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인생의 시작
어떤 상황에서도 미소를 지으며 농담을 건넬 것 같은 무한 긍정과 자신감의 소유자, 그게 안재욱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몸에 이상이 생겼고 활동을 중단하며 그를 비추던 스포트라이트는 잠시 꺼졌다. 건강을 회복한 그가 1년 만의 복귀작으로 선택한 것은 <태양왕>이다. 화려한 의상을 입고 수많은 여인과 무희들에 둘러싸인 왕의 모습은 마치 안재욱의 빛나는 과거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지금의 안재욱은 과거와 분명히 달라졌다. 개막을 앞두고 베르사유 궁전과 파리 시내를 돌아본 그는 그곳에서 어떤 감상을 갖고 돌아왔을까.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됐다
지난 한 해 동안 안재욱이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괜찮아?”였다. 수술 이후 회복은 빨랐지만 문제는 정신적인 충격이었다. 게다가 공연을 못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조바심도 생겼다. “무려 1년을 쉬었으니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어요. 전에는 다른 배우들과 비슷한 선상에서 앞서 가려고 했다면, 이제는 뒤에 한참 처졌다가 따라가야 하는 상황이 된 거니까.” 그래서 마냥 쉴 수 없었다. 11월부터 연말까지 일본과 부산에서 <잭 더 리퍼>로 짧은 공연을 했다. 전에 없던 긴장감이 크게 느껴졌지만, 그건 공연을 거듭하면서 극복해야 할 부분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기에는 시간이 아까웠다.
그런 점에서 <태양왕>은 안재욱에게 좋은 기회였다. 새로워진 음악이나 작품의 분위기가 그에게 호기심을 발동시켰다. “이 작품이 국내에서 공연될 거라는 소식은 2년 전에 들었는데, 그때는 다소 웅장하고 무게감 있게 느껴졌어요. 그런데 이번 공연은 음악도 팝 스타일로 가면서 전반적으로 밝고 가벼워진 점이 흥미롭더라고요.” 특히 그는 이번에 왕 역할을 처음 해본다며 살짝 들떠 있었다. “비록 극 중 역할이지만 누릴 수 있는 건 다 누려보려고요. (웃음) 특히 공연하면서 이렇게 의상을 많이 갈아입는 것도 처음이에요. <잭 더 리퍼>나 <황태자 루돌프>는 한두 벌로 공연을 했는데 이번에 무려 열대여섯 벌이에요.”
프랑스 뮤지컬 팬들 사이에서 <태양왕>은 인터넷을 통해 이미 익숙한 상태다. 그래서 이번 라이선스 공연에서는 오리지널 버전의 진수를 전하면서도 그와 다른 매력을 도출하는 것도 중요하다. 안재욱이 염두에 둔 자신만의 루이는 어떤 모습일까. “보통 루이 14세를 강한 권력을 가진 절대군주라고 보는데, 저는 우아한 왕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어요. 우아함을 표현하려고 발레를 전공한 무용 팀 친구들에게 손매나 자세 하나까지 교정도 받고 있죠.”
그는 공연을 앞두고 인물 연구를 위해 파리 시내와 베르사유 궁전을 다녀왔다. 파리는 여러 번 갔던 곳이라 익숙하지만, 루이 14세로서 돌아본 그곳은 새로운 느낌을 선사했다. “여길 여러 번 오다 보니까 이런 인연이 닿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묘하더라고요. 설마 내가 이 나라 왕 역할을 하게 될 줄이야.” (웃음) 베르사유 궁에서도 그는 두리번거리면서 사진 찍기 바쁜 관광객들 사이에서 엉뚱한 생각을 하며 혼자 킥킥댔다. “속으로 ‘여기가 내 집입니다. 이 정원은 내 마당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니까 재밌더라고요.” 그는 으리으리한 침실이나 의자에 앉아서 루이의 사적인 고민을 유추하는가 하면, 긴 복도를 거닐면서 왕으로서의 고민을 상상하면서 태양왕 캐릭터의 시뮬레이션을 마쳤다.
물론 모든 준비가 다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가 지난해부터 지니고 있는 부담감을 떨쳐내는 것이 급선무다. <태양왕>은 주인공인 루이가 극 전체를 지배하면서 이끌어야 하는 작품이다. 게다가 초연이다. 즉 이번 공연의 성패가 어느 정도 루이에 달려있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안재욱의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다. “20~30대 때는 주인공을 누리면서 즐기기만 하니까 좋았는데, 지금은 책임감만 커지네요.” 베테랑인 그가 느끼는 압박감은 새삼스럽지만, 그건 안재욱의 무대관이 깊어진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제 슬슬 내려놓을 나이가 되니까 오히려 부담이 커져요. 그게 바로 무대의 매력 같기도 하고.”
데뷔하는 마음으로 서는 무대
대중 위에서 태양처럼 군림하는 존재. 그는 춤과 노래를 즐기고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과 교감한다. 태양왕과 스타 안재욱은 그런 점에서 닮았다. 하지만 안재욱은 연예인으로서의 모습은 닮았어도 개인적인 성향은 오히려 루돌프에 가깝다고 말했다. “번잡한 걸 싫어해요. 평상시엔 굉장히 조용한 편이고요. 의외로 낯을 가려서 아는 사람만 만나요. 반드시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삶의 관성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리듬을 유지하며 사는 태도는 안재욱이 유명해진 후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소위 ‘뜨기’ 전, 돈 한 푼 없이 살아갈 때부터 그는 화려하지 않은 일상에서 인생의 재미를 찾고자 했다. “일을 많이 하는 바쁜 사람들은 항상 조급하거든요. 늘 뭔가에 쫓기는 듯한 불안함이 있어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도 바빠지면서 이런 삶의 태도를 잃어버리게 됐다. “오늘 촬영을 하면 내일은 어떻게 될까. 휴식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다음 날 일을 하기 위해 쉬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었어요. ‘일-휴식-일-휴식’의 반복이었던 셈이죠. 그런데 지난해는 정말 생각할 시간을 많이 가지면서 지나간 삶을 돌아봤어요. 그리고 내가 이렇게 잠시 멈춰 있어야 할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죠.”
연기 활동에 대한 생각과 인생의 방향에 대한 고민은 무대라는 공간에 대한 애착과 연결돼 있다. 그리고 이런 점이 안재욱이 다른 TV 스타 출신의 배우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최근 후배 가수나 연기자들의 뮤지컬 진출에 대해서도 그는 일단 긍정적이면서도 신중한 입장이다. “능력 있는 친구들이 무대에 오르는 건 제작자에게나 관객에게나 좋은 일이에요. 단, 마케팅만으로 끝나는 건 반대예요. ‘평소에 만 명 몰고 다니니까 공연에 반만 와도 오천 명이겠네’ 식의 접근, 굉장히 안 좋아요. 캐스팅 후에도 그들이 공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들을 강구해야죠. 그게 없다면 그냥 장사밖에 안 되겠죠.”
물론 안재욱은 자신조차도 어린 관객들에게는 스타 캐스팅의 선입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부분이 그에게 중요한 동기부여가 된다. 풍성한 프로필을 위해 단지 뮤지컬 출연 자체에 의미를 두는 연예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것이다. “저도 고집이 있고 자존심이 있거든요. ‘연예인이 얼마나 잘하나 보자’라는 생각으로 오신 분들에게 ‘어, 기대 안 하고 봤는데 나쁘지 않네?’라는 생각을 갖게 하고 싶은 거예요. 다음에 또 내 공연을 보러 오게 하면서 뮤지컬에서도 팬들을 만들기로 마음을 굳혔어요. 올해 데뷔했다고 생각하려고요. (웃음)”
그러고 보면 올해는 안재욱의 연기 인생 20년이 되는 해다. 그가 전 국민에게 이름을 알린 것이 1994년 TV 드라마를 통해서였다면, 뮤지컬도 이듬해부터 시작해 무대와의 인연을 계속해왔다. 그래서 얼마든지 ‘데뷔 20년’이라는 타이틀로 의미를 다지는 행사들을 마련할 수 있다. 하지만 안재욱은 예의 그 성격처럼 조용히 올해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생각해보니까 올해를 그렇게 기념하면 10년 후에는 또 30년 기념 이벤트를 해야 되잖아요? 그땐 내가 별로 안 유명한 사람일 수도 있는데. (웃음) 앞으로는 매해가 기념이니까 타이틀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럼에도 1년 만의 무대 복귀작인 <태양왕>은 분명히 그에게 특별한 의미가 될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두문불출하던 배우 안재욱을 세상 사람들과 다시 어울리게 하는 연결고리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건 프로그램북에서도 한 번 써먹은 말인데, <태양왕>은 내가 다시 세상의 중심으로 다가갈 수 있는 발판이 될 것 같아요. 또 그렇게 될 거라 믿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7호 2014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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