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신유청이란 이름은 연극계에서 누구보다 단단한 믿음을 주는 하나의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실제로 그는 근래 가장 많은 러브콜을 받는 연출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세일즈맨의 죽음> <테베랜드>에 이어 <더 웨일>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화제와 주목을 불러 모으며 쉴 새 없이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신유청 연출가로부터 연극과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연극의 힘
<더 웨일> 개막을 앞두고 한창 바쁘죠? 이 작품은 연출님이 직접 선택한 작품이라고 들었는데, 연출가로서 작품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대본을 꼼꼼하게 읽은 뒤 어떤 확신을 갖고 작품을 선택한다기보다 예기치 못한 순간에 우연히 와닿는 작품을 고르는 경우가 많아요. <와이프>는 어디선가 본 공연 사진 한 장 때문에 작업을 시작했죠. 이번에 <더 웨일>은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다가 갑자기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연극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에서 찰리 역을 맡은 브랜든 프레이저가 남우주연상을 받고 수상 소감을 말하고 있었어요.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지만 이 작품을 만나기 전과 후의 자신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내용이었죠. 그즈음 저는 우리가 만드는 연극이 누군가의 삶을 완전히 바꿀 수 있을까, 혹은 그런 공연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신작을 찾고 있었던 터라 인생이 통째로 바뀌었다는 그의 수상 소감을 지나칠 수 없었어요. 원작이 연극이라고 하니 더 궁금해지더라고요. 그렇게 대본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이 작품을 해야겠다고 결정했죠. 하지만 영화는 아직 보지 않았어요.
영화로 대중에게 알려진 작품을 다시 연극으로 올리는 데서 오는 부담감은 없었나요?
그건 이미 <그을린 사랑>을 공연할 때 경험했죠. 처음 쇼케이스 공연을 올릴 때만 해도 영화랑 비교될까 봐 많이 걱정했어요. 그런데 막상 공연을 올리고 나니 영화와는 분명히 다른 연극만의 힘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어요. 오히려 영화가 보여주지 못하는 지점들을 연극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죠. 연극은 영화에 비해 제약과 한계가 많지만 그 제약과 한계가 또 다른 힘을 발휘하더라고요. 무대가 가지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다시금 발견하게 되었죠. 그렇기 때문에 영화로 알려진 작품이라도 특별히 부담은 느끼지 않아요.
<더 웨일> 말고도 그간 참여한 작품 중에 영화나 TV 드라마로 알려진 작품들이 꽤 있더라고요. 그런 작품을 작업하면서 느낀 연극이라는 장르의 차별점이 있다면요?
이야기의 핵심은 해석이라고 생각해요. 똑같은 이야기라도 그 이야기를 어떻게 자신의 삶 속에서 해석하는가에 따라 이야기의 의미도 의의도 달라지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연극은 해석하기에 참 좋은 장르인 것 같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는 이야기를 해석한 감독의 시선이 1차적으로 들어가 있지만 연극은 관객들이 각자의 시선으로 해석하고 풀어낼 수 있는 여지가 더 많으니까요. <그을린 사랑>을 공연할 때 관객들이 자기의 삶 속에서 그 작품을 읽어내고 해석한 리뷰를 보면서 느낀 점이 많았어요. 이번 작품 <더 웨일>도 상징이 많은 작품이라서 이미 영화로 본 이야기라 할지라도 다른 감각으로 관객의 다양한 해석을 이끌어낼 거라 기대해요.
<더 웨일>의 주인공 찰리 역을 백석광 배우가 맡았죠. 백석광 배우와는 여러 작품에서 함께 작업했는데, 연출님이 생각하는 백석광 배우의 장점은 무엇인가요?
<그을린 사랑>의 마지막 공연을 마치고 같이했던 배우들과 다른 창작자들과 작업하면서 각자의 영역을 확장하자고 이야기를 나눴죠. 그 후로 저도 가능한 한 새로운 배우들과 만나 작업을 해왔고요. <더 웨일>은 아직 대본을 못 구한 상태에서 영화 트레일러랑 시상식만 봤는데 찰리의 눈망울이 유난히 기억에 남았어요. 처음에는 원작대로 덩치가 큰 배우들 위주로 찾다가 체형을 포기하더라도 눈빛이 살아있는 배우를 찾아야겠다 싶어서 백석광 배우에게 만나자고 했어요. 같이 영화 예고편을 보고 이 작품이 사람을 변화시킬 힘이 있는 것 같다고 했더니 석광 씨가 흔쾌히 출연을 수락했어요. 석광 씨는 무용을 한 적이 있어서 신체적인 표현력이 좋아요. 이번에도 특수 분장에 의존하지 않고 거대한 몸을 무대에서 어떻게 움직이고 표현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어요. 또 원래 연출을 전공했던 친구라 작업 과정 전반에 대한 이해가 깊어요. 단순한 수용자가 아니라 작업 내내 함께 고민하면서 작품을 만드는 좋은 파트너죠.
최근 몇 년간 쉴 틈 없이 작업을 이어가면서도 작품마다 관객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어요. 쉬지 않고 작업하는 와중에도 작품의 퀄리티를 유지하는 비결이 있나요?
평소 신학과 철학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두고 탐구하고 있는데, 저는 연극 작업이 저의 개인적인 공부와 같이 순환한다고 생각해요. 신학이나 철학은 아무리 깊이 파고들어 가도 이론밖에 남지 않아요. 하지만 이 이론들이 연극을 통해 실제 삶과 만나고, 삶 속에서 해석되고, 삶으로 변환되는 순간들을 경험할 수 있어요. 이런 경험이 다시 제 생각을 더 깊게 만들어주고, 그 생각이 또 다음 작업에 반영이 되고요. 그렇게 연극 작업을 제 삶과 분리된 어떤 엄청난 것이 아니라, 삶과 이어져 있는 무언가로 생각하면서 작업하다 보니 별로 지치지 않아요. 한 작품에 모든 걸 쏟아붓고 공연이 끝나면 다 소진되는 게 아니라 작품의 연결 고리 속에서 생각과 고민을 꾸준히 이어가다 보니 계속 작업을 이어갈 수 있는 것 같고요.
새로운 도전
참여한 작품의 스펙트럼이 고전에서 현대극, 상업극과 실험극에 이르기까지 굉장히 다양해요. 어떤 기준으로 작품을 선택하나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그때그때 운명처럼 만나는 작품들을 선택하는 편이에요. 전에 <조지아 맥브라이드의 전설>이란 작품의 연출을 의뢰받았을 때였어요. 여러 번 대본을 읽어봐도 저랑 잘 맞지 않아서 거절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산책 중에 갑자기 마음을 바꿨죠. 그렇게 작업을 시작하고 보니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사람이 계획대로만, 자기가 예상하는 그림대로만 가면 재미없구나, 앞으로는 내가 못 할 것 같은 작품도 해봐야겠구나 싶더라고요. 그 작품을 하면서 연출가로서 고집을 덜 부리게 되었어요. 저에겐 생소한 작품이어서 스태프들에게 의지하면서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 경험을 해보니 연출가가 모든 걸 통제하고 컨트롤하는 것보다 여러 사공과 함께 가다 보면 더 풍성한 작품을 만들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죠. <조지아 맥브라이드의 전설> 덕분에 조금 더 모험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어요.
작품을 보면 원작 대본에 거의 손을 대지 않는 것 같아요. 연출가로서 자신의 해석을 집어넣거나 드러내고 싶진 않나요?
연출을 하면서 염두에 두는 것은 작품에 제 해석을 더하는 게 아니라 덜어내야 작품의 본질에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거예요. 배우도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뭔가를 쌓기보다 자기를 비울 때 더 캐릭터에 가까워지거든요. 자기가 없어져야 비로소 타자를 수행할 수 있는 역설의 미학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저는 원작에 무언가를 더하기보다는 작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죠. 특히 이해가 안 되는 말이나 어색한 부분들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파고들어 가는 편이에요.
그렇다면 작업 과정에서 연출가로서 가장 희열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예요?
어릴 때 고고학자를 꿈꿨던 적이 있어요. 고고학자는 남아있는 흔적만으로 여기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상상하고 추론하잖아요. 대본을 읽다가 좀 이상한 부분, 자꾸 걸리는 부분을 만나면 마치 땅을 파다 이상한 물건을 발견한 고고학자처럼 그 지점을 찬찬히 파고들어요. 그런 식으로 유물을 발굴하듯이 대본을 파고들다 보면 ‘사이’나 ‘쉼표’ 같은 아주 사소한 것들에도 작가의 의도나 상징이 숨어있는 걸 발견할 때가 있어요. 작가가 남겨놓은 암호를 해독하는 기분으로 대본을 읽다가 작품의 큰 의미나 작가의 핵심적 의도와 만나면서 모든 게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걸 깨닫게 될 때 뿌듯하고 재미있죠.
코로나 팬데믹 시기를 지나면서 많은 예술인이 무대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는 고백을 종종 해요. 연출님도 비슷한 경험이 있나요?
코로나 상황이 악화되면서 <엔젤스 인 아메리카> 2부 후반 공연이 취소되었어요. 무척 안타까웠어요. 전염병 앞에서 인간은 참으로 무력하다는 걸 새삼 느꼈고요. 당시에 온라인 공연이나 비대면 공연, 영상화 작업 등 연극과 관객이 만나는 새로운 방식들이 많이 등장했어요. 하지만 저는 오히려 반대로 연극의 오리지널리티에 대해 생각했어요. 코로나로 인해 모임의 가치가 달라졌지만, 우리는 불편을 감수하고서라도 만나고 모이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그 속에서 우리가 누리는 가치는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겠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이럴 때일수록 내가 할 수 있는 것, 본연의 연극 작업에 더 집중해야겠다고 다짐했죠.
최근 OLAM이라는 플랫폼을 설립했어요. 일단 이름이 특이하네요. 무슨 뜻인가요?
OLAM은 히브리어로 시간상으로는 순간에서 영원까지, 그리고 공간적으로는 아주 작은 것에서 무한까지를 의미하는 포괄적인 개념이에요. 단순히 말하면 시간과 공간적으로 무한한, 우리의 상상의 한계를 뛰어넘는 거대함을 나타내는 단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비슷한 맥락으로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절에 “작은 모래알 하나에서 우주를 만날 수 있고 들에 핀 꽃 한 송이에서 영원을 감지할 수 있다”라는 말이 있는데, 저는 왠지 연극이 그런 것 같아요. 아주 작은 연극일지언정 거기서 하는 이야기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우리의 상상 너머 저 무한대까지 확장될 수 있으니까요.
OLAM은 어떤 비전을 갖고 있는지 궁금해요.
제가 만들었지만 아직 정체성이 모호해요. 여러 예술가와 제작자가 유연하게 만나고 헤어질 수 있는 거점으로 만들어놓긴 했는데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나 정체성은 없어요. (웃음) 앞으로도 정체성을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 중이에요. 다만, OLAM을 통해 그동안 작업한 작품에 대한 기록을 정리하려는 계획은 있어요. 전에 연출에 대한 강의를 하는데 마땅히 쓸 만한 자료가 없더라고요.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대본이 상당히 두꺼웠는데, 그걸 공연한 사람들이 남긴 코멘터리북이 대본 못지않게 두꺼웠어요. 거기에는 몇 년도에 어떤 역할을 맡았던 배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초연과 재연 때 바뀐 부분은 무엇인지 등 방대한 코멘터리가 남아있어서 작업할 때 많이 도움이 됐어요. 저도 그렇게 자료를 남겨놓으면 이후에 그 작품을 작업하는 후배들에게도 참고가 될 것 같더라고요. 또 강연이나 수업할 때도 더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고요. 그래서 배우와 연출이 공부하고 토론한 기록을 좀 많이 남겨놓으려고요.
지금까지 주로 연극 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해 왔는데 앞으로 뮤지컬 연출에 도전해 보고 싶은 생각은 없나요?
전에 뮤지컬 작업을 해본 적이 있어요. 뮤지컬 연출이 참 어렵더라고요. 하지만 그때 뮤지컬이 정말 놀랍고 경이로운 장르란 생각을 했어요. 자신의 생각을 노래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게 너무 멋지더라고요. 나중에 제가 더 준비가 많이 되고 함께하는 창작진과 더 많은 것들을 나눌 수 있게 되면 꼭 다시 해보고 싶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29호 2023년 10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