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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국내 유일의 뮤지컬 전문지 더뮤지컬이 취재한 뮤지컬계 이슈와 인물

피처 | [SPECIAL②] 자신을 숨긴 여성들

글 |이솔희 사진 |. 2024-03-07 1,654

더뮤지컬 여성의 날 특집 기획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더뮤지컬이 공연계 ‘여성 서사 작품’의 현황을 다시금 들여다봅니다. 먼저, 여성 아티스트와 여성 서사 작품을 다루는 공연예술월간지 『여덟 갈피』를 발행한 장경진 공연 칼럼니스트가 여성 중심 서사 뮤지컬이 걸어온 길과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다음으로 <난설> <브론테> <여기, 피화당> 등 현재 공연 중인 뮤지컬 속 주목할 만한 여성 인물을 조명하고, 해당 작품의 배우와 창작진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의 이야기는 자연스레 지워졌다. 그러나 자신의 꿈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낸 여성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다. 때로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자신을 숨기기도 했지만, 이는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방법이었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간 여성들의 이야기가 지금 여기의 무대 위에 있다.

 

<난설> 3.12~6.2 예스24스테이지 2관

뮤지컬 <난설>의 주인공은 조선시대 최고의 시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허난설헌이다. 극 중에는 본명인 허초희로 등장한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형제들과 함께 글을 배우며 8세에 이미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이라는 이름의 산문을 썼을 정도로 빛나는 재능을 타고난 인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벽에 가로막혀 자유롭게 꿈을 펼치지 못한 삶을 살았다. 작품은 허초희와 그의 동생 허균, 스승이자 허초희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었던 ‘지음’ 이달의 이야기를 통해, 여성에게는 많은 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시대에 허초희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고민한다.

 

극 중 허초희는 허균의 옷으로 변복하고 어두운 밤거리로 나선다. 시를 짓기 위해서다. 남성의 옷으로 정체를 감추었지만, 옷 아래에 숨겨진 시를 향한 열망은 오롯이 허초희의 것이었다. 녹록지는 않았지만, 그저 ‘쓰이지 못한 붓’으로 남을 수도 있었던 그의 삶에 시라는 짙은 흔적이 남을 수 있었던 것 또한 그 스스로의 열정 덕분이다. 삶의 마지막, 허초희는 자신의 숨이자 목숨이었던 시를 불태운다. 멀리멀리 날아가, 어디든 닿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말이다. 하지만 자유롭게 날아가고 싶었던 것은 그 무엇이 아닌 자기 자신이었음을 우리 모두는 안다.

 

 

<브론테> 3.4~6.2 링크아트센터드림 드림 1관

뮤지컬 <브론테>는 독특한 작품 세계로 주목받은 세 명의 작가 샬럿 브론테, 에밀리 브론테, 앤 브론테 세 자매의 이야기다. 샬럿은 『제인 에어』로, 에밀리는 『폭풍의 언덕』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앤 역시 『아그네스 그레이』 등 꾸준히 글을 써낸 작가다. 극 중 에밀리가 “여자가 책을 내면 돌을 맞을 것”이라고 말할 만큼, 그들이 활동했던 빅토리아 시대는 여자가 글을 쓰는 것이 허락되지 않던 때였다. 그래서 당대에는 여성 작가가 남성의 이름 혹은 익명으로 작품을 발표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고, 세 사람 역시 커러, 엘리스, 액튼이라는 이름으로 첫 시집을 냈다. 작품은 이러한 현실을 유쾌하게 비꼬는 장면을 넣어 관객의 답답함을 해소한다. 작품의 후반부, 침실극을 펼치는 세 사람의 모습을 통해서다. ‘금기를 어겼다’라느니, ‘이 소설의 시대는 오지 않을 것’이라느니, ‘소설이 아니라 논문 자료’라느니 하는 편협한 평가를 비웃으며 “여러분은 브론테라는 이름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 자부하는 세 자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공연의 시작부터 끝까지, 세 사람은 글에 대한 열정을 일관성 있게 이야기한다. 그 과정에서 편견의 벽을 맞닥뜨리기도, 자기 자신을 울타리에 가두기도,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하지만 그들은 쉬지 않고 치열하게 글을 향해 달려간다. 무대 위에서 세 인물은 생생하게 살아있다. 샬럿은 작가로서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을 과감하게 드러내고, 예민하고 야성적인 면모가 돋보이는 에밀리는 “모든 인간이 천국에 갈 순 없고, 모든 사랑이 숭고한 얼굴을 하지는 않는다”며 자신만의 창작 세계를 날카롭게 파고든다. 앤은 오랜 시간이 걸려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속도를 지키며 나아간다. 그런 세 사람이 함께 자유와 탈주, 욕망과 해방을 노래하며 스스로를 ‘글쓰기에 미친 인간들’이라 설명하는 모습은 더없이 통쾌하다.

 

 

<여기, 피화당> 2.7~4.14 플러스씨어터

17세기 조선을 배경으로 하는 뮤지컬 <여기, 피화당>은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끌려갔다 돌아왔지만 오히려 집에서 쫓겨나 동굴에 숨어 사는 세 여성 가은비, 매화, 계화의 이야기다. 이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 ‘피화당’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화를 피하는 공간이라는 의미다. 앞선 두 작품과 달리 가상의 인물들이지만, 시대적 아픔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곧 그 시대를 살아간 모든 여성을 대변한다.

 

<난설> <브론테>에서의 ‘글’이 주인공의 삶의 목적이었다면, <여기, 피화당> 속 글은 생을 유지하는 수단이다. 허초희와 브론테 자매에게 글이 없는 삶은 곧 죽음과도 같았기에 거친 현실 속에서도 글 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면,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었던 가은비의 삶에서 글은 자신의 숨통을 틔워주는 한 줄기 빛이었다. 작품의 초반부, 가은비에게 글은 생계 수단이었다. 그는 동굴 속에 숨어 살며 조금씩 적은 이야기를 저잣거리에 내다 팔아 돈을 벌었다. 그러나 한 선비에게서 사대부를 비판하는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은 후 그에게 글의 의미는 조금 달라진다. 이야기 안에 지난한 현실의 울분과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소망을 담아내면서 글은 궁극적인 생존의 수단이 되어 그의 삶을 지탱한다. <여기, 피화당>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단순히 가은비 혼자서 글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가은비와 매화, 계화가 함께 글을 써 내려가는 모습을 펼쳐내며 세 여성의 연대와 성장을 동시에 그린다. 이들은 글에 자신들의 이름을 남기지는 않지만, 언젠가는 그들의 이야기가 반짝일 것임을 희망한다. 세 사람이 쓴 글의 정체는 작자 미상으로 알려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영웅 소설 ‘박씨전’이다.

 

세 작품 속 인물들은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내가 진짜 나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여성들이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 무대 위에 선 그들은 현재의 관객에게 묻는다. 도포 안에, 필명 뒤에, 동굴 속에 숨지 않아도 되는 시대를 살아가는 너희는 지금 무엇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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