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하는 인간
<파우스트> 유인촌
괴테의 『파우스트』는 선과 악 사이에 끊임없이 갈등하는 파우스트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작품이다. 배우 유인촌은 평생 동안 세 번 <파우스트>를 만났다. 처음에는 메피스토로, 그다음에는 메피스토와 파우스트로, 그리고 이번에는 노년의 파우스트로. 오랜만에 <파우스트>를 다시 만난 그는 이제야 파우스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다시 만난 파우스트
선생님께서 <파우스트>에 참여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시지요?
이번 작품이 나에게는 세 번째 <파우스트>예요. 앞서 참여한 <파우스트>는 모두 내가 직접 기획하고 제작했어요. 처음으로 <파우스트> 무대에 오른 1997년에는 악마 메피스토를 맡았어요. 그다음에 참여한 <파우스트>는 연극이 아니라 낭독극 형식으로 성악가들과 함께 작업한 작품이에요.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와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를 결합해 일종의 실험극처럼 선보였어요. 나는 파우스트와 메피스토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선악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두 번째 <파우스트>에는 내 해석을 반영해 파우스트와 메피스토를 동시에 연기했어요.
<파우스트>에 어떤 매력을 느끼셨기에 직접 작품 제작까지 하게 되셨어요?
<파우스트>는 기쁨과 슬픔 같은 감정을 자극하는 작품이 아니라 이성을 자극하고 사유하게 하는 작품이에요. 괴테 하면 작가라는 수식어를 먼저 떠올리지만, 사실 괴테는 철학자이면서 과학자이기도 했어요. 그런 사람이 60년에 걸쳐 인간의 본질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집대성한 작품이 바로 <파우스트>예요.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그만큼 작품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 희열이 커요. 그러니 자꾸 도전 의식이 생기나 봐요.
말씀하신 대로 <파우스트>는 워낙 대작인 데다가 어렵기로 소문이 나서 접근하기 쉽지 않은 작품이에요. 간단하게 어떤 작품인지 소개 부탁드립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파우스트>는 인간의 욕망, 선과 악 그리고 인간과 신의 관계를 다룬 작품이에요.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 때문에 악이 탄생하고, 악은 인간과 신의 관계를 단절시키지요. 괴테는 <파우스트>를 통해 신과 단절된 인간이 과연 구원에 이를 수 있을까를 질문해요. 극 중 아주 유명한 대사가 있어요.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다.” 방황 끝에 인간이 무엇을 얻게 되는지 또 어떤 결말을 맞게 되는지를 따라가는 이야기예요.
이번 작품에서 파우스트 역할은 두 배우가 연기합니다. 노년의 파우스트는 선생님께서, 마법의 물약을 먹고 젊어진 파우스트는 박은석 배우가 맡았습니다. 노년의 파우스트를 맡은 소감이 궁금합니다.
내가 파우스트 역할만 연기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적당한 나이에 파우스트를 연기하게 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파우스트는 인간의 지식에 통달한 사람이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신의 영역의 지식까지 넘보는 인물이에요. 자기가 원하는 깨달음을 얻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악마와 영혼을 걸고 계약할 정도죠. 그런데도 그 내면에는 갈등이 끊이지 않아요. 신의 뜻대로 선을 추구하려는 마음과 악과 결탁해서라도 욕망을 이루겠다는 마음이 계속 충돌하거든요. 젊었을 때는 파우스트의 욕망과 내적 갈등, 그리고 그가 하는 말을 전부 다 이해하긴 어려웠어요. 하지만 나이를 먹고 보니 파우스트를 알 것 같아요. 내가 이해한 만큼 관객에게 조금 더 쉽고 친절하게 파우스트를 보여줄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생겨요.
하지만 선생님께서 파우스트는 연기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인물이기에 어렵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어려우신지요?
희곡을 보면 파우스트는 철학, 법학, 의학, 신학을 평생을 바쳐 연구했다고 나와요. 그만한 지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가만히 있어도 학자의 아우라가 뿜어져 나올 거예요. 그런데 아우라를 어떻게 연기할 수 있을까요. 아마 그 아우라를 연기하려고 하면 할수록 파우스트라는 인물은 가벼워질 거예요. 그런 점에서 파우스트는 어려운 역할이에요. 지금 한창 연습 중인데 파우스트를 어떻게 연기해야 할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연기를 안 하고 표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어요.
선생님만큼 경력이 쌓이면 큰 어려움 없이 연기하실 줄 알았어요.
배우에게 무대에 오른다는 것은 늘 도전이에요. 아무리 경력이 많다고 해도 처음 맡은 배역을 잘하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나요? 열심히 연습하는 것밖에는 답이 없어요. 함께 무대에 서는 배우들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는 거고요. 연극은 바로 그런 맛으로 하는 거예요.
지난번 <햄릿>에 이어 이번에도 젊은 배우들과 함께 공연하게 되었어요. 요즘은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선후배 배우가 한 무대에서 공연하는 걸 보는 게 쉽지 않은데, 후배들과 함께 작업하는 소감이 어떠신지요?
아주 좋아요. 요즘은 노역이 등장할 때 실제 노인 배우를 잘 섭외하지 않아요. 내 또래에 활동하는 배우들이 많지도 않지만, 아무래도 나이 차 많은 선배와 함께하는 게 불편하겠죠. 하지만 내가 <햄릿>과 <파우스트>를 해보니 여러 세대가 어우러지는 게 훨씬 보기에도 자연스럽고 연기하는데도 안정감이 있어요. 근래에 이렇게 다양한 세대가 한 작품 안에서 어우러지는 걸 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나는 참 운이 좋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선후배의 앙상블을 볼 수 있는 작품이 많이 무대에 오르면 좋겠어요.
<파우스트>에서는 메피스토 역할을 맡은 박해수 배우와 가장 호흡을 많이 맞추실 텐데요. 함께 연습해 보니 후배 박해수는 어떤 배우이던가요?
최근에는 매체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지만, 이전에 무대에 섰던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연극을 대하는 자세가 아주 진지해요. 연습하면서 조금씩 메피스토로 변해가는 자신을 예민하게 느끼면서 연기를 하는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배우로서 기본기가 탄탄한데 굉장히 노력형이라 앞으로도 기대되는 배우예요. 같이하는 (박)은석이나 (원)진아도 칭찬하고 싶어요. 셋 다 왕성하게 활동할 때인데, 다른 활동은 일체 다 접고 <파우스트>에만 집중하고 있어요. 아침 일찍 나와서 하루 종일 연습실에서 대본을 붙잡고 몰입하는 것만 봐도 박수 쳐주고 싶어요. 그게 말처럼 쉽지 않거든요. 덕분에 나도 자극받아서 더 열심히 연습해요. 이 친구들을 보고 있으면 앞으로 배우로서 훨씬 더 꽃을 피우겠다 싶어요.
<파우스트>는 그동안 다양한 버전으로 공연되어 왔는데요, 이번 <파우스트>는 선후배들이 함께한다는 것 외에 어떤 차별점이 있나요?
양정웅 연출가는 고전의 아름다움은 훼손하지 않으면서 현대적인 감각으로 연출하는 것으로 정평이 난 연출가예요. 그런 면에서 이번 <파우스트>는 관객이 쉽게 느낄 수 있도록 연출되지 않을까 해요. 음악을 많이 사용할 예정이고, 기존의 공간 개념의 상식을 깨는 아주 모던한 무대를 선보일 거 같아요. <파우스트>가 어렵다 어렵다 해도 역대 <파우스트> 중에 흥행에 실패한 경우는 거의 없어요. <파우스트>만큼 규모가 큰 고전 작품을 잘 안 하니까 공연할 때 챙겨 보는 작품인 거죠. 그리고 희곡을 읽는 것보다 배우가 무대 위에서 표현하는 것을 보는 편이 훨씬 이해하기 쉬울 거예요. 어렵다, 공부해야겠다 생각하지 마시고 그냥 오셔서 멋진 대사를 듣고, 멋진 무대를 보고 즐기시면 됩니다.
멈추고 싶은 찰나의 순간
선생님은 1971년에 연극배우로, 1973년에 탤런트로 데뷔하셨어요. 요즘도 두 장르를 오가며 활동하는 게 쉽지 않은데, 당시에는 어땠나요?
당시에는 배우의 활동 영역이 정확하게 나뉘어 있진 않았어요. 지금보다 더 자유롭게 양쪽을 오갔죠. 그때는 텔레비전 방송국이 개국하고 드라마를 만들기 시작할 때였는데, 지금처럼 드라마 전문 인력이 어디 있나요. 연극 무대 출신들이 드라마 PD, 작가, 배우를 했죠. 그래서 한 1980년대 중반까지는 드라마와 연극을 병행하는 걸 이해해주는 분위기였어요. 심지어 연극을 한다고 하면 촬영을 빨리 끝내고 보내주고 그랬어요. 하지만 드라마 시스템이 점점 자리를 잡아가면서 연극과 드라마를 병행하는 게 어려워졌어요.
그런데도 선생님께서는 꾸준히 연극을 하셨어요. 텔레비전 인기 스타로 활동하고 계실 때도 마찬가지였고요. 연극 무대에 꾸준히 서신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드라마는 짧은 순간 집중력과 순발력을 발휘해서 연기하지만, 연극은 달라요. 시간을 들여 연습하면서 인물을 만들어 나가죠. 드라마 연기에 최적화된 사람은 긴 연습을 못 견뎌 하는데, 오히려 나는 그 과정에서 다양한 연기를 시도하고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게 즐거워요. 그래서 한참 드라마를 찍다가도 꼭 연극 무대로 돌아왔어요. 드라마 연기로는 해소할 수 없던 연기 갈증을 연극으로 해소했던 거죠.
출연작을 살펴보니 뮤지컬도 하셨더라고요!
젊었을 때 현대무용을 배웠어요. 그때만 해도 남자 무용수가 없을 때라 무용 공연도 많이 했는데, 그때 눈에 띄어서 뮤지컬도 하게 됐죠. 당시는 뮤지컬이라는 개념이 익숙하지 않을 때라 그저 연극처럼 무대에서 하는 공연이라고 생각했어요. 1980년대에 극단 현대극장이 제작한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사운드 오브 뮤직> <에비타> 같은 뮤지컬에 참여했어요. 처음에는 음악도 좋고 재미도 있어서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하면 할수록 나랑은 조금 안 맞는 것 같더라고요. 뮤지컬은 진지하게 연기할만하다 싶으면 노래하고 춤을 추니까. 나한테 잘 맞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연극에만 집중해야겠다 싶어서 뮤지컬은 한 5년 하다가 그만뒀어요. 그런데 요즘은 다시 뮤지컬을 해보고 싶어요. 왜냐하면 이제 뮤지컬이 대세가 됐잖아요. 하하하! 이 나이에 해봐야 노인 역할을 맡을 텐데 옛날처럼 춤을 추고 그럴 필요는 없을 거 아니에요. 그럼 잘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선생님께서는 50년을 배우로 살아오셨어요. <파우스트> 속 대사처럼 “멈춰라, 순간이여. 너는 아름답다”라고 말할 만큼 멈추고 싶은 순간이 있었나요?
그런 순간이야 너무 많죠. 드라마 시청률이 높게 나왔을 때도 그랬고. 또 상 받을 때도 정말 그 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평생 상만 받았으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웃음) 그중에서도 가장 멈추고 싶은 순간은 무대에서 관객과 내가 함께 호흡하는 순간이에요. 딱 그 찰나를 멈추고 싶어요. 무대 위에서 배우가 관객과 함께 숨 쉬는 순간을 느낀다면, 그건 배우로서 성공한 거거든요.
앞으로 배우 유인촌이 이루고 싶은 목표는 무엇인가요?
배우의 목표는 어떤 역할이든 그 인물에 깊이 빠져서 완성도 높은 인물을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건 죽었다 깨어나도 이루지 못할 목표예요. 99%를 다 채워도 끝까지 못 채우는 1%가 있거든요. 채우지 못하는 걸 알면서도 채우려고 노력하는 게 배우의 숙명이라고 생각해요. 나도 무대에 서는 동안에는 그 1%를 위해 치열하게 노력할 거예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23호 2023년 4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