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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PECIAL⑤]<여기, 피화당> 김이후, 나의 첫 번째 관객에게

글 |이솔희 사진 |맹민화 2024-03-08 2,953

더뮤지컬 여성의 날 특집 기획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더뮤지컬이 공연계 ‘여성 서사 작품’의 현황을 다시금 들여다봅니다. 먼저, 여성 아티스트와 여성 서사 작품을 다루는 공연예술월간지 『여덟 갈피』를 발행한 장경진 공연 칼럼니스트가 여성 중심 서사 뮤지컬이 걸어온 길과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다음으로 <난설> <브론테> <여기, 피화당> 등 현재 공연 중인 뮤지컬 속 주목할 만한 여성 인물을 조명하고, 해당 작품의 배우와 창작진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뮤지컬 <여기, 피화당>은 병자호란 이후, 나라와 가족에게 버림받고 ‘피화당’이라 이름 지은 동굴 속에 숨어 사는 세 여성 가은비, 매화, 계화가 글을 통해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이야기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영웅 소설 ‘박씨전’에서 모티브를 얻은 작품이다. 김이후는 극을 이끌어 가는 인물인 피화당의 작가 가은비 역을 맡아 무대에 오르고 있다.

 

2022년 4월호 ‘뉴페이스’ 인터뷰를 통해 더뮤지컬과 만난 게 벌써 2년 전이더라고요. 지난 2년 동안 어떤 시간을 보냈어요?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게 보냈어요. 거의 매일 공연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죠.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2년 전보다 지금 더 이 일이 좋아졌다는 거예요. 2년 전에는 공연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면, 이제야 제 삶과 공연이 조금 친해진 느낌이 들거든요. 밸런스가 조금씩 맞춰지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때는 주목할 만한 신인 배우로서 인터뷰한 거였는데, 이제 제법 많은 후배가 생겼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딜 가든 제가 막내였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제가 제일 연장자인 순간이 생기는 거예요. 기분이 이상하더라고요. 특히 <메리셸리> 팀에는 2000년대생 친구들도 있어서, 함께 공연하는 친구들과 나이 차이가 꽤 많이 날 때가 있어요. 그럴 때면 괜히 ‘우리 오늘 파이팅 하자’고, 멋진 선배인 것처럼 행동하죠. 사실 아무도 저를 신경 안 쓰는데. (웃음) 동생들이랑 공연하는 날에는 괜스레 책임감이 생겨서 평소보다 더 긴장돼요.

 

제가 선배의 입장이 되고 보니, 든든한 선배들이 여전히 제 곁에 있다는 게 정말 감사하고 행복하더라고요. 요즘 <메리 셸리>에 함께 출연 중인 최연우, 전성민 언니, <여기, 피화당>을 함께하는 정인지, 최수진 언니와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언니들에게 공연에 임하는 자세나 방식에 대해서 정말 많이 배웠어요. 언니들이 무대에 있을 때 공연의 분위기를 이끄는 힘이 크게 느껴지는데,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를 가까이서 보고 배울 수 있어서 기뻤어요. 언니들을 보면서 ‘나도 열심히 하면 저렇게 될 수 있겠구나’라는 희망이 생겨서 일종의 안도감이 생기기도 했고요.

 

 

<여기, 피화당>의 초연을 함께하고 있어요. 가은비라는 인물을 어떻게 그려내고자 했나요?

먼저, 가은비는 모두를 보듬어 줄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같은 역을 맡은 언니들에 비해 삶의 경험이 많지 않은 편이기 때문에 내가 이 인물로서 낼 수 있는 무게감은 어느 정도일지 고민했죠. 고민 끝에,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타인을 배려, 존중하고 사랑을 베푸는 사람에게는 누구도 함부로 행동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그려내는 가은비가 성숙한 면모를 뿜어내지 못한다 해도,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만 잘 가져간다면 또 다른 깊이를 표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서로를 위로하며 함께 성장하는 세 여성의 연대가 빛나는 작품이에요. 극 중 가장 마음에 남는 장면이나 대사가 있다면요.

작품의 후반부, 동굴에 가은비, 매화, 계화 세 사람만 남아요. 제가 다른 두 사람을 지켜보지 않을 때도 제 등 뒤로 두 사람의 존재감이 굉장히 크게 느껴져요. 어둡고 텅 빈 동굴에 세 사람만 남은 상황인데, 그 안이 서로의 존재감으로 가득 찼다고 볼 수 있죠. 어떻게 보면 참 마음이 아파요. 서로 다른 세 인물이 서로에게 그렇게까지 큰 동질감을 느낀다는 건 그만큼 큰 상처를 공유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동시에, 그 장면은 세 사람이 ‘생존’에 가장 가깝게 닿아있는 순간이기도 해요. ‘이 사람들이 아니었으면 난 이미 죽었겠구나’라는 생각이 세 사람 모두에게 있었을 거예요.

 

그 장면 이후 세 사람은 “이야기 속의 나는 강한 사람”이라 울부짖으며 ‘박씨전’을 써 내려가잖아요. 저는 그 장면이 유독 마음에 남더라고요.

‘박씨전 세 번째 이야기’ 넘버에서 계화가 가장 먼저 글을 쓰기 시작하는데, 그건 정말 생존을 위한 글쓰기였어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지난한 현실을 버틸 수 없으니까.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들이 삶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서로가 서로의 곁에 존재했기 때문이거든요. 공연을 할 때, 그 장면 속에 있다 보면 이들이 서로를 정말 진심으로 사랑하는구나, 생사의 기로에서 ‘생’을 선택하게 하는 힘은 역시 사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실제로 ‘박씨전’이 당대 시민들을 위로해 준 작품이라고 하잖아요. 공연 역시 관객을 위로해 주는 역할을 하는데, 관객들이 <여기, 피화당>을 통해 어떤 에너지를 얻어가길 바라나요?

저는 힘들 때 슬픈 노래를 들어요. 우울할 때도 우울한 노래를 듣고요. 내 감정에 공감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겨서 그런 것 같아요. 나와 같은 아픔을 겪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더라고요. <여기, 피화당>은 힘든 현실을 이겨내고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잖아요. 아픈 시간을 보내고 있는 분들이 계신다면, 이 작품을 보고 조금이나마 삶의 희망과 위로를 얻어 가셨으면 좋겠어요. 덧붙여서, 대학생 때 선생님이 <여기, 피화당>을 보시고 ‘이 작품이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큰 의미를 가질 수 있겠다’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벅참이 피어오르더라고요. <여기, 피화당>이 관객분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전할 수 있는 작품이 되길 바라요.

 

여담이지만, <여기, 피화당> 공연을 하면서 오히려 제가 객석에 앉아 계신 관객분들에게 강한 에너지를 받아요. 사실 공연 중에는 쑥스러워서 관객분들을 잘 못 쳐다보는 편인데(웃음) 커튼콜 때 객석을 바라보고 서면 관객분들과 저 사이에 아무런 가림막이 없잖아요. 관객분들을 정말 오롯이 마주하게 되는 그 순간에 배우와 관객이 가장 많은 에너지를 공유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제가 전달하는 에너지가 부디 때 묻지 않고, 깨끗했으면 좋겠어요. 특히 <여기, 피화당>에서는 더더욱이요. 고달팠지만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켰던 가은비의 삶에 제가 조금이라도 안 좋은 기운을 끼치고 싶지 않아요.

 

가은비에게 글이 자아실현의 수단이라면, 배우에게는 연기가 그 수단일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후 씨에게 연기란 어떤 존재인가요?

가장 첫 번째로 든 생각은, ‘연기란 내가 좋아서 하는 것’. (웃음) 내 연기의 첫 번째 관객이자 절대 속일 수 없는 관객이 바로 저 자신이에요. 연습을 하고, 공연을 하는 내내 이 첫 번째 관객과 매일 싸워요. (웃음) 무대 위에서 진심으로 살아있고, 상대 배우와 긴밀한 교감을 했을 때의 즐거움은 정말 말도 못 하거든요. 그 즐거움을 잊지 않고, 나의 첫 번째 관객과 타협하지 않는 것이 관객분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며 무대에 서고 있어요.

 

 

그동안 연기했던 캐릭터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인물을 꼽아보자면요.

당연히 제가 연기한 모든 인물에게 애정이 있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데뷔작인 <베어 더 뮤지컬>의 나디아예요. 나디아를 생각하면, 자식을 떠올리는 부모의 마음처럼 잘해주지 못한 것만 기억나요. (웃음) 무대 위에서 잘 해내고 싶어서 발버둥 쳤던 그때의 제가 떠올라서 애틋하기도 하고요. 복합적인 마음이에요. 비슷한 맥락에서 <알렉산더>의 알렉산더도 생각나요. 심지어 알렉산더는 말이잖아요. 그 당시의 저 역시 잘 해내겠다는 순수한 열정만 가득해서는, 무작정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였거든요. 다시 돌아가도 그때만큼 모든 것을 쏟아부으면서 할 수는 없을 거예요.  

 

2017년 <베어 더 뮤지컬>로 데뷔한 이후 지난 7년간 활동하며 느낀 소회는 어떤가요.

10년, 20년도 아니고 7년을 돌아보는 게 조금 부끄럽긴 한데(웃음) 정말 감사한 마음밖에 없어요.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은 덕분에 7년이란 시간 동안 버틸 수 있었어요. 지금보다 더 어릴 때는 선배들이 ‘함께하는 사람을 보고 작품을 선택한다’고 말씀하시는 걸 100% 이해하지는 못했어요. 마음 한구석에 ‘그래도 대본, 음악, 캐릭터가 우선 아닌가?’ 라는 의문이 있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선배들이 한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 알겠더라고요. 공연과 삶을 철저하게 분리하는 건 불가능하니, 작품을 선택하는 건 곧 내 인생의 한 토막을 누구와 함께 나눌 것이냐 선택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어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저는 좋은 작품에서, 좋은 사람들을 정말 많이 만났어요. 물론 힘든 일도 있었지만 제 곁을 지켜준 사람들 덕분에 버틸 수 있었어요. 저의 7년을 함께해 준 사람들에게 정말 감사해요.

 

이후 씨가 데뷔한 2017년은 여성 서사 작품의 필요성이 점차 대두되던 시기였어요. 그 후 다수의 여성 서사 작품이 꾸준하게 관객을 만나고 있고요. 여성 서사 작품이 유의미하게 많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여성 배우들이 설 자리는 여전히 턱없이 부족하죠. 배우로서 활동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런 현실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들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주변에 실력 좋은 여성 배우들이 정말 많아요. 제가 앞장서서 그들의 존재를 알리고 싶을 정도로요. 배우는 언제나 선택받아야 하는 존재잖아요. 설 자리가 없어서 힘들어하는 건 모든 배우의 일상이에요. 하지만 관객분들이 꾸준히 찾아주시면, 저희의 자리도 꾸준히 늘어날 것이라고 믿어요. 그러니 여성 서사 작품에, 여성 배우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어요. 그 관심에 충분히 부응할 수 있는,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여성 배우들이 정말 많아요.

 

어떤 여성의 이야기가 더 늘어나길 바라나요?

뭐든 좋아요. 그저 다양한 이야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에요. 이왕이면 지금껏 본 적 없는, 새로운 모습의 여성이면 좋겠고요.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정말 힘이 세서 강해 보이거나 멋있어 보이지 않아도 충분한 캐릭터가 보고 싶어요. 또, 중년·노년의 여성 주인공도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하는 말이 아니라, 그들의 삶은 그 나이대만이 줄 수 있는 다채로운 재미와 감동이 있을 테니까요. 궁극적으로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주인공의 성별을 떠나서, 작품 자체로 재미있으면 관객분들이 자연스럽게 사랑해 주실 거라 믿어요.

 

<여기, 피화당>을 비롯해서 <난설>과 <브론테> 등 힘든 현실을 이겨내고 자신의 길을 굳건히 걸어간 여성들의 이야기가 현재의 관객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처럼, 이 시대를 살아가는 김이후가 다음 세대의 여성에게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나요?

저는 앞으로가 기대돼요. 지금껏 치열하게 살아온 수많은 여성들 덕분에 제가 현재를 누리고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 저도 제 현재와 미래를 치열하게 열심히 살아보려고 해요. 다음 세대의 여성들을 위해서요. 그러면 지금은 당연하지 않았던 것들이 점점 당연해지겠죠. 그러면 다음 세대의 아이들은 저보다 더 많은 것을 시도해 볼 수 있을 거예요. 우리가 남긴 결과물들이 그들에게 좋은 자양분이 되어줬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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