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인종 차별이 심각했던 미국 남부 소도시를 배경으로 한 <멤피스>가 국내 초연한다. 음악에도 흑백의 차별이 존재하던 그 시절, 흑인 음악을 사랑했던 백인 DJ 휴이가 음악으로 자신의 삶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이야기다. 휴이 역할로 <멤피스> 무대에 오르는 고은성은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 찬 휴이에게서 자신을 발견했다. 음악으로 세상을 바꾼 휴이와 뮤지컬로 삶이 바뀐 고은성. 두 사람은 무대에서 어떤 이야기를 펼쳐낼까.
“배우로서 충실히 보낸 하루가 제가 성장하는 시간이더라고요”
지난 6월 <데스노트>가 막을 내렸어요. 작년과 올해 공연을 합치면 6개월 정도 공연한 셈인데, 긴 공연을 마치는 소감이 어때요? 아쉽지는 않나요?
어떤 작품이든 마지막에는 아쉬움이 남기 마련이에요. 인물과 작품 속으로 좀 더 파고들어 가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하는 데서 오는 아쉬움이죠. 그런 면에서 <데스노트>는 다른 작품에 비해 아쉬움은 덜해요. 긴 시간 공연하면서 제가 원하는 만큼 인물과 작품에 몰입했다고 생각하거든요. 평소보다 많은 공연을 소화하다 보니 무대를 보는 시각도 달라졌어요. 덕분에 어떻게 무대에 오르고,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어요. 여러모로 제겐 아주 유익하고, 재미있는 시간이었어요. 하지만 공연하는 동안에는 체력적으로, 감정적으로 너무 힘들었어요. 매일매일 산 하나를 오르는 기분이었죠. 등산은 하다 보면 익숙해지기라도 하지만 공연은 절대 아니에요. 저는 매번 공연이 다 다르다고 생각하며 무대에 올라요. 실제로 무대에 오르면 하루도 같은 날이 없고요. 객석의 분위기, 상대 배우와의 호흡, 저의 컨디션이 다르니까 매일 같은 공연을 해도 매일 다른 공연이 돼요. 그래서 극장에 갈 때마다 양가감정을 느껴요. 분명 힘들 거라는 걸 잘 알아서 너무 두렵지만, 동시에 어떤 무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까 설레죠.
힘들 걸 알기 때문에 두렵다는 말이 공감되네요. 그래도 두려움을 안고 무대에 오를 수는 없잖아요. 조금이나마 두려움을 극복하는 자신만의 노하우 같은 게 있나요?
뾰족한 수가 없어요. 지금까지 두려움을 이기고 무대에 섰던 나를 믿고, 오늘도 해낼 수 있다고 믿는 수밖에요. 그리고 매일 공연을 마친 후에 오늘도 해냈다는 데에 위안을 얻어요. 그러면서 저 자신에 대한 믿음도 조금씩 쌓아가죠. 하지만 해냈다는 것과 공연의 만족도는 별개예요. 매일 공연이 만족스러울 정도로 잘 풀리면 너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잖아요. 하지만 만족스러우면 만족스러운 대로,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배우는 게 있더라고요. 두려움을 극복하고 무대에 서는 순간부터 무대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내려오는 순간까지 배우로서 충실히 보낸 하루가 제가 성장하는 시간이더라고요. 재미있는 건 공연하는 동안에는 내가 배우로서 나아지고 있다는 걸 모른다는 거예요. 끝나고 돌아보면 열심히 보낸 하루하루가 차곡차곡 쌓여서 더 나은 나를 만든 게 보여요. 그래서 요즘은 ‘오늘도 열심히 살자’라는 생각을 많이 해요.
군대를 다녀온 후로 참여하는 작품의 성격이 확연히 달라졌더라고요. 전에는 중소극장 뮤지컬이 많은 편이었는데, 요즘은 대극장 라이선스 뮤지컬에 연달아 참여하고 있어요. 혹시 그사이 작품 선택의 기준이 달라졌나요?
작품 선택 기준은 항상 똑같아요. 저는 제가 잘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드는 작품을 선택해요. 대본을 보거나 하다못해 작품 소개를 들을 때 내가 잘할 수 있겠다는 ‘촉’이 올 때가 있어요. 사람은 생각한 대로 움직인다고 말하잖아요. 잘할 수 있다는 확신이 나를 움직이게 하고, 결과적으로는 관객도 움직일 수 있더라고요. 운 좋게 많은 관객에게 사랑받는 작품에 연달아 참여하게 되어서 감사하고 기쁘지만, 마냥 들뜨지 않으려고 항상 경계해요. 예전의 저라면 스스로 잘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런 기회가 왔을 때 무조건 반겼을 거예요. 하지만 군대에 다녀온 후로 스스로를 좀 더 객관적으로 보게 됐어요. 그래서 이런 좋은 기회가 왔을 때도 마냥 기뻐하기보다는 내가 과연 이 기회를 잡을 준비가 되었는지, 이 기회를 잡음으로써 내가 어떻게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을지 한 번 더 생각하게 됐어요. 그래서 이전보다 작품을 선택할 때 조금 더 신중해진 것 같아요.
군 생활을 할 때, 생각이 바뀔 정도로 특별한 일이 있었나요?
자아가 무너지는 경험을 했죠. (웃음) 군대에서는 모두가 공평하잖아요.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고. 납득이 안 되는 일이나 불합리한 일을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해야 한다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일을 경험하면서, 내가 알고 있던 세상과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쉽게 말하자면, 모든 일에는 내가 보지 못한 다른 면이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 거죠. 그다음부터 어떤 일이든 내가 못 보고 지나친 것은 없는지 다시 한번 살피게 됐어요. 일이 잘 풀리거나 좋은 기회가 와도 한 번 더 생각해 봐요. 내가 정말 잘 하고 있는 건가 혹시 놓친 건 없나 하고요. 가장 많이 바뀐 건 사람을 대하는 태도예요.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예전에 저는 내 할 일만 하는 사람이었어요. 나만 보고, 다른 사람은 보지 못했던 거죠. 군대에서 생각이 바뀌면서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보는 시야가 좀 넓어졌어요. 그러면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더 배려하고, 챙기게 됐어요. 신기하게도 내 할 일만 할 때보다 주변 사람을 챙기면서 일할 때 더 일이 잘 풀리고, 뮤지컬배우로서 실력도 늘더라고요.
삶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점에서, 군대에 다녀온 보람이 있겠는데요?
개인적으로는 군대에 잘 다녀왔다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들보다 군대에 늦게 갔는데, 왜 더 빨리 가지 않았을까 하고 후회가 될 정도예요. 빨리 군대에 갔다 왔더라면 뮤지컬을 지금보다 더 잘하고 있었을 텐데. 하하하. 그래도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제일 빠를 때라고 하잖아요. 조금 늦었지만, 앞으로 살아가는 데 정말 중요한 것을 배워서 다행이에요.
“휴이의 모습에서 저를 발견하기도 해요”
이번에 참여하는 작품은 국내 초연작인 <멤피스>예요. 어떤 점에 끌려서 작품에 참여하기로 결심했어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공연하고 있을 때, 출연 제안을 받았어요. 그때 휴이의 솔로곡인 ‘Memphis Lives in Me’를 들려주셨는데 솔직히 감이 안 오더라고요. (웃음) 고민을 좀 해보겠다고 말씀드리고, 어떤 작품인지 조금 더 찾아봤어요. 와, 근데 노래가 너무 신나고 좋은 거예요. 여기서부터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죠. 1950년대 미국의 인종 차별을 소재로 다룬 작품이지만, 논레플리카 공연이기 때문에 우리 정서에 맞춰 작품을 보완할 여지가 있다는 점도 끌렸어요. 이 점을 잘 활용하면, 재미있게 만들 수 있겠다는 촉이 왔거든요. 그런데 그 촉이 틀리지 않았어요. 얼마 전부터 본격적으로 연습을 시작했는데,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너무 재미있어요. 무대에 섰을 때를 상상하면 저절로 행복해질 정도예요.
본인이 생각하는 <멤피스>의 가장 큰 매력은 뭐예요? 신나는 노래에 마음이 끌렸다고 하는 걸 보면 음악에 매력을 느낀 것 같기도 한데요.
음악은 두말할 필요가 없어요. 로큰롤을 비롯해서 정말 신나는 음악이 많아서 듣는 것만으로도 즐겁거든요. 그런데 저는 음악만큼이나 작품이 가진 정서가 매력적이라고 느꼈어요. 인물들의 대화에 기본적으로 따뜻함이 깔려 있어요. 그 따뜻함이 등장인물들의 사랑과 성장 이야기에 맞물리면서 재미와 감동을 선사하죠. <멤피스>는 흑백 갈등의 역사에서 비롯된 이야기지만, 그런 역사를 몰라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재미와 감동이 있어요. 저는 그것만으로도 <멤피스>는 한 번쯤 볼만한 가치와 매력이 있는 뮤지컬이라고 생각해요.
이 작품에서 흑인 음악에 빠져서 그 음악을 알리는 데 앞장서는 백인 DJ 휴이 역할을 맡았어요. 음악에 굉장히 열정적인 인물이라는 점에서 은성 씨와 잘 어울리겠다 싶더라고요.
딱 저예요. 음악에 대한 동물적인 감각을 가진 것도 비슷해요. 그리고 음악을 대할 때 나타나는 순수함과 진실함. 이게 가장 닮았어요. 다른 점도 있어요. 저는 계획을 많이 세우는 편인데, 휴이는 그냥 막 저지르는 타입이에요. 아, 생각해 보니 20대의 고은성하고 비슷하네요. (웃음)
본인과 닮은 인물을 만나면, 캐릭터를 구축할 때 조금 더 수월한가요?
휴이는 반반인 것 같아요. 성격은 비슷하지만, 휴이의 역할이 저와는 정반대거든요. 휴이는 흑인 가수 펠리샤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녀의 노래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에요. 실제로 저는 휴이보다 펠리샤에 가까워요. 저도 누군가가 나의 재능을 알아봐 줘서 꿈을 이루게 되었으니까요. 실제와 반대 입장을 연기하는 거라서 재미있어요. 제가 뮤지컬배우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들을 떠올리면서 휴이를 어떻게 연기할지 고민 중이에요. 그런데 휴이의 모습에서 저를 발견하기도 해요. 처음에 펠리샤의 노래에 끌려서 흑인 클럽에 입장하는 휴이는 뮤지컬에 처음 빠져들었던 제 모습과 비슷해요. 그래서 흑인 클럽에 들어가는 휴이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누구보다 잘 알 것 같아요.
처음 뮤지컬에 빠졌을 때 그 느낌을 아직도 기억해요?
그럼요. 아주 정확하게 기억하는걸요. 처음에는 혼란스러웠어요. 너무 좋은데 좋아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거든요. 그런데 본능적으로 알았죠.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웃음) 처음에는 막연한 느낌이 점점 구체화되고 뚜렷해져요. 그리고 어느 순간 “이걸 해야 한다”라고 말하죠. 휴이가 충동적으로 클럽에 들어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저처럼 막연한 느낌이 구체화되어서 결국 실행하게 된 건 아닐까 생각해요. ‘The Music of My Soul’을 들어보면 휴이의 아빠가 흑인들을 멀리하라고 해요. 단순히 흑백 차별이 심하던 때여서 그렇게 말한 것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휴이가 어렸을 때부터 흑인 음악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그런 건 아니었을까 싶더라고요. 어린 휴이가 느꼈던 막연한 느낌이, 어른이 된 휴이가 클럽의 문을 열었을 때 비로소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된 거죠.
극 중 인물에 접근할 때 가장 먼저 하는 게 첫인상을 적는 거라고 들었어요. 휴이의 첫인상은 어땠나요?
가장 먼저 떠오른 이미지는 테네시주 멤피스에 사는 ‘촌놈’이었어요. 멤피스도 작은 도시는 아니겠지만 뉴욕 같은 대도시에 비하면 뭐 촌이죠. 휴이 노래 중에 “나는 그냥 테네시에서 온 한 남자야”라는 가사가 있어요. 그 느낌이 “나 그냥 여기 테네시 촌놈이야”라는 것 같더라고요.
그럼, 첫인상을 ‘테네시 촌놈’이라고 적었어요?
‘대전 촌놈’이라고 적어놨어요. ‘테네시 촌놈’을 제가 어떻게 연기하겠어요. 저는 테네시에 살아본 적이 없잖아요. 이건 그냥 이미지죠. 첫인상은 제가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골라서 써요. 20대 고은성이라든지, 아니면 내 주변에 비슷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 이름을 쓰죠. 그러면 그 단어를 봤을 때, 내가 어떻게 행동하고 표현할지 명확해지니까 연기도 명확하게 할 수 있어요. 또 이렇게 하면 뻔한 연기를 피하기도 좋아요.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피상적으로 표현하기 쉽죠. 예를 들어 ‘가정적인 남편’이라고 하면 사람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예요. 그러면 예측할 수 있는 연기를 하겠죠. 그런데 가정적인 남편을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인물이나 단어로 옮겨놓으면 일반적인 이미지와 다른 인물로 접근하기 수월하죠. 그러면 연기하는 저도 그렇고, 극을 보는 관객도 재미가 생겨요.
혹시 이전에 참여했던 작품이나 인물에서 <멤피스>를 연기하는 데 도움을 받은 게 있나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서 힌트를 얻은 부분이 있어요. 우리는 보통 백인, 흑인으로만 이야기하는데 사실 그 안에서 굉장히 다양한 인종으로 나뉘거든요. 백인들도 출신에 따라 차별받기도 하고요. 대본은 휴이의 출신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진 않아요. 그런데 글을 배우지 못했을 만큼 집이 가난했던 걸로 나오거든요. 그런 걸 보면 휴이도 우리가 생각하는 백인은 아닌 것 같아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토니도 백인이지만 폴란드계 이민자였잖아요. 요즘은 휴이를 토니처럼 이민자로 설정해 볼까 하는 생각도 해봐요. 그러면 휴이의 전사나 행동에 설득력이 더 생길 것 같거든요. 연습하면서 바뀔 순 있겠지만, 휴이가 어떤 사람인지 여러모로 생각해 보고 있어요.
인물을 만들 때 꽤 사소한 것까지 신경을 많이 쓰는군요. 평소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겠어요.
그게 제 일인 걸요! 잠들기 전까지 작품 생각만 해요. 워라밸이 지켜지지 않는 직업이에요. (웃음) 사소한 것까지 고민할수록 작품이 더 좋아지더라고요. 저는 관객에게 좋은 작품을 보여주고 싶어요. 제가 관객으로서 좋은 작품을 볼 때 정말 행복하거든요. 제 공연을 보는 관객들이 그런 행복을 가져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작품이 좋아진다면 뭔들 못 하겠어요. 제가 가진 걸 다 쏟아부어야죠.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그 말을 저는 믿어요”
인물 이야기로 되돌아가서 휴이나 은성 씨나 음악 때문에 삶이 달라졌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하지만 그 변화의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죠?
휴이에게 시대가 장벽이었다면, 저에게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제일 컸어요. 뮤지컬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죠. 뮤지컬배우가 되려면 노래든, 연기든 배워야 하는데 가정 형편이 너무 어려워서 부모님께 도움을 받을 수 없었어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어렵게 공부하고, 대학에 진학했죠. 스물두 살 때 <스프링 어웨이크닝>으로 뮤지컬에 데뷔했는데, 그때도 신림동 반지하에서 자취를 하면서 어렵게 살았고요. 말도 안 되게 어렵고 힘들 때도 많았는데, 신기하게도 한 번도 뮤지컬을 그만두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지금 생각해도 참 이상해요.
어린 나이에 뮤지컬에 데뷔했으니까 사실 마음만 먹으면 다른 쪽으로 진로를 바꿀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을 텐데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뮤지컬을 향해 직진한 이유가 뭐예요?
그냥 뮤지컬이 너무 좋았어요. 처음 뮤지컬을 알게 됐을 때는 잠을 못 잘 정도로 설렜어요. 매일 뮤지컬에 대해 알아가는 게 너무 좋았거든요. 근데 이걸 직업으로 삼을 수 있다니! 너무 좋았죠. 사실 20대 초반에 제가 처한 상황이 말도 안 되게 복잡했어요. 그런데도 뮤지컬을 목표로 두고 모든 걸 쉽게 생각했어요. 돈이 없으니까 아르바이트를 해야지.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에는 오디션을 못 보니까 주말에 몰아서 오디션을 봐야지. 복잡한 상황에서 복잡하게 생각해 봤자 답이 안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뮤지컬이라는 꿈을 단단하게 붙잡고 단순하게 생각했죠.
그래도 보이지 않는 꿈만 잡고 살아가기엔 현실이 지나치게 가혹할 때가 있잖아요. 포기는 아니더라도 마음이 흔들리던 순간도 없었어요?
<위키드> 오디션을 보기 전에 위기가 찾아왔어요. 뮤지컬을 너무 사랑하지만, 뮤지컬만 해서는 도저히 생활이 안 되는 거예요. 뮤지컬을 그만두겠다는 건 아니었고 잠시 멈추자 생각했어요. 현실적인 고민을 한참 하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려고 했어요.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마다 저를 도와주던 중학교 동창이 미국에 살고 있었어요. 그 친구 눈에도 제가 많이 딱해 보였겠죠. 그래도 좋아하는 일을 한다니까 뭐라고 말은 하지 못하고 있다가 도저히 안되겠는지 미국에 와서 같이 일을 하자고 하더라고요. 당장 먹고사는 게 힘드니까 그럼 돈을 벌어서 다시 뮤지컬에 도전해 보자 생각했어요. <위키드> 오디션을 보고 이민을 준비하러 미국으로 갔어요. 그런데 <위키드> 오디션에 합격했다는 연락이 온 거예요. 운명의 장난처럼요.
흔히 꿈을 이루고, 목표를 이루면 다 잘될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어요. 하지만 현실은 기대와 다를 때가 많죠. 목표를 이룬 후에 기대와 현실 사이의 괴리는 어떻게 극복했어요?
저는 여전히 꿈을 좇는 사람이지만, 뮤지컬배우가 되겠다는 목표는 굉장히 빠르게 이뤘어요. 뮤지컬배우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4년 만에 뮤지컬배우가 됐으니까요. 뮤지컬배우가 됐는데 별로 감흥이 없었어요. 이제 뮤지컬배우다! 근데 그게 뭐, 난 지금 집세, 핸드폰 요금 내기도 힘든데. 오히려 좌절의 연속이었어요. 내가 생각했던 것과 현실은 많이 달랐거든요. 그래서 뮤지컬배우가 되고 나서 오히려 더 좌절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뮤지컬을 했던 게 지금의 저를 만들었더라고요. 항상 주변에서는 이번만 하고 그만하라는데, 저는 딱 한 번만 더 해본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스팸어랏> <그리스>라는 기회가 왔고, 결국에는 <위키드>가 찾아오더라고요.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그 말을 저는 믿어요.
본인이 아직도 꿈을 좇는 사람이라고 했잖아요. 궁극적으로 어떤 꿈을 이루고 싶어요?
20대에 겪었던 여러 가지 경험들이 뮤지컬배우로서 방향을 잡게 해줬다면, 지금은 뮤지컬배우로서 저를 정립하는 시기인 것 같아요. 아직 해보지 못한 역할도 많고, 무대에서 보여드리지 못한 모습도 많아요. 제 머릿속에는 이런 작품을 만나서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구체적인 계획이 늘 있어요. 우선 그걸 차근차근 이뤄가면서 뮤지컬배우 고은성의 새로운 모습을 계속 보여드리고 싶어요. 태어나서 한 번도 질리지 않고 좋아하는 건 뮤지컬이 처음이에요. 아마 죽을 때까지 뮤지컬배우로 열심히 살아갈 거 같아요. 누구든 대한민국 뮤지컬배우 하면 떠올리는 사람 중에 한 명이 되고 싶어요. 그러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아요.
어떤 일을 한결같이 사랑할 수 있다는 게 참 대단해요.
세계적인 보디빌더 로니 콜먼이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자기는 어렸을 때 헬스장에 가서 운동하는 게 너무 기대됐대요. 그 기대감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왔다고 하더라고요. 지금은 은퇴하고 근육이 다 빠졌는데도 여전히 헬스장에 와서 운동하는 게 설렌대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나이가 들어도 뮤지컬에 대한 설렘과 기대로 살아가는 인생. 참 멋지지 않나요? 나중에 현역 뮤지컬배우에서 은퇴하더라도 뮤지컬에 대한 사랑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도 좋을 것 같아요. 어쩌면 뮤지컬과 평생 함께 살아가는 게 제 진짜 꿈일 수도 있겠네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26호 2023년 7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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