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개막한 <히어 라이즈 러브>는 여러 면에서 브로드웨이 주류 뮤지컬과 구별되는 작품이다. 우선 이 작품은 실제 클럽을 참고해서 만든 무대와 객석, 여기에 어울리는 디스코 음악이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이뿐만이 아니다. 주인공도 남다르다. 1965년부터 1986년까지 21년간 필리핀을 독재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부인이자 사치의 여왕으로 명성이 자자한 이멜다 마르코스가 주인공이다.
ⓒBilly Bustamante, Matthew Murphy and Evan Zimmerman
가난한 소녀에서 독재자의 영부인으로
필리핀의 가난한 동네에서 가장 예쁜 소녀인 이멜다는 친구 에스텔라와 언젠가 상류 사회의 일원이 되길 바라며 평범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런 그녀 앞에 부잣집 도련님 니노이 아키노가 나타나고 두 사람은 금세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둘의 사이는 니노이가 정계에 뛰어들면서 멀어진다. 니노이와 헤어진 이멜다는 마닐라에서 열리는 미인 대회에 출전하며 상류 사회 진입을 노린다. 때마침 전도유망한 젊은 정치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를 만난 이멜다는 그와 급속도로 가까워져 결혼에 골인한다. 얼마 후 페르디난드는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를 공약으로 내세우며 제10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영부인이 된 이멜다는 남편과 전 세계 곳곳을 누비며 유명인들과 파티를 벌이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일삼는다. 이멜다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유지하려고 국가 재정을 횡령하는가 하면 쓸모없는 사업을 펼쳐 국민들을 착취한다는 비난을 받는다. 이멜다를 향한 비난 여론을 이끄는 건 그녀의 옛 연인이자 상원 의원인 니노이 아키노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된 이멜다는 큰 충격에 빠진다. 이를 계기로 이멜다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고 앞으로는 나라를 위해 봉사하기로 결심한다. 페르디난드의 건강이 나빠지자 이멜다는 남편을 도와 국정을 돌보기 시작한다. 하지만 니노이가 반대파에 대한 정치 탄압 중단을 촉구하면서 이멜다의 지도력은 시험대에 놓인다. 이와 동시에 이멜다의 친구 에스텔라는 방송에 출연해 이멜다가 숨겼던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폭로한다. 민심이 점점 악화되자 페르디난드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본보기로 정적 니노이를 감옥에 가둔다. 이멜다는 옛정을 생각해 니노이를 풀어주고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당부한다. 이멜다의 수렴청정 아래 마르코스 정권은 힘을 잃어간다. 니노이는 이 틈을 타 정권 교체를 위해 귀국 비행기에 오르지만 필리핀에 도착하자마자 괴한의 총에 맞아 유명을 달리한다. 니노이의 장례식에서 그의 어머니 오로라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정권 반대 시위가 시작된다. 이멜다는 자신을 끌어내리려는 시위대를 보며 자신은 그저 사랑받고 싶었을 뿐인데 왜 사랑해 주지 않냐며 절규한다. 대규모 민주화 시위 속에 이멜다와 페르디난드는 하와이로 망명하고, 마르코스 독재 정권은 막을 내린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무대와 영상, 그리고 화려한 조명이 모두 사라진 자리에는 민주화를 쟁취한 필리핀 국민들이 모여 승리의 기쁨을 만끽한다.
ⓒBilly Bustamante, Matthew Murphy and Evan Zimmerman
콘셉트 앨범에서 시작된 뮤지컬
<히어 라이즈 러브>는 2013년 오프브로드웨이에서 개막한 후 꼬박 10년 만에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랐다. <히어 라이즈 러브>의 시작은 동명의 콘셉트 앨범 제작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콘셉트 앨범을 구상한 사람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싱어송라이터인 데이비드 번이다. 그는 1974년에 결성된 뉴 웨이브 밴드 ‘토킹 헤즈’의 리더로 미국 대중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1991년 밴드를 해체한 후 여러 방면에서 개인 활동을 이어왔는데, 콘셉트 앨범 「히어 라이즈 러브」도 그중 하나다. 데이비드 번은 이멜다 마르코스의 사치스러운 삶을 다룬 글에서 영감을 받아 전자 음악 DJ로 유명한 팻보이 슬림과 작업을 시작했다. 애초에 무대화를 염두에 두고 작업한 앨범은 가난한 시골 소녀가 독재자의 영부인이 되고 하와이로 망명하기까지 이야기를 담았다. 대부분의 가사는 실제 이멜다 마르코스의 연설에서 인용했다. 앨범의 제목이자 뮤지컬의 제목인 ‘히어 라이즈 러브’도 이멜다 마르코스가 페르디난드의 장례식에서 한 말이자 자신의 묘비명으로 써달라고 한 말이다. 이야기의 시대 배경과 이멜다 마르코스의 음악 취향을 반영한 음악은 1970년대와 1980년대 유행했던 디스코 장르가 주를 이룬다. 두 사람이 작업한 음악은 2006년 데이비드 번의 콘서트에서 첫선을 보였고, 이후 2010년 정식 앨범으로 발매됐다. 총 22곡이 담긴 이 앨범에는 신디 로퍼, 토리 에이모스, 마사 웨인라이트, 플로렌스 웰츠 등 실력파 여성 아티스트 20명이 참여했으며, 평단으로부터 좋은 평을 받았다. 이후 뮤지컬로 각색되어 오프브로드웨이와 영국에서 공연했고, 지난 7월 20일 브로드웨이 시어터에서 정식 개막했다.
<히어 라이즈 러브>의 캐스트는 전원 필리핀계 배우로 채워졌다. 이전에도 아시아계 배우들을 대거 캐스팅한 뮤지컬 <엘리전스>와
<히어 라이즈 러브>는 소재 외에도 또 다른 이야깃거리를 만들었다. 데이비드 번과 팻보이 슬림은 노래방과 클럽에서 사용하는 반주 트랙에서 영감을 받았기 때문에 공연에도 사전에 녹음된 음악을 사용하려고 했다. 이 문제로 <히어 라이즈 러브>는 개막 전 Local 802 AFM(American Federation of Musicians), 즉 브로드웨이의 연주자 노조와 한차례 마찰을 빚었다. <히어 라이즈 러브>를 공연하는 브로드웨이 시어터는 연주자 노조와 맺은 표준 계약에 따라 최소한 19명의 연주자를 고용할 의무가 있지만 <히어 라이즈 러브>는 녹음된 음악을 사용하면서 액터 뮤지션 3명과 음악 감독 1명으로 공연을 진행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예산을 축소하기 위해 인원을 줄인 것이 아니어서 제작사는 연주자 노조와 최소 고용 인원 협상을 진행할 수 있었다. 연주자 노조는 <히어 라이즈 러브>가 주로 전자 음악을 사용하는 것을 감안하여 제작사가 제안한 4명을 포함해 최종적으로 12명의 연주자를 고용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최근 브로드웨이에서는 <히어 라이즈 러브>처럼 연주자의 최소 고용 인원을 조정하려는 시도가 점차 늘고 있다. 전자 키보드가 여러 악기를 대체할 수 있게 되고, 뮤지컬 넘버 스타일이 변화하면서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고용하는 것이 점점 부담스러워졌기 때문이다. 현재 브로드웨이에서 공연 중인 <앤줄리엣> <원스 어폰 어 원 모어 타임>도 소규모 밴드 연주자를 고용하고 사전에 녹음된 음원을 사용하고 있다.
ⓒBilly Bustamante, Matthew Murphy and Evan Zimmerman
대대적인 공사로 클럽으로 변신한 극장
이 작품에서 가장 주목받는 것은 바로 무대다. 뉴욕타임스는 이 작품의 진정한 주인공은 무대 디자이너 데이비드 코린스가 만든 무대라고 언급했을 정도다. <해밀턴> <비틀쥬스>의 무대 디자인을 맡았던 데이비드 코린스는 대대적인 공사를 거쳐 실제 이멜다 마르코스가 즐겨 찾았던 뉴욕의 나이트클럽 ‘스튜디오 54’를 연상시키는 공간을 완성했다. <히어 라이즈 러브>는 1층 객석을 들어내고 댄스 플로어를 만들었고 오케스트라 피트를 스탠딩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무대 중앙에는 캣워크형 무대를 배치하고 그 위에는 거대한 디스코 볼도 달았다. 객석 1층과 2층 사이에는 ‘갤러리 좌석’이라고 불리는 간이 좌석을 만들었다. 갤러리 좌석은 극장 측면에 위치해 움직이는 무대를 가까이 볼 수 있는 자리다. 여기에 앉은 관객은 극 중 장면에 따라 마르코스 부부의 결혼식 하객, 선거 운동에 참여한 지지자, 시위대의 일원, 또 스튜디오 54에 놀러 온 사람이 되어 극에 참여한다. 극장 내부를 둘러싼 영상 패널에는 쉴 새 없이 영상이 돌아가며 흥을 돋운다. 영상 디자이너 피터 니그리니는 마르코스 부부의 사진과 영상, 그리고 필리핀의 역사 자료를 활용해 사실감을 부여하는 한편, 노래를 부르는 동안 반복되는 패턴과 화려한 색감의 영상을 노출하여 클럽에 와있는 듯한 느낌을 배가시킨다. 클럽 분위기를 만들려는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관객이 극장 어디에서든 동일한 사운드를 경험할 수 있도록 220개가 넘는 스피커도 설치했다.
관객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무대와 1층, 2층을 자유롭게 오가는 배우들과 함께 공연을 만든다. 공연이 시작되면 밀레니엄 클럽의 DJ는 1층 스탠딩 플로어의 관객들에게 파티가 진행되는 동안에 무대가 계속해서 움직이니 극장 안내원의 안내에 따라 부지런히 움직여 달라고 부탁한다. 일례로 1막 초반에 니노이 아키노가 ‘Child of the Philippines(필리핀의 아이)’를 부르는 동안 1층 중앙으로 길게 뻗어있던 무대는 가로, 세로, 대각선 방향으로 계속해서 움직인다. 배우들은 무대뿐만 아니라 무대 아래 스탠딩 구역을 지나다니며 관객과 함께 호흡한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부르는 ‘A Perfect Hand(이기는 편)’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지지자들 사이에서 방송을 촬영하는 장면으로 연출되는데, 이때 관객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지지자가 되어 객석으로 내려온 배우와 악수하거나 어깨동무하며 공연에 참여한다. 또 이 모습은 실시간으로 촬영되어 무대 전면 스크린에 곧바로 송출된다.
<히어 라이즈 러브>의 파격적인 무대를 진두지휘하는 이는 연출가 알렉스 팀버스다. <비틀쥬스> <물랑루즈!>를 연출하며 바쁜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알렉스 팀버스는 <히어 라이즈 러브>의 오프브로드웨이 공연 연출을 맡아 호평받은 바 있다. 그는 2014년 이 작품으로 오프브로드웨이 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루실 로텔 어워즈에서 연출상을 받았다. 1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알렉스 팀버스는 여전히 신선한 연출로 브로드웨이에 기분 좋은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Billy Bustamante, Matthew Murphy and Evan Zimmerman
피할 수 없는 비판
<히어 라이즈 러브>는 필리핀 독재 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이야기를 전하려는 작품이지만 필리핀을 2천만 달러에 사들여 식민 지배했던 미국에서 만들어진 상업 공연이라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이와 더불어 <히어 라이즈 러브>는 여러 면에서 비슷한 소재를 다룬 <에비타>를 연상하게 한다. 두 작품 모두 아름다운 영부인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며, 이들의 행보를 저격하고 비판하는 또 다른 실존 인물을 등장시킨다는 점, 두 작품 모두 자국이 아니라 영국 웨스트 엔드와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상업 공연으로 만들어진 점이 그렇다. 공교롭게도 <에비타> 또한 브로드웨이 시어터에서 공연된 바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히어 라이즈 러브>는 독재 정권을 미화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마르코스 정권은 1972년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부 독재 정권 체재를 공고히 하여 부정부패와 인권 유린을 자행했다. 1986년 민주화 운동으로 마르코스 정권이 축출되자 마르코스 부부는 하와이로 망명했고,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망명 중에 사망했다. 하지만 마르코스 일가는 지금까지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다. 망명 중에도 호화로운 생활을 이어가다 1991년 필리핀 대법원의 사면을 받은 이멜라 마르코스는 필리핀으로 귀국해 즉각 정치에 복귀했다. 마르코스 일가는 온갖 부정부패와 비리에 연루되었음에 불구하고 계속해서 정치 활동을 이어갔고, 2022년에는 이멜다 마르코스의 아들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현실이 이러니 독재자에 대한 미화가 아니냐는 비판이 나올 법하다. 하지만 <히어 라이즈 러브>는 이멜다 마르코스의 삶을 통해 필리핀이 어떤 고난을 겪고 민주화를 쟁취했는지에 초점을 맞추며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한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은 마르코스 부부의 대척점에 있는 니노이 아키노라 할 수 있다. 작품 후반부는 그가 어떻게 마르코스 부부를 저격했는지, 그의 죽음이 어떻게 필리핀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는지 이야기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비록 작품 내용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지만 <히어 라이즈 러브>는 새로운 형식의 공연에 목말랐던 관객들의 성원에 힘입어 비교적 순항 중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29호 2023년 10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