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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인터뷰] <은밀한 기쁨> 추상미, 보이지 않아도 느껴지는 [No.125]

글 |나윤정 사진 |심주호 2014-03-03 4,451

추상미가 돌아왔다. 2009년 <가을 소나타> 이후 5년 만의 연극 무대다. 우리가 그녀를 볼 수 없었던 사이에도 그녀의 시간은 끊임없이 돌아갔다. 아니 대중 앞에 섰던 시간보다 더욱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럼에도 그녀의 마음은 편안했단다. 인내 끝에 열매가 맺고 고통 뒤에 기쁨이 오듯,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 살았던 시간들이 그녀의 일상을 더욱 풍요롭게 일구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그 시간의 힘을 무대 위에 선명하게 담아낼 차례다.

 


하나씩 비밀을 풀어내듯
5년만의 무대 복귀를 기뻐하는 관객들이 많아요. 그런데 작품 제목도 <은밀한 기쁨>이네요. 참 매력적인 제목이라 생각했는데, 처음 들었을 때 어땠어요?
좋았어요. 은밀한 기쁨이 뭘까? 계속 생각하게 되잖아요. 그냥 기쁨이 아니라 은밀하게 느끼는 기쁨. 어떻게 보면 좋은 느낌을 주지만 한편으론 남들이 몰라야 되는 기쁨이니 음흉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묘했어요.

 

은밀함과 기쁨, 무엇보다 제목이 주는 아이러니한 느낌이 좋은 것 같아요.
쉽게 와 닿지 않지만 곱씹을수록 다양한 의미가 있는 단어들. 저도 그런 면이 좋아요. 넓게 보면 한 사람의 인생에도 아이러니가 있고, 세상은 아이러니를 담고 있는 큰 세계잖아요. 이 작품에도 아이러니가 많이 담겨 있고요. 그런데 고민이에요. 참 좋은 제목이지만, 헷갈리고 어렵거든요. 원제가 인데, 작가 데이비드 해어에 따르면 이것이 수도원에서 평생을 보낸 수녀들이 죽음을 맞이할 때,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환희를 의미한데요. 그것이 도대체 우리 작품과 무슨 상관일까? 연출님과 배우 모두가 수수께끼를 풀듯 제목을 해독하고 있죠(웃음).

 

막상 대본을 읽어보니 기쁨은 없더라고요. 특히 이사벨은 세상의 짐을 혼자 짊어진 사람처럼 보였죠.
어떻게 보면 쉬운데 어떻게 보면 굉장히 어려운 캐릭터죠. 처음엔 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이 여자는 뭘까?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은 선인과 악인의 관계가 전복돼 있어 흥미로워요. 파렴치하고 타락한 사람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이사벨처럼 정의로운 가치관을 지닌 사람이 부패한 다수에게 고통을 주게 되거든요. 계속 양심을 찌르고 진실을 들춰내니깐 사람들이 못 견디는 거에요. 그래서 결국 이사벨을 몰아내는 형국이 되는 거죠.

 

극은 아버지의 죽음에서부터 시작돼요. 그리고 아버지의 유산이라 할 수 있는 후처 캐서린을 묵묵히 떠안으며 이사벨의 삶에 균열이 진행 되죠. 아버지가 살아있었을 때, 이사벨의 삶은 어땠을까요?
현대인들은 성공을 향해가는 삶을 추구하는데, 왜 이사벨은 그와 반대되는 아빠의 모습이 좋았을까? 그 부분이 신기했어요. 그건 그녀가 아빠의 본성을 갖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아버지가 늘 옆에서 웃으며 항상 남을 도와야 한다고 이야기 했을 거고, 그 말들이 습관적으로 이사벨 몸에 배였을 거예요. 같은 DNA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아빠와 있을 때 가장 행복했겠죠.

 

한 인터뷰에서 누굴 만나든 항상 그의 본질을 생각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이사벨의 본질은 뭐라고 생각해요?
이사벨의 본질은 아버지에요. 아버지 같은 삶을 추구하거든요. 그녀의 아버지는 시골서점 주인이었어요. 40년 동안 핵무장에 반대하는 진보적인 분이셨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며 즐겁고 소박하게 살았죠. 하지만 정작 아버지는 자기 삶이 실패였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이사벨은 조숙했던 거죠. 어렸을 때부터 우리 아버지의 삶이 최고라고 여기고, 그렇게 살고 싶다는 꿈을 가진 거예요.

 

그렇다면 추상미의 본질은요?
저의 본질은 뭘까요?(웃음) 음… 신앙에 가까운 것 같아요. 책을 많이 읽는데, 그중에서 제일 많이 읽는 게 성경이에요. 성경에 나오는 많은 진리가 제 삶의 가치관이죠. 또 어떤 게 있을까? 본질을 추구하는 게 본질인가(웃음).… 무언가 나에게 의미가 있어야 해요. 남들이 싫다고 하는 것도 저에게 의미가 있으면 전 그 길을 택해요. 아이와 같이 있는 시간이 더 소중하고 의미 있다면, 다른 중요한 섭외가 들어와도 고사하는 거죠. 아무리 많은 돈을 벌게 해주는 일이더라도 제게 별 의미가 없다면 하지 않아요. 이런 점이 이사벨과 비슷한 것 같아요.

 

이사벨과 추상미의 싱크로율은 어느 정도인가요?
어떤 면에선 비슷한 점이 많은 거 같아요. 아버지와의 관계를 보면 싱크로율이 꽤 있는 것 같죠. 하지만 이사벨이 저보다 훨씬 품이 크고, 훌륭해요, 나보다 더 확장된 세계관으로 가치 있는 삶을 사는 캐릭터를 연기한다는 건 큰 희열이죠.

 

그런 점이 이 작품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됐나요?
예전에는 절대적으로 캐릭터를 보고 작품을 선택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작품을 더 보게 되더라고요. 이 작품은 어떤 의미가 있나? 정말 좋은 작품인가? 그런데 이 작품은 울림이 있었어요. 과거엔 뭔가 치유를 하고, 촌스럽지 않게 해피엔딩을 맺는 작품을 선호했죠. 물론 지금도 치유가 예술작품의 큰 기능이어야 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지만, 요즘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들도 관심이 가더라고요. 그것을 보고 절망할지언정 인간의 실존을 현미경 들여다보듯 리얼하게 보여주는 것이 위대한 작품이란 생각이 들어요.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이 좋았죠.

 

울림이 있다는 말에 공감이 가네요. 나와 이사벨의 가장 닮은 점과 가장 다른 점을 꼽아 본다면?
의미 있는 가치관을 추구한다는 점에선 같아요. 이성적으로 추구하려는 의지가 있는 것. 반면 다른 점은 전 사람들 앞에서 잘못을 적나라하게 들춰내는 말은 잘 못해요. 마음이 약해서 에둘러 말하는 편이죠. 솔직히 상대의 위선을 꼬집어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하지만 이사벨은 그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이죠.

 

 

나를 채운 편안함
극 중에선 모두가 이사벨의 생각을 궁금해 해요. 전 이 점이 배우 추상미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늘 생각에 잠긴 듯 보이거든요.

저는 제 모습을 잘 모르니깐. 저를 좋게 봐주시고, 그렇게 말씀해주는 분들이 종종 계세요. 그런데 실제로 그렇진 않아요. 저희 신랑에게 물어보면 적나라하게 이야기해줄 텐데(웃음).

 

그럼 오늘 아침에 일어나선 무슨 생각을 했어요? 
이 시간에 미용실을 가야 하나?(웃음) 실은 아침에 아기 때문에 뭔가를 생각할 정신이 없어요. 보통 아침에 차를 몰고 가면서 가스펠을 듣거든요. 그때 ‘오늘은 이렇게 보내야겠다’며 하루를 다짐해요. 그리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선 ‘난 진짜 연약하구나’ 생각하죠. 아침에 다짐했던 대로 보내지 못했으니까요. 잠들기 전엔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는 시간이 많아요. 한땐 저도 자기 검열이 심한 사람이었는데, 아이가 생기면서 스스로에게 관대해지고 마음이 좀 더 편해진 것 같아요.

 

생각이 많아 보인다고 말한 건 그만큼 배우로서 아우라가 있다는 뜻이기도 해요. 주로 어떤 사람을 볼 때 아우라를 느끼나요?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분들요. 선교사나 봉사 활동하시는 분들의 아우라가 큰 것 같아요. 굉장히 부드러운 아우라죠. 전 정치적인 리더십을 가진 사람들에겐 전혀 아우라를 못 느껴요. 선하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 가장 영향력이 크다고 생각해요.

 

<프루프> 이후에 김광보 연출과 다시 만났어요. 그간 서로 많은 변화를 겪었는데, 그때와 지금의 호흡은 어떻게 다른가요?
지금 정말 좋아요. <프루프> 때는 제가 인생도 잘 모르고 어리버리했어요. 연출님과의 관계도 어렵고 서먹했고. 지금 딱 10년이 지났는데, 그동안 김광보 연출님은 한국 최고의 연출가가 되어 있더라고요.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정말 기뻤죠. 수많은 인터뷰에서 저를 인정해줬던 고마운 분이거든요. 요즘 <스테디 레인> 연출도 맡고 계셔서, 신랑을 극장에 데려다 주면서도 자주 봬요. 그때마다 친구처럼 서로 아이 키우는 이야기나 인생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눠요. 연출과 배우를 넘어 오랜 지인 같은 느낌이 들어 참 좋고요.

 

그러고 보니 김광보 연출의 <스테디 레인>과 남다른 인연이 있네요. 남편인 이석준 배우와 <은밀한 기쁨>의 상대 역인 이명행 배우가 함께 출연하는 작품이죠. 요즘 이 세 남자들과 서로 많은 자극을 주고받을 것 같은데.
올해 인복이 참 많다 싶어요. 명행 씨는 석준 씨가 워낙 성격이 좋고 선하다는 칭찬을 많이 해서인지, 첫 만남에서부터 스스럼없이 친해졌어요. 정말 굉장히 밝고 순수한 사람이었어요. 그 어떤 트라우마도 없어 보였죠. 그 해맑음이 연기할 때 큰 장점이 되더라고요. 감정적으로 투명하고 순수하니깐 방어막 없이 감정이 확 나오는 거죠. 커뮤니케이션도 이보다 잘될 수 없어요. 또 석준 씨는 이번에 제가 자극을 아주 많이 받았어요. <스테디 레인>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위기감이 들 정도로 성장해 있는 거예요. 나도 빨리 따라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저희는 연애 시절부터 서로의 연기를 보면서 모니터를 해주거든요. 석준 씨는 필요한 부분만 이야기하고, 저는 여자라는 특성상 엄청 상세히 이야기를 해주는 차이일 뿐. 예전엔 제가 프로페셔널 정신을 발휘한다고, 너무 적나라하게 지적을 해서 석준 씨가 잠적한 적도 있었어요(웃음).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 순간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모니터를 해준다는 신뢰가 쌓이더라고요. 서로를 제일 잘 알고 있기도 하고. 그래서 이제 저희 두 사람은 서로의 모니터에 가장 신경을 써요.

 

 

꿈을 향한 충만한 시간들
최근 삶에서 일어난 은밀한 기쁨을 꼽아본다면?

5년 이상 배우 활동을 안 했더니 주위에서 도대체 뭘 하고 지냈느냐는 질문을 많이 해요. 사실 개인적으론 가장 변화무쌍하고 충만한 시간들이었어요. 오히려 계속 연기를 할 때가 좀 멈춰 있는 시간들이었죠. 일단 출산! 저에게 은밀한 기쁨이라는 단어는 굉장한 고통을 동반하지만 그 끝에 느껴지는 기쁨 같아요. 20시간 진통을 하고 자연주의 출산을 했는데, 그 시간들이 그리울 만큼 좋았어요. 계속 아이를 생각하면서 뭔가 아이와 함께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아이가 태어날 때의 환희, 나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생명체가 있다는 희열, 그 아이가 자라나는 기쁨. 또 제가 학업을 시작했어요. 대학원에서 두 편의 단편영화를 만들었는데 정말 힘들었어요. 고통스러운 작업이었지만, 부산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올라가고 작품을 좋게 봤다는 관객들의 이야기도 들려오고. 이렇듯 진정한 기쁨은 고통을 수반하지 않고는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아요.

 

감독으로 변신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네요. 오랫동안 소망했던 일을 실행에 옮긴 것이니 더 의미가 커요.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가장 큰 계기는 무엇이었어요?
창작은 굉장히 오래전부터 품은 낡은 꿈이었어요. 마흔 전에 시작해야지 하는 마음에 우선 대학원에 들어갔죠. 창작의 꿈을 품은 건 어떤 결심이라기보단 운명적인 부분들이 커요. 어린 시절부터 저희 아버지가 뭔가를 열심히 하면서 사셨거든요. 대외적으로 저희 아버지를 배우로 많이 기억해주시만 사실 계속 창작을 하셨어요. 대본을 완전히 뒤바꿔서 각색도 하시고, 모노드라마도 직접 연출하셨죠. 무대 디자인까지 하신 적도 있고. 그만큼 창작욕이 많으신 분이었는데, 제게도 그런 피가 흐르는 것 같아요. 안정적으로 안주하는 것보다 도전하고 창작하는 일에 매력을 느끼거든요. 이제 그 길을 택하게 된 거죠.

 

배우, 감독, 예술가, 아내, 엄마 등 지금 많은 수식어를 갖고 있는데, 그 중 가장 맘에 드는 것 하나만 고른다면?
지명이 엄마! 엄마는 진짜 위대한 거 같아요. 제가 엄마가 될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어요. 나만 알았고, 굉장히 불안하고 혼란스런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래서 지금은 엄마라는 게 가장 자랑스러운 단어예요.

 

모든 수식어를 통틀어 추상미의 궁극적인 꿈은 무엇인가요?
사람들의 세상을 작품에 반영하고, 그들과 동행할 수 있는 크리에이터가 되는 것. 그리고 가족, 친구, 주변 사람들과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이사벨의 아버지처럼 말이에요. 그런 삶이 참 아름다울 것 같아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5호 2014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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