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흐 헤스트>에서 인생의 갈림길을 눈앞에 두고 고민에 빠진 향안에게 동림은 이렇게 말한다.
“너의 느낌표를 믿어.”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기보다, 지금의 자신이 내린 선택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의미다. 최수진은 <라흐 헤스트>를 통해 새로운 느낌표를 얻었다. 자신이 무대 위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다시금 깨닫게 된 것이다.
조금의 의심도 없이
<라흐 헤스트> 공연을 앞두고 잠시 파리 여행을 다녀왔다고요. 오랜만에 재충전의 시간을 보냈나요?
저는 해외여행을 하다 보면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어느 나라에 가도 삶의 모양만 다를 뿐 다들 똑같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더라고요. 그러면 왠지 위로받는 느낌이 들어서 마음이 가벼워져요. 이번에도 그동안 바쁘게 살아오면서 마음속에 담아둔 여러 고민을 털어내고 올 수 있었어요. 마음 한편으로는 ‘여기 또 오려면 한국 가서 더 열심히 일해야겠다!’ 이런 생각도 했고요. (웃음)
마침 수진 씨가 <라흐 헤스트>에서 연기하게 된 김향안 역시 삶의 일부분을 파리에서 보냈죠. 파리에서의 시간이 조금 더 특별하게 느껴졌을 것 같아요.
저는 전시회에서 그림을 볼 때면 늘 어렵기만 했어요. 어떤 기법으로 그렸느니, 빛을 어떻게 표현했느니…. 그런 건 저와 거리가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그런 제가 화가이자 미술 평론가인 김향안을 연기하게 되었으니, 이번 파리 여행에서 미술관을 갔을 때는 그림을 조금 더 유심히 바라보려고 노력했어요. 그림은 어렵다는 편견을 접어두고, 열린 마음으로 오랜 시간 들여다보니까 새로운 매력이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그림 하나하나에 화가가 보여주고 싶은 세계가 분명하게 녹아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 <라흐 헤스트> 연습을 하는데, 파리에서의 기억이 떠올라 평생 예술과 함께했던 향안의 삶에 조금 더 빨리 다가갈 수 있었어요. 정말 오롯이 휴식을 위해 다녀온 여행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배우로서 자양분을 쌓는 시간이 되었네요. 배우의 삶은 어쩔 수 없나 봐요. (웃음)
<라흐 헤스트>는 이번 시즌에 처음으로 참여하게 됐어요. 작품을 만난 소감이 어떤가요?
대본을 처음 읽었을 때, 작품 전반에 흐르는 따뜻한 위로의 메시지가 마음에 확 와닿았어요. 연습을 하고, 무대에 올라보니 그 따뜻함이 더욱 크게 느껴져서 ‘정말 좋은 작품을 만났구나’ 싶고요. 연습을 시작하기 전, 초연부터 향안을 연기하고 있는 제이민 배우에게 <라흐 헤스트>에 출연하게 되었다고 말하니까 ‘하나도 안 힘든 작품’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연습 때는 아무래도 생각할 거리도 많고, 몸에 익혀야 할 동선도 많아서 되게 힘들었거든요. ‘이렇게 힘든데 왜 안 힘들다고 한 거지?’ 의문이 들었는데, 첫 공연을 마친 후에 그 이유를 알게 됐어요. 분명히 감정도, 체력도 모두 쏟아부었는데 하나도 안 힘든 거예요! 생각해 보니, 연기를 하면서 내면이 소모되는 작품이 아니라 오히려 점점 채워지는 작품이라서 그렇더라고요. 그때 ‘공연이 진행되는 두 달 동안, 나 정말 행복하게 공연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향안은 수필가이자 미술 평론가, 화가로 활동하고, 두 천재의 든든한 후원자로서 평생을 예술과 함께한 인물이잖아요. 여성 예술가의 삶을 무대에서 살아보게 되었다는 점이 뜻깊을 것 같아요.
<라흐 헤스트>를 본 후 김향안의 예술가적인 면모가 아니라, 이상과 김환기의 조력자로서의 삶을 중심으로 보여주는 것에 아쉬움을 느끼는 분들이 계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저는 이 작품에서 김향안과 동반자와의 ‘관계’에 집중했어요. <라흐 헤스트>는 ‘향안이 동반자와의 삶 속에서 어떻게 주도적으로 자신만의 예술을 했는가’가 큰 줄기를 차지하거든요. 그래서 향안이 단순히 상대방을 서포트하는 모습이 아닌, 동림과 이상, 향안과 환기가 서로에게 영향을 받아서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관객분들도 향안이 어떤 선택을 했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갔는지, 그래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실존 인물의 삶을 무대에서 그려낼 때 특별히 신경 쓰는 부분이 있나요?
<사의찬미>에서 윤심덕을 연기했을 때, 그의 삶을 꼼꼼히 찾아봤어요. 책도 읽고, 여러 자료도 찾아보고... 물론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독이 되기도 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하고 다른 부분이 정말 많았거든요. 외적인 부분부터 말과 행동까지 저와 거리가 멀었어요. 실존 인물이기 때문에 실제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저와 맞닿은 부분이 많지 않으니까 오히려 캐릭터를 구축하는 게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인물의 외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성정, 가치관에 집중하자고 마음먹었죠. 이번에도 김향안 선생님이 쓰신 글을 읽어보고, 김환기 선생님과의 에피소드도 여럿 찾아보긴 했지만,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보다는 그분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오셨는지에 더욱 집중하려고 했어요.
극 중 향안의 삶은 생의 마지막 순간부터 역순으로 진행돼요. 일반적인 작품에서는 감정을 쌓아가는 과정을 표현했다면, <라흐 헤스트>에서는 감정을 한 겹씩 덜어내는 과정을 보여줘야 하는 셈이잖아요. 향안의 삶을 연기하기 위해 여러 고민이 많았겠죠?
의도적으로 외워야 하는 장면이 많았어요. 기존 작품에서는 사건의 흐름대로 연기하는 걸로 충분했다면, 이 작품에서는 ‘이 사건 전에 무슨 사건이 있었지?’를 계속 생각해야 하니까요. 그렇게 향안의 시간을 계속 반대로 되짚어야 한다는 게 어려웠어요. 다양한 연령대의 모습을 표현해야 한다는 점도 쉽지 않았고요. 무엇보다 향안의 시간이 역순으로 흐르는 과정에서 과거의 자신인 ‘동림’을 만나잖아요. 처음에는 저도 향안과 동림의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관객분들에게 보여드려야 할지 고민이 많았어요. 관객을 설득하려면, 제가 먼저 이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해야 하니까요. 저 스스로 이들의 이야기에 물음표가 있는 상태로 무대에 서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대본을 수없이 반복해서 읽고, 동료 배우들과 계속해서 대화를 나눴어요. 이런저런 고민 끝에 결국 80대가 된 향안이 과거 자신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재생하는 중이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과거를 회상하고, 그때의 내게 말을 걸기 마련이니까요. 그러니까 향안과 동림이 마주하는 장면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어요. 그렇게 고민을 거듭한 덕분에 제게 <라흐 헤스트>는 무대에서 단 하나의 의심도 없이 연기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확신이 있어요.
<라흐 헤스트>가 막을 내릴 때까지 지키고 싶은 마음가짐이 있을까요?
향안이 어떤 고민이든 털어놓을 수 있을 만큼 넓은 마음을 지닌 인물로 보였으면 좋겠어요. ‘저런 사람과 함께한다면, 나도 꾸밈없이 나 자신으로 존재해도 괜찮겠다’고 느껴지는 따뜻한 사람이요. 저는 그동안 향안처럼 타인을 포용할 줄 아는 사람으로 살아오지 못했다고 생각하거든요. 상대방을 위해 자신의 삶을 기꺼이 내어주는 향안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왜 누군가에게 저런 사람이 되어주지 못했을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도 작품으로나마 향안처럼 넓은 마음을 지닌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노력할 거예요.
내 인생의 한 페이지
향안이 동림을 만났듯이, 과거의 나를 만난다면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요?
아무 조언도 하지 않을 것 같아요. 무슨 말을 해도 그때의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테니까요. (웃음) 향안도 동림에게 다른 선택을 하라고 이야기하지 않아요. 그저 원래 네가 하고 싶었던 선택을 하라고 응원해 주죠. “슬픈 기억 속에 널 가두지 마”라는 말도, 동림이 마냥 슬픔 속에 남아 있지 않을 걸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한 말일 거고요. 그러니 저도 과거의 나를 만나게 된다면, 그냥 응원만 해주고 싶어요.
앞서 말했듯이 <라흐 헤스트>는 향안과 동림, 즉 자기 자신이 스스로의 응원과 위로가 되어주는 작품이에요. 수진 씨는 스스로에게 어떤 사람이에요?
세상에서 나를 가장 안 믿는 사람. 계속 스스로를 의심하면서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항상 인지하려고 해요. 나 자신에게 엄격한 편이죠. 대신 최선을 다하는 제 모습은 믿어요. 그래서 어떤 일을 해야 할 때, 스스로에게 ‘너는 그래도 최선을 다할 거지? 그러니까 빨리 해’라고 등을 떠밀어요. (웃음)
향안과 동림이 새로운 삶을 앞두고 주저할 때, 서로에게 “너의 느낌표를 믿어”라는 말을 건네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어떤 결정을 앞두고 자신의 선택에 대해 확신이 들지 않을 때, 어떻게 행동하나요?
결정을 내리기까지 시간이 충분한 경우에는 제 마음을 오래도록 들여다봐요. 제 마음에 집중해서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고 싶은지 곰곰이 생각하죠. 기도를 하면서 신에게 의지를 할 때도 있고요. 쉽게 결론이 내려지지 않을 때는 주변에서 조언을 구하기도 하는데, 결국에는 제 마음이 가는 대로 결정하게 되더라고요. 조언은 저의 판단을 위한 근거가 될 뿐, 조언만 믿고 결정을 내리지는 않아요.
그럼 지금까지 내린 결정 중 100% 확신이 들었던 결정이 있었나요?
고양이 ‘여름이’를 입양한 거요. 아는 분이 구조한 길고양이의 사진을 보자마자 머릿속에 100% 확신의 느낌표가 떠올랐어요. 허름한 박스 안에서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사진이었는데, 자기를 빨리 데려가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 아직도 기억나요. 조금만 늦었어도 생명이 위험할 뻔한 상황이었던 터라, 서둘러서 데려오길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최근에는 독립을 하게 돼서 또 다른 지인이 구조한 길고양이 두 마리를 입양했어요. 이 아이들을 데려올 때도 머릿속에 느낌표가 떠올랐죠. 하루하루 건강하게 크는 ‘제이’, ‘제노’를 보면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향안이 평생 자신의 삶을 수첩에 기록했듯이, 배우의 삶은 그때그때 다른 작품으로 기록되잖아요. 향안이 수첩을 한 장씩 넘기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본 것처럼, 수진 씨가 삶을 회상할 때 어떤 작품이 유독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라흐 헤스트>요. 물론 여태까지 했던 모든 작품이 의미가 있고, 매 순간이 기억에 남지만 <라흐 헤스트>는 제가 무대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깨닫게 해줬거든요. 배우로서 방향성을 제시해 준 작품이기도 하고요. 이 작품 덕분에 내가 배우로서 이런 이야기가 하고 싶었구나 다시금 깨닫게 됐죠. 사실 그동안은 제가 가지고 있는 성향과 반대되는 역할을 많이 만났어요. ‘어떻게 하면 최수진이 안 보일까’ 고민하게 만드는 캐릭터들이요. 그런데 김향안은 최수진과 다른 면이 분명히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어떤 옷을 덧입어서 저를 숨겨야 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좋아요.
벌써 15년 가까이 무대에 서고 있어요.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모든 순간 잘 해내지는 못했어요. 분명히. 칭찬해 주고 싶은 순간도 많지만 왜 그렇게 했을까 의문이 드는 순간도 많죠. 하지만 시행착오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과거의 저는, 아마도 그때의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을 테니까요. 앞으로도 여러 시행착오가 있을 테고, 스스로에게 확신이 없는 날이 많겠지만 스스로를 너그럽게 용서하면서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또, 무대에서 매 순간 제 필요를 증명하고 싶어요. 관객분들에게도, 저 자신에게도요. 더 오래오래 무대에 서고 싶거든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26호 2023년 7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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