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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POTLIGHT] 내 안의 다른 가능성 <브라더스 까라마조프> 이형훈 [No.223]

글 |안세영 사진 |원민화 2023-04-17 1,991

내 안의 다른 가능성
<브라더스 까라마조프> 이형훈

 

“내가 『더뮤지컬』하고 인터뷰를 하다니 이게 무슨 일이야.” 
인터뷰에 앞서 이형훈이 얼떨떨하게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쩌면 그는 지난 1월 제7회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신인상을 받았을 때도 비슷한 혼잣말을 중얼거리지 않았을까? 10여 년간 연극 무대에서 활약하다가 최근 뮤지컬로 영역을 확장한 배우 이형훈. 그 새로운 행보의 시작을 알린 작품이 바로 <브라더스 까라마조프>다. 도스토옙스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브라더스 까라마조프 >는 ‘누가 아버지를 살해했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선과 악이 혼재하는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2020년 처음으로 이 작품에서 첫째 드미트리를 연기한 이형훈은 이후 작품이 재공연을 거듭할 때마다 빠짐없이 함께했다. 이 작품의 무엇이 그를 사로잡은 걸까?

 


연극 무대에서 뮤지컬 무대로

 

<렛미플라이>로 한국뮤지컬어워즈 신인상을 받은 걸 축하해요. 수상 당시 소감이 어땠어요?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새로 개관한 LG아트센터 서울에서 시상식이 열렸는데 처음 가보는 공연장에, 처음 가보는 시상식이라 모든 게 생소했어요. 나중에 수상 당시 영상을 다시 보니까 제가 무대로 올라가는 길을 몰라 헤매는 모습이 고스란히 찍혀 있던데요. (웃음) 신인상 후보는 마지막에 축하 공연도 해야 해서 시상식이 끝날 때까지 긴장을 놓지 못했던 기억이 나네요. <렛미플라이>는 많은 양의 노래를 소화해야 하는 데다 70대 노인을 연기해야 하는 작품이라 저한테는 큰 도전이었는데, 상까지 받게 되어 감사할 따름이에요.

 

무대에 선 지 10년이 넘어 뮤지컬 시상식에서 신인상을 받다니, 스스로도 놀랐죠?
사실 저는 신인상 후보 자격이 안 될 줄 알았어요. 연극 경력이 오래되어서가 아니라 2009년에 <파라오는 살아있다>라는 어린이 뮤지컬에 출연한 적이 있어서요. 그런데 어린이 뮤지컬 출연 경력은 별개로 치더라고요. 참고로 그 뮤지컬에서 제가 맡았던 역할은 낙타예요. (웃음) 나름 비중 있는 역할이라 솔로곡도 있었는데, 그때 부른 뮤지컬 넘버 ‘난 이대로가 좋아’가 지금도 음원 사이트에 올라가 있어요.

 

하지만 그 뒤로 10여 년간 연극에만 전념했잖아요. 처음 배우를 꿈꿀 때부터 연극 배우가 되고 싶었던 거예요?
고등학생 때 연극부 활동을 하면서 연기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어요. 일반계 고등학교 연극부지만 연극제에도 나가고 여러 연극·뮤지컬 배우를 배출할 만큼 유서 깊은 연극부였죠. 처음부터 배우가 될 생각으로 연극부에 들어간 건 아니었는데, 고등학교 3학년 때 앞으로 뭘 하며 살아야 행복할까 진지하게 고민해 보니 연기를 계속 해야겠더라고요. 그때부터 사활을 걸고 실기 시험을 준비했고, 다행히 수시로 딱 한 군데 지원한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 합격했어요. 이후 대학에서 무용과 가창 수업을 듣고, 학교 선후배가 만든 창작뮤지컬 발표 공연에 참여하면서 뮤지컬이라는 장르에도 관심을 갖게 됐죠. 하지만 아무래도 저에게 가장 익숙한 분야가 연극이다 보니 졸업한 뒤 자연스레 연극으로 활동을 시작했어요. 사람에 대해 깊이 공부하고 연기력을 쌓으려면 연극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2020년 <브라더스 까라마조프>에 출연하면서 본격적으로 뮤지컬 활동을 시작했어요. 연극 <보도지침>을 함께한 오세혁 연출가의 제안으로 참여했다고 들었는데, 출연을 결심한 결정적인 이유가 뭐예요?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뮤지컬이라고 하면 춤과 노래가 어우러진 화려한 쇼를 떠올렸어요. 그런데 <브라더스 까라마조프>는 제가 아는 뮤지컬과 결이 다르더라고요. 이 작품은 한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네 형제가 각자의 마음속에 내재된 악마와 싸우는 이야기예요. 아버지를 중심으로 네 형제가 각자의 공간에서 고해성사를 하듯 노래하는 형식이라 연극적인 느낌이 났어요. 마음속에 질문이 떠올랐죠. 지금 이 제안을 거절하면 언제 또 나에게 뮤지컬 무대에 설 기회가 생길까? 연극이든 뮤지컬이든 사람의 마음을 공부하고 표현하는 건 마찬가지인데, 장르가 다르다고 해서 나는 할 수 없다고 미리 선을 긋는 게 맞는 걸까? 결국 이 도전을 받아들여야 연극 외에 다른 장르에 대한 경계심을 허물 수 있겠다 싶어서 용기를 냈어요.

 

연습 과정에서 연극과 뮤지컬의 차이를 느꼈나요?
연습 초반에는 정말 힘들었어요. <브라더스 까라마조프>는 오로지 피아노 한 대의 연주에 맞춰 배우의 목소리로 음악을 완성하는 작품이거든요. 노래를 하는데 기댈 곳이 하나도 없는 기분이더라고요. 손발이 절로 떨렸어요. 게다가 당시 저는 뮤지컬 장르에 맞는 연기가 따로 있다는 선입견에 빠져 있었어요. 그래서 제 딴에는 잘해보겠다고 <지킬 앤 하이드> <영웅> 같은 작품의 공연 영상을 열심히 찾아 본 거예요. (웃음) 하지만 대극장 뮤지컬의 연기 기술을 소극장 작품에 적용하려 하니 어색하고 과장된 연기가 나왔죠. 그때 옆에서 지켜보던 배우들이 조언을 해줬어요. 연극에서 독백을 할 때처럼 가사의 의미를 어떻게 전달할지를 생각하며 노래하라고요. 평소 친분이 있던 뮤지컬배우 김아영 누나의 조언도 큰 도움이 됐어요. 음악이 감정 표현을 도와줄 테니 음악에 기대라는 말을 듣고 실마리를 찾았어요.

 


모순적인, 그래서 매력적인 인간

 

이 작품에는 살해당한 아버지 표도르와 그의 아들 드미트리, 이반, 알료샤, 그리고 사생아로 추정되는 하인 스메르쟈코프가 등장해요. 이 중 첫째 드미트리 역으로 출연한 건 본인의 선택인가요? 
처음부터 드미트리 역을 제안받았고, 솔직히 저랑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웃음) 퇴역 장교인 드미트리는 거칠고 난폭한 면을 지닌 인물인데, 저는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어서요. 하지만 그래서 더 마음이 갔어요. 저는 이전에 연기해 보지 않은 성격의 캐릭터를 만나면 일단 도전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드미트리의 모순적인 성격도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드미트리는 아버지를 미워하면서도 그와 똑같이 방탕하게 살아가요. 스스로도 그 사실을 부끄럽게 여겨 날마다 개과천선을 다짐하지만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본성이 그를 놔주지 않죠. 강한 척하지만 나약하고, 방탕하지만 순수한 면을 지닌 사람이에요. 특히 사랑에 있어서는 바보 같을 만큼 순진무구해요. 약혼자가 있지만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그 여자와 결혼하려고 아버지에게 유산을 내놓으라고 다그쳐요. 아버지를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서도 사랑하는 여자가 보고 싶다며 울고요. 제 생각엔 아버지에게 사랑받고 자라지 못했기 때문에 더 사랑에 매달리는 것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이전까지와 다른 이미지의 역할이었는데, 군인 특유의 단호한 몸짓을 잘 살려서 새로운 모습을 봤어요.
연기할 때 몸의 형태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에요. 무대 위에서는 말과 노래뿐 아니라 몸짓도 언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드미트리는 군인 출신의 거친 남자인데 저는 몸집이 큰 편이 아니라서 자세에 더 신경썼어요. 법정에 서 있을 때 몸을 펴고 당당한 제스처를 취하려고 노력했죠. 감옥에 앉아 있을 때도 군대 상사들을 떠올리며 마초적이고 와일드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고요. 반대로 그런 드미트리가 사랑하는 여자를 그리워하는 노래를 부르고 난 뒤에 얼마나 초라한 모습으로 앉아 있을 수 있는지 대비해서 보여주고 싶었어요. 

 

네 형제의 심리를 중심으로 극이 전개되다 보니 사소한 동작에 담긴 상징적 의미를 전달하는 게 중요할 듯해요. 개인적으로 ‘헛소리’ 장면에서 이반이 “드미트리 아버지를 죽이겠다 떠들었지”라고 노래할 때, 정작 드미트리는 자기 머리에 총을 겨누는 제스처를 취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그때는 정해진 안무에 따라 네 형제가 모두 같은 제스처를 취하는데, 저는 나중에 머리에 총을 겨누는 제스처를 한 번 더 사용해요. 이렇게 지독하게 순진한 사람이 모든 명예가 실추된 상태로 감옥에 갇힌다면 죽고 싶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죽고 싶을 만큼 화가 나 있는 상태, 풀리지 않는 답답한 마음의 응어리를 표현하는 동작이죠. 꼭 이런 의미를 다 헤아리며 공연을 보실 필요는 없지만, 배우인 제가 나름대로 논리를 가지고 연기하면 관객은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그 의미를 이해할 거라고 생각해요. 

 

드미트리는 마지막에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변화를 보여줘요. 뮤지컬에서는 이러한 감정의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이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데, 감옥에 있는 동안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 걸까요?
공연 초반에 드미트리가 법정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난 뒤, 동생 알료샤가 감옥에 갇힌 드미트리를 찾아와요. 그러고는 형을 믿는다며 드미트리에게 십자가를 쥐어 주죠. 저는 그 순간부터 드미트리의 사죄를 향한 여정이 시작된다고 생각해요. 이후 무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한편으로는 감옥에 앉아 있는 드미트리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장면인 거죠.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지만 죽이고 싶어한 그 마음만으로도 죄를 지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 모든 상황이 드미트리의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여 정리가 돼야 해요. 그래서 감옥 안에 앉아 있을 때도 의식적으로 그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지켜보려고 해요. 

 

방대한 원작 소설을 100분짜리 공연으로 압축하면서 생략된 내용이 많을 텐데, 뮤지컬에는 없지만 원작에는 있는 장면 중에 인상 깊었던 것이 있나요?
뮤지컬에서는 난투극을 벌일 때를 빼면 드미트리와 스메르쟈코프가 직접 대면하는 장면이 없지만, 원작에는 두 인물이 서로를 꿰뚫어 보고 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 있어요. 드미트리와 스메르쟈코프는 순수하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드미트리가 맹목적인 사랑을 하는 것처럼, 스메르쟈코프는 이반의 무신론을 이반 자신보다 더 굳게 믿고 따르잖아요. 무대에서도 두 인물이 서로를 꿰뚫어 보고 있다는 점을 은연 중에 드러내고 싶어서 일부러 스메르쟈코프와 자주 눈을 마주쳐요. 스메르쟈코프가 이반에게 “드미트리가 올 줄 알고 기다렸다”라고 말할 때 자기만의 동굴에 틀어박혀 있는 드미트리와 스메르쟈코프의 눈이 마주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이 장면에 담긴 의미가 확장되길 바라요.

 

형훈 씨는 자신이 타고난 성격이 배우 일과 잘 맞는다고 생각해요?
저는 사람의 성격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MBTI 같은 성격 유형 검사로는 쉽게 사람을 판단할 수 없다고 믿어요. <브라더스 까라마조프>가 얘기하는 것처럼 한 사람 안에도 얼마든지 다양하고 모순적인 특성이 공존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배우 일을 하며 어떤 캐릭터를 만나든 제 마음속에서 그에 맞는 이형훈을 꺼내 그 인물에 적용하려고 노력해요.

 

그래도 가끔은 드미트리처럼 ‘나는 왜 이럴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잖아요. 혹시 자신의 성격 가운데 바꾸고 싶은 부분이 있나요? 
그런 거라면 있죠. 저는 언짢은 상황이 생겼을 때 대화로 잘 해결해 나가기보다는 혼자 삭히려는 경향이 있어요. 이게 언짢은 티가 안 나면 문제가 없는데 저는 티가 잘 나요. (웃음) 스스로 그런 면이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려고 조심해요. 공연 한 편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이 마음을 모아 움직여야 해요. 그런데 사람마다 작품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방법이 다 다르기 때문에 그걸 맞춰나가는 과정이 쉽지 않아요. 혼자서만 너무 뜨거워도 안 되고, 너무 차가워도 안 돼요. 아무리 열정이 넘친다 해도 혼자서는 공연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배우라면 다른 사람과 함께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마지막 질문이에요. 가장 최근에 느낀 소소한 행복은 뭔가요?
<어차피 혼자> 이후 3개월가량 휴식기를 갖고 무대에 돌아왔을 때, 공연을 보러 온 몇몇 관객분이 손편지를 써주셨어요. 그 편지를 받고 많이 기뻤어요. 누군가 계속 저의 무대를 기다리고, 제 연기를 보며 위로와 안도를 얻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정말 행복하더라고요. 그래서 꼭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제가 SNS를 안 하니까 이런 마음을 전달할 길이 없었어요. 이번 기회에 기사에 꼭 써주세요. 저를 바라보고, 응원해 주고, 저로 인해 위로를 받았다고 얘기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23호 2023년 4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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