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뮤지컬 여성의 날 특집 기획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더뮤지컬이 공연계 ‘여성 서사 작품’의 현황을 다시금 들여다봅니다. 먼저, 여성 아티스트와 여성 서사 작품을 다루는 공연예술월간지 『여덟 갈피』를 발행한 장경진 공연 칼럼니스트가 여성 중심 서사 뮤지컬이 걸어온 길과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다음으로 <난설> <브론테> <여기, 피화당> 등 현재 공연 중인 뮤지컬 속 주목할 만한 여성 인물을 조명하고, 해당 작품의 배우와 창작진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한국에서는 뮤지컬의 본격적인 시작을 <오페라의 유령>이 초연된 2001년으로 잡는다. 이후 <지킬앤하이드>와 <헤드윅>, <노트르담 드 파리>와 <쓰릴미> 같은 작품이 스테디셀러로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선과 악, 사랑과 욕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대체로 남성들의 몫이었다. 여성은 남성의 연인과 어머니로서 구원의 존재이거나 남성의 욕망을 자극하는 팜므파탈의 위치에 머물렀다. ‘성녀 아니면 창녀’라는 여성에 대한 이중잣대를 지적했지만, 작품에서 배제되는 여성 배우와 관객의 불만은 무대에 닿지 못했다. 여성 배우의 인지도와 영향력은 낮았고, 비판에도 여전히 작품은 사랑받는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익숙함에 의문이 들 때, 낯선 감정과 경험이 쌓여 언어화될 때 변화는 시작된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사회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SNS는 ‘#OOO_내_성폭력’이라는 어둠으로 가득했으며, 2018년에는 본격적인 ‘미투 운동’이 전개됐다. 현실과 작품의 의도적인 분리가 불가능해졌다. 젠더감수성의 적극적인 각성은 창작진은 물론이고 관객에게도 요구됐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기존 스테디셀러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의 재해석이었다. 작품 속 여성 캐릭터의 비중을 늘릴 수는 없지만, 여성 배우들의 입체적이고 능동적인 해석으로 인물의 밀도가 높아졌다. 2018년에 재공연된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기혼 여성의 공허를 짙게 담아내며 여성 캐릭터의 힘과 작품의 개연성을 견인했다. 시라노의 진실한 사랑을 투영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던 <시라노>의 록산도 2019년 재공연에서는 하고 싶은 것은 해내고야 마는 인물로 표현됐다. 다양한 여성 캐릭터를 향한 요구가 강해지면서 묵혀있던 작품들도 다시 무대에 올랐다. 여성 재소자의 성장을 그린 <스핏파이어 그릴>이 14년 만에, 여성의 갱년기를 소재로 한 <메노포즈>가 5년 만에 다시 관객을 만났다. <베르나르다 알바>와 <리지>는 여성 배우로만 구성되었다는 것으로 이슈가 됐다.
창작뮤지컬은 젊은 창작자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여성의 얼굴을 적극적으로 소환했다. 구체성을 바탕으로 실존 인물에 대한 오래된 오해와 편견을 부수는 작업이 다수였다. <난설>과 <메리셸리>, <프리다>와 <브론테>가 여성 예술가를 조명했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영국을 배경으로 한 <레드북>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마주하는 각종 차별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보다 직접적인 논의를 이끌어냈다. 여성의 입체적인 삶을 표현한 작품이 늘어나면서 인물의 연령대도 넓어졌다. <유진과 유진>이 청소년을, <호프: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과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가 노년을 그렸다. 늘어난 여성서사 작품 덕에 나이와 상관없이 상처를 딛고 성장하는 여성들을 무대에서 자주 만났다.
창작진과 배우들은 적극적인 해석으로 관습에 의문을 품고 고정적인 성역할에 균열을 냈다. 캐릭터와 배우의 상이한 젠더를 보여주는 ‘젠더 블라인드’ 작업도 이 과정에서 탄생했다. 2020년, 남성 배우가 주로 연기하던 <미드나잇: 앤틀러스> 비지터 역에 여성 배우 유리아가 캐스팅됐다. 상대를 궁지로 몰아넣으며 공포의 존재로 군림하는 캐릭터를 여성 배우가 연기하자, 이러한 감정의 영역이 그동안 여성 배우들에게 주어지지 않았음을 역으로 알게 됐다. <데미안>은 모든 배우가 싱클레어와 데미안을 번갈아 연기하는 작품이다. 젠더적 특징을 지우자 인간 보편의 불안과 고뇌를 더욱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게 됐다. 오래도록 ‘MTF’(Male to Female) 인물을 그려왔지만, ‘트렌스젠더’의 이야기인 <헤드윅>이 ‘FTM’의 이야기로 전복되지 못할 이유도 없다. 적극적인 여성의 활용은 새로운 가능성을 활짝 여는 문이다.
2018년 ‘미투 운동’을 기점으로 지난 6년간 뮤지컬 시장에서 여성 서사 작품의 비중은 커졌다. 그럼에도 여성서사가 뮤지컬 시장의 ‘기본값’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적은 기회를 붙잡는 과정에서 창작진은 ‘완전무결’이라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 ‘약자’가 아님을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에 종종 어떤 여성 캐릭터는 영웅적으로 묘사된다. 불의에 항거하고, 약자를 돕고, 지치지 않는다. 공연을 보는 동안은 속이 다 시원하다. 그러나 ‘사이다 서사’가 수많은 맥락을 지우듯, 영웅적 묘사 역시 여성 스스로를 향한 또다른 검열이 된다. 더 많이 실패하고, 때로는 이기적인 선택을 하는 여성도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여성을 단 하나의 이미지에 가두지 않는 것이다. 여성 서사 뮤지컬이 주로 과거를 소환한다는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러한 접근이 숨겨진 여성의 존재를 가시화하고, 낯설지 않은 인물의 삶이 현재의 질문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나와 극을 분리하는 거리두기가 때로는 인물을 대상화하고 현실을 지울 가능성도 만든다.
결국 비중과 상관없이 서브텍스트가 풍부하게 전달되는 밀도 높은 인물을 창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역량은 ‘교차성’을 감각하는 일이다. 연극계는 ‘미투 운동’ 이후 대대적인 세대교체가 이뤄졌다. 평등한 창작 환경과 페미니즘, 당사자성이 창작의 기본값이 됐다. 여기에 퀴어와 장애, 기후위기 같은 동시대 고민이 더해져 더 넓은 세계로 연결되는 중이다. 한 인간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정체성이 표현되었을 때, 관객은 인물을 타입화하지 않고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모두 입장에 따라 기울어진 운동장의 위아래를 오가기 때문이다. <마리 퀴리>는 이러한 인간의 교차성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관객은 여성이자 이방인, 과학자이며 유자녀 기혼자라는 복합적인 정체성 덕분에 노벨상 수상자라는 타이틀을 넘어 아주 평범한 인간의 고민을 마주하게 된다. 여성 서사 작품은 여성으로서의 차별을 인식하고 여성의 가능성을 찾기 위해 시작됐다. 여전히 여성의 이야기는 양적으로 더욱 필요하다. 그러나 ‘여성’을 넘어 ‘어떤’ 여성을 만날 것인가, 타인과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 ‘여성’이라는 단어로 배제하는 존재는 없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의미를 확장해야 한다. 예술이란 궁극적으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