 있어요. 다음에는 또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프랑켄슈타인> 보면서 궁금했어요. 저 엄청난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부모님께 제일 감사하죠. 건강하게 낳아주셨으니까. 사실 에너지 나오는 곳이 정말 많아요. 일단 저희 아버지 목소리가 예술이에요. 또 어머니는 책 읽는 걸 참 좋아하시고, 수필가로도 등단하셨어요. 이런 부모님들의 드라마틱한 감성을 선물 받은 거죠. 물론 아침밥을 챙겨주는 와이프에게서도 에너지를 받고 있고. 스스로도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술도 끊고 평소보다 운동도 많이 했어요. <프랑켄슈타인>은 컨디션이 정말 좋지 않으면 작품의 퀄리티를 유지할 수 없거든요. 첫날 공연 보시고 어머니가 개소주를 보내주시더라고요. 우리 아들 큰일 났다고. (웃음)

공연 동안 그렇게 많이 울었다던데, 아쉬워서 빅터를 어떻게 보냈죠?
많이 아쉽죠. 근데 괜찮아요. 배우 생활 19년 동안 너무 많은 이별을 해봐서 조금 무뎌졌어요. 첫사랑과 헤어질 때의 슬픔이 두 번째, 세 번째 이별할 때와는 또 다르잖아요. 이제 잘 보내는 방법도 알고, 그 빈자리를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도 잘 알아요. 그래도 울기는 이 작품이 일등이었어요. 이 얘기는 꼭 써주세요. 우리 아역들이 정말 연기를 잘했어요. 그들을 보고 있으면 제 감성이 굉장히 충만해졌죠. 그들 덕분에 빅터란 캐릭터가 더 살 수 있었어요. 

다시 빅터를 만난다면, 그땐 먼저 무슨 말을 하고 싶어요?
만약에 진짜 다시 대본을 받아든다면… 한숨부터 나오겠죠. 또 시작이구나!  “그래, 다시 한 번 잘해보자” 하지만 겁은 좀 날 거 같아요. 또 제 눈물샘은 고장이 날 테고.   

<렌트>에선 마크에서 로저, <미스 사이공>에선 존에서 크리스, 한 작품에서 새로운 변신을 보여줬잖아요. 언젠가 괴물 역을 기대해봐도 될까요?
벗기 싫어요. (웃음) 예전에 <아이다>, <맘마미아!>, <미스 사이공>에서 많이 벗어봤는데, 이런 배역은 준비 과정부터 굉장한 고통이 수반돼요.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먹죠. 집에 가는 길에 치맥도 포기해야 되고, 두부 한 모로 끼니를 때우고. 그런 거 다신 하기 싫어요. (웃음) 무엇보다 아직은 빅터에 대한 애정이 커서, 굳이 괴물로 변할 생각은 없어요. 빅터란 친구가 정말 좋거든요. 



€또 하나의 운명적 만남€€€€€€€€€€€ 

작품 선택의 첫 기준이 행복이라고 하던데, <두 도시 이야기>에선 어떤 행복을 발견했어요?
사실 지난해에도 하고 싶었는데 스케줄이 안 맞았어요. 그때 이 작품에 친한 배우들이 많이 참여했거든요. 재밌는 작업이 될 것 같았는데, 너무 아쉬웠죠. 그런데 이번에 다시 제의가 들어온 거예요. 그것만으로도 행복했어요. 잃어버렸던 지갑을 다시 찾은 것 같은 기분이랄까? 손에서 놓아버린 걸 다시 쥘 수 있었던 행복이 49프로, 그리고 나머지 51프로는 팀원들이었죠. 다들 워낙 친해서 서로의 작업 스타일도 잘 아니까, 함께하면 행복할 거 같더라고요. 무조건 오케이!

그런데 시드니 칼튼, 그의 눈물도 만만치 않을 거 같은데요?
요즘 세월호 때문에 매일 슬픔에 젖어 있거든요. 눈물샘이 고장 나서 조금만 툭 쳐도 눈물이 흘러요. 너무 슬픔에 젖어 있기 싫어서 부산으로 떠났는데, 또 거기서 바다를 보니 아이들 생각이 나고. 그러다 첫 리딩을 하는데, 미치겠더라고요. 한 아이의 죽음이 도화선이 되어 혁명을 시작하는 프랑스 시민들을 보니, 300여 명 아이들의 죽음으로 촛불을 들고 슬픔에 빠져 있는 대한민국 시민들이 떠오르고. 죽은 아이의 아버지가 움직이려고 할 때 그를 붙잡는 드파르지의 한마디, “가만히 있어.” 또 가만히 있으라니! 이 모든 것들이 운명적으로 지금 제게 정말 시기적절해요. 그런 만큼 작품을 더 잘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시드니 칼튼은 참 순수한 사람 같아요.
정말 순수 그 자체죠.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잖아요. 다치기 싫어서 스스로를 방어하는 거죠. 강한 척하지만 결코 강하지 않거든요. 순수하지 않은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수 있다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죠. ‘다음에 내가 당신을 행복하게 해드릴게요.’ 이 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는 그는 어마어마하게 순수한 사람인 거죠. 

만약 본인이었다면 시드니 칼튼과 같은 선택을 했을까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인데 그걸 못하겠어요? 하지만 막상 그 시점이 오면 엄청난 갈등을 하겠죠. 빅터도 그렇거든요. 사형을 앞둔 앙리에게 사실을 말하라고 회유하다가, “그러다 네가 사형을 당할 수 있어”라는 말에 아무 소리도 못하죠. 인간이니까. 

다른 방법을 찾을 수도 있었을 텐데.
상황이 너무 급박했어요. 찰스가 당장 그날 밤에 사형을 당하기 때문에 다른 아이디어를 내고 그걸 실행하기엔 너무 촉박했죠. 어쩔 수 없으니 그냥 최후의 방법을 쓴 거예요. 아… 며칠만 더 시간을 주지. (그랬다면 어떤 아이디어를 낼 거예요?) 저는 아이디어를 못 냈을 거고, 주변 참모들을 데리고 왔겠죠. 야, 생각 좀 해봐. (웃음)

괴물로 호흡을 맞췄던 한지상 씨랑 이번엔 같은 역으로 만났네요. 연습이 한결 재밌지 않나요?
일단 잘 아는 배우들과 같이 작업한다는 건 편안하다는 걸 의미해요. 처음 만나는 배우들이 많으면 자기소개 하고 서로 적응하는 기간이 일주일 정도 걸려요. 그런데 친한 배우들이 많으면 그 시간을 연습에 쏟을 수 있어요. 지상이랑 저는 빤히 다 아니까, 연습 첫날부터 “넌 어떻게 생각하니?”라고 물을 수 있거든요. 작품으로 향하는 지름길이 생긴 거죠. 

같은 역이지만, 느낌이 확연히 다를 거 같은데
정말 많이 다를 거예요. 지상이랑 저는 너무 다른 인간이거든요. 살아온 발자취부터 현재까지, 모든 게 달라요. 그게 아마 멀티 캐스팅의 묘미일 거예요. 또 왕용범 연출이 제일 잘하는 게 배우에게 맡기는 거예요. 그 사람의 색깔을 잘 뽑아낼 수 있게요. 빅터 세 명을 봐도 색깔이 정말 다르잖아요. 작품의 범주에만 있다면 모든 걸 허용해줘요. 그러니 이번에도 세 명의 칼튼이 굉장히 다른 캐릭터가 될 거에요. 백프로 확신합니다. 

모든 경험들이 연기에 도움이 된다는 말을 많이 했어요. 이번엔 어떤 경험들을 녹여낼 건가요?
배우의 재산은 경험이에요. 누구나 한 번쯤은 염세적으로 변할 때가 있잖아요. 저도 한때 그랬어요. 과연 이 사회에서 내 존재 가치는 뭘까? IMF가 터지고, 하루에 공연되는 작품이 2~3편밖에 안 되던 시기가 있었어요. 무대에 오를 수 있는 배우는 고작 100명 정도, 나머지는 다 백수였죠. 새벽에 공사판에 나가 힘겹게 막일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돈이 없으니 현실적인 고통이 밀려오고, 그러다보니 염세주의에 빠지게 되더라고요. 나는 예술에 대한 꿈을 품었던 사람인데, 이제 일당잡부에 지나지 않은 건가? 세상이 나를 버린 것만 같고. 성악을 가르쳐줬던 형님이 제 손에 우울증 약을 쥐어줄 정도였죠. 그땐 내가 그 약을 먹으면 정말 환자가 될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그래서 약을 버렸죠. 이렇게 피해망상에 걸릴 만큼 염세적이었던 시절, 그 경험을 끄집어내서 칼튼과 잘 버무리는 작업을 해보려고요. 



€운명이 이끄는 대로 행복하게€€€€€€€€€€€ 

지금 소년원 아이들을 돕기 위한 자선 콘서트 <후 앰 아이>의 MC도 맡고 있죠? 배우로서 좀 더 크고 넓은 가치를 지향하고 있는 것 같은데.  특별히 그런 건 아니고요. 결국 이 모든 게 내가 행복하기 위한 몸부림이에요. 처음 재능기부를 시작할 때만 해도 그 시간이 아까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막상 해보니 정말 행복하더라고요. 가수 션 씨랑 ‘만원의 기적’ 콘서트를 할 때 관객들이 공연 끝나고 힐링돼서 좋다는 말을 많이 해주셨어요. 근데 사실 가장 힐링 받은 건 저였거든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런 것들이구나!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후 앰 아이> 콘서트에서도 저는 아주 작은 것을 기부하고 있지만, 그보다 훨씬 더 큰 행복을 받고 있어요. 이럴 때 행복하다는 기억이 있으니까, 계속 그 행복을 찾아가는 거죠. 

그런 생각들 때문인지 늘 청춘처럼 보이는데, 남다른 비결이라도 있나요?
천성이랄까? 결혼 전부터도 집에서 그냥 안 쉬었어요. 일단 나무 많고 공기 좋은 시외로 나가요. 거기서 차를 세워 놓고 책 하나 꺼내 읽는 거죠. 집에 있으면 소파에 누워서 TV 볼 게 빤하거든요. 그래서 괜히 수목원 같은 데 가서 그냥 걸어요. 피톤치드도 나오니깐 기분도 좋아지고. (웃음) 몸도 쉬면서 맛있는 것도 먹고. 그래서 최근에 하남시로 이사도 했어요. 공기좋고 사람 없는 데로 가고 싶어서. 집 앞 나무에 새집이 하나 있는데, 새들이 아침마다 지저귀며 저를 깨워요. 

스스로를 구름, 강물이라고 정의하기도 했어요. 운명이 이끄는 데로 몸을 맡긴다고. 구름 따라 강물 따라 가고 싶은 곳이 있나요?
가고 싶은 곳을 정해놨다면 구름이나 강물이 아니었겠죠? (웃음) 생각해둔 방향은 전혀 없어요. 지금도 <두 도시 이야기>가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그 누구도 모르잖아요. 그냥 운명에 맡겨보고 싶어요. 그렇다고 나태하거나 헤이해지겠다는 건 절대 아니에요. 저는 52만 5천 6백 분의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 매순간 헛되이 보내진 않을 거예요. 

그럼 과거로 시간을 돌려 딱 한 번 운명을 바꿀 수 있다면,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어요?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그럼 지금 내가 다른 모습이되잖아요. 물론 힘든 시기도 분명히 있었죠. 근데 과거로 돌아가면 지금의 행복은 없어지는 거니까. 다행스럽게도 난 지금 정말 행복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9호 2014년 6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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