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대 입학을 노리는 영국 고등학생들과 그들에게 문학과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들의 이야기를 그린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 이 작품이 국내에서 일곱 번의 공연을 올리는 동안 안재영은 여섯 번의 무대에 함께했다. 처음에는 학생 스크립스로, 2020년부터는 교사 어윈으로. 초연 10주년을 맞은 올해는 스크립스와 어윈을 번갈아 연기하며 작품과 함께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고 있다.
대본 속 인물과 손잡는 순간
10주년 공연에서 스크립스와 어윈을 번갈아 연기한다고 들었어요. 오랜만에 다시 스크립스를 연기하기로 결심한 이유가 뭐예요?
오래전에 제작사 노네임씨어터컴퍼니 대표님이 배우들을 모아놓고 사진을 한 장 보여주셨어요. 2004년 <히스토리 보이즈> 영국 초연에 출연했던 배우들이 2013년 다시 뭉쳐 극 중 프랑스어 수업 장면을 공연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었죠. <히스토리 보이즈> 초연과 영화에 모두 출연했던 데이킨 역의 배우 도미닉 쿠퍼가 턱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얼굴로 바지를 벗고 누워 있더라고요. (웃음) 그 사진을 보면서 우리도 10주년에 다시 모여 공연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나누었어요. 그런데 정말로 <히스토리 보이즈>가 많은 사랑을 받아 10주년 공연을 하게 된 거예요. 대표님께 초연 때 연기한 스크립스 역을 다시 맡아달라는 연락을 받고 기쁜 마음으로 하겠다고 했어요. 과거에 우리가 꿈꾸었던 무대를 실현하게 되다니 가슴이 벅차더라고요. ‘내가 이 작품의 역사 속 한 페이지가 되었구나’라는 생각도 들고요. 오랜만에 스크립스를 연기하는 게 부담스럽긴 하지만, 이 작품을 사랑하는 관객분들에게 소중한 추억을 되살릴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라요.
2013년 초연 당시 연기한 스크립스는 신인 배우 안재영의 이름을 알리는 데 큰 몫을 한 역할이죠. 여러 등장인물 가운데 처음부터 스크립스 역에 끌렸나요?
초연에 학생으로 출연한 저와 김찬호, 황호진, 이재균 배우는 이 작품에 앞서 2012년 뮤지컬해븐이 제작한 창작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에 출연했어요. (편집자주: 노네임씨어터컴퍼니는 뮤지컬 제작사 뮤지컬해븐이 2010년 설립한 연극 제작사다.) <번지점프를 하다> 공연을 할 때 대표님이 저희한테 <히스토리 보이즈> 영화 DVD를 건네면서 말씀하셨죠. “이 작품을 연극으로 올릴 예정인데 맡고 싶은 역할이 있으면 얘기해 봐.” 사실 그때 영화를 보고 가장 마음이 갔던 역할은 어윈과 포스너였어요. 하지만 대표님은 제가 어윈을 하기에는 너무 어려 보이고, 포스너를 하기에는 너무 어른스러워 보인다고 하시더라고요. 대신 제안하신 역할이 스크립스였어요. 스크립스가 연극에서는 내레이션도 많고, 피아노도 치고, 친구들을 아우르는 중요한 역할이라면서요. 저야 당시 신인이었으니 어떤 역할이든 맡겨주시면 감사했죠. 그런데 대표님이 절 속인 게 한 가지 있어요. 분명히 피아노 반주를 3곡만 치면 된다고 들었는데 대본을 받아보니 10곡 정도 쳐야 하더라고요! (웃음)
이 작품에 참여하기 전에는 피아노를 전혀 못 쳤다면서요?
네, 지금 돌이켜 보면 피아노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으니까 멋모르고 하겠다고 덤볐던 것 같아요. 오디션을 보고 캐스팅이 확정된 다음 초등학생들이 다니는 동네 피아노 학원에 가서 바이엘부터 배우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기초부터 차근차근 실력을 쌓을 만큼 연습에 주어진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소연 음악감독님께 공연에 나오는 곡만 따로 집중 레슨을 받았죠. 감독님이 악보에 계이름과 함께 손가락 번호를 적어주시면 나중에 그걸 보면서 혼자 연습했어요. 신인인 저에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좋은 작품, 좋은 역할이라고 생각해서 죽기 살기로 연습했죠.
대본에 언급되는 수많은 문학 작품과 역사적 사건을 공부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우리나라가 아닌 유럽의 문학과 역사를 다루다 보니 낯설고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초연을 올리기 서너 달 전부터 모든 배우가 모여서 스터디를 했어요. 극 중 학생들이 명문대 출신 교사 어윈을 초빙해서 수업을 받는 것처럼, 저희도 서울대 출신 선생님을 모셔 와서 인문학과 불어 수업을 받았죠. 요즘은 그렇게 일찍부터 공연을 준비하는 일이 별로 없는데, 초연 당시 학생 역할로 참여한 배우들이 대부분 20대 신인 배우라서 다들 열정이 넘쳤어요. 이 작품 말고는 달리 하는 일이 없다 보니 여가 시간에 매일 함께 어울려 놀기도 했고요. 그러면서 극 중 헥터가 말하는 것처럼 배우들 사이에 ‘동맹 의식’이 싹텄어요.
스크립스는 친구인 데이킨과 포스너가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면서도, 어느 한쪽 편에 서지 않고 양쪽의 이야기를 모두 귀담아들어 줘요. 이런 점이 스크립스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 같은데, 재영 씨가 바라보는 스크립스는 어떤 인물인가요?
나이를 먹으면서 제가 스크립스를 바라보는 방식도 조금 바뀌었는데, 지금은 스크립스가 전형적인 ‘영국 신사’처럼 느껴져요. 고지식할 만큼 도리를 중시하는 인물이랄까요. 기본적으로 남을 배려하는 성향이기 때문에 모두에게 우호적이고 중립적인 인물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은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주관이 확고한 편이에요. 그래서 자기와 가까운 사이라도 무조건 편들어 주지 않는 거죠. 극 중에서 스크립스가 홀로코스트라는 인류사 최악의 비극을 다른 논제와 똑같이 취급하는 교사 어윈을 비판하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저는 거기서 스크립스가 어윈에게 맞서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가 자기와 친한 유대인 학생 포스너를 감싸기 위해서는 아니라고 봐요. ‘이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에 어긋난다’는 본인의 도덕관에 근거해서 화를 내는 거죠.
어윈은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고 싶으면 고정 관념을 뒤집고 색다른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보라고 가르쳐요. 스크립스는 그런 어윈의 교육 방식이 진실을 무시한다고 여겨 못마땅해하고요. 두 인물의 관점이 정반대인데, 스크립스에서 어윈으로 역할을 바꿔 작품에 임해보니 어떻던가요?
어윈의 관점에서 이 작품을 바라보는 건 꽤 재미있었어요. 스크립스를 연기할 때는 어윈이 악역처럼 느껴졌는데, 어윈을 연기하면서 그의 논리에도 납득할 만한 지점이 있다는 걸 알게 됐죠. 작가 앨런 베넷이 참 대단한 게, 다양한 관점에서 작품을 바라볼 수 있도록 대본 안에 여러 가지 장치를 심어뒀어요. 어윈의 자유로운 사고방식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보여주면서도 그에 뒤따르는 책임의 문제를 짚고 넘어가요. 또 다른 교사 린톳의 입을 빌려 전인교육을 추구하는 헥터를 비판하고, 역사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얼마나 무시당해 왔는지 지적하기도 하고요. 어떤 인물의 시각을 따라가도 ‘너 이거 잊고 있었지?’ 하고 작가가 뒤통수를 치는 부분이 있다는 게 이 작품의 묘미예요.
어윈은 똑똑하고 대담해 보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진짜 학력과 성 지향성을 감추고 있는 인물이기도 해요. 어윈의 ‘허정함’을 이해하는 데 실마리가 되었던 대목이 있나요?
저는 어윈이 자기 약점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남들 앞에서 과장되게 빛나는 모습을 꾸며낸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가 어윈과 비슷한 면을 지니고 있죠. 1막에는 어윈의 사회적 가면이 무너지는 장면이 거의 없는데, 딱 한 번 그의 솔직한 내면이 드러나는 순간이 있어요. 학생들이 어윈에게 젊고 똑똑한 명문대 졸업생이 여긴 왜 왔느냐, 잠깐 시간 떼우러 온 거냐고 묻자 “그런 거면 좋겠다”라고 씁쓸하게 대답하는 대목이요. 흘리듯이 뱉는 한 마디이지만, 이게 바로 어윈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는 중요한 대사라고 생각해요. 나중에 영화를 다시 보니까 같은 장면에서 어윈 역의 배우가 아예 하늘을 보면서 그 대사를 치더라고요. 이 배우도 나와 같은 해석을 했구나 싶어서 반가웠어요. 이렇게 대본 속에서 인물을 잘 표현할 수 있는 포인트를 찾아내는 게 연기의 재미죠.
배우가 객석에 넘겨주는 것
극 중에서 가정법에 대한 얘기가 여러 번 나오잖아요. 그간의 배우 생활을 돌아봤을 때 ‘만약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떘을까’ 하는 미련이 남는 순간이 있나요?
미신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저는 작품과의 만남은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그때 이 작품이 아니라 다른 작품을 선택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아예 안 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이 작품과 만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어요. 당장은 미련이 남을지 몰라도 이 작품에서 맺은 인연이 앞으로 또 어떤 인연으로 이어질지 모르니까요. 올해 <여신님이 보고 계셔>와 <히스토리 보이즈>의 10주년 기념 공연에 연달아 참여하면서 자연스레 제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게 되었는데, 전반적으로 잘 해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10년 전의 저는 쉬지 않고 무대에 설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었거든요. 그런데 실제로 지난 10년 동안 길게 쉰 적이 거의 없더라고요. 그동안 제가 배우로서 얼마나 성장했는지 몰라도 그 꿈 하나만큼은 이룬 거죠. 앞으로의 10년도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어요.
쉬지 않고 활동하다 보면 지칠 때도 있을 텐데, 그때는 어떤 식으로 에너지를 충전해요?
저는 여행을 다녀오면 마음이 재정비되더라고요. 최근에는 <어린왕자> 공연을 마치고 오키나와에 다녀왔어요. 보통 오키나와에 가면 관광 명소인 대형 수족관에 간다는데, 저는 계획 없이 떠나는 걸 좋아해서 그냥 차를 몰고 가다가 예쁜 바다가 보일 때마다 내려서 해수욕을 즐겼어요. 아름다운 바다색을 잔뜩 눈에 담고 왔죠. 이렇게 실컷 여행을 하고 나면 다시 무대가 그리워져요. 일상에서의 행복과 무대에서의 행복은 별개라고 생각하지만, 일상이 행복해야 무대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배우가 되길 잘했다고 느낄 때는 언제예요?
관객분들이 제 공연을 보고 즐거웠다, 힘을 얻었다는 얘기를 해주실 때 뿌듯해요. 솔직히 연기는 제가 좋아서 하는 거지,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마음으로 하는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 제가 행복해서 한 일이 다른 사람까지 행복하게 만든다니 얼마나 감사해요. 아마도 제가 행복한 마음으로 무대에 서기 때문에 관객도 그런 저에게서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어가는 게 아닐까 싶어요. 만약 제가 하기 싫은 연기를 억지로 하고 있다면 관객도 부정적인 에너지를 느끼지 않을까요? 그래서 저는 스스로 행복한 배우가 되려고 노력해요.
어윈은 어떤 식으로 말해야 상대의 흥미를 끌어낼 수 있는지 잘 아는 인물이잖아요. 배우 역시 무대에 오래 서다 보면 어떻게 연기해야 관객으로부터 즉각적인 호응을 끌어낼 수 있는지 알게 될 것 같은데, 그런 유혹에 빠진 적이 있나요?
늘 유혹의 순간이 찾아오죠. 요즘은 같은 작품을 여러 번 반복해서 관람하는 관객이 많잖아요. 그걸 아는 배우 입장에서는 ‘어차피 뭔지 다 알 텐데 오늘은 대충 넘어가도 되겠지’ 혹은 ‘오늘은 어제와 다른 모습을 보여줘서 관객을 놀라게 만들어야지’라는 유혹에 빠지기 쉬워요. 하지만 그럴수록 늘 처음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무대에 서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제가 요리사이고 관객이 손님이라고 쳐요. 그런데 어제 온 손님이 오늘 또 왔다고 음식을 대충 만들거나 제멋대로 재료를 바꿔도 될까요? 당연히 안 되죠. 새로운 손님을 맞을 때와 똑같이 레시피대로 음식을 만들어 내놓아야 해요. 물론 기본 레시피 안에서 더 깊은 맛을 내보려는 시도를 할 수는 있겠지만, 그때에도 심사숙고가 필요해요. 잘못하면 맛이 나빠질 수 있으니까요. 마찬가지로 배우도 언제나 오늘이 첫 공연인 것처럼 최선을 다해 약속된 연기를 선보여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요. 결국 관객이 배우에게서 가장 보고 싶어 하는 모습도 그런 게 아닐까요?
그동안 배우로 살아오면서 지키고자 했던 신조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배우로 오래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주 생각하는데, 그러려면 무엇보다 고여 있지 말아야 할 것 같아요. 어떤 분야든 능숙해졌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위험해요. 악착같이 파고드는 마음이 사라지고 ‘이 정도면 됐어’ 하고 멈추게 되니까요. <히스토리 보이즈>도 어느덧 국내에서 초연을 올린 지 10년이 됐고 영국에서는 그보다 더 오래전에 만들어진 작품이잖아요. 그럼에도 이 이야기가 지금 다시 공연되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 작품이 지닌 본질적인 의미는 무엇인지 끊임없이 탐구하고 고민하는 게 배우로서 제가 놓지 말아야 할 태도라고 생각해요. 그래야 무대에서 저 스스로 당당할 수 있으니까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26호 2023년 7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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