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항해의 시작
<해적> 김수연
카리스마 넘치는 <팬레터>의 히카루부터 광기 어린 눈빛이 돋보인 <미드나잇 : 액터뮤지션>의 우먼, 폭발적인 에너지가 빛난 <웨이스티드>의 에밀리까지. 김수연은 다채로운 매력의 캐릭터로 자신의 잠재력을 꾸준하게 입증해 왔다. 그런 그가 이번에 새롭게 만난 작품은 <해적>이다. 그는 모험을 통해 성장하는 소년 루이스와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해 해적선에 오르는 총잡이 앤을 맡아 새로운 항해에 나선다.
처음 쓰는 항해 일지
세 번째 시즌을 맞은 <해적>의 새로운 캐스트로 합류했어요. 작품의 어떤 점에 이끌려 출연을 결심했나요?
지난 시즌 공연을 보고 동화 같은 작품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해적의 이야기를 보고 자라잖아요. 그동안 잊고 살았던 동심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공연을 본 건 정말 좋은 기억으로 남았지만, 출연 제안을 받으니까 ‘내가 할 수 있을까?’ 싶었어요. 지난 시즌에 출연했던 배우들이 체력 소모가 큰 작품이라며 입을 모아 “진짜 힘들다”라고 말하는 걸 들었거든요. (웃음) 그래도 저에게 좋은 성장의 기회가 될 것 같아서 용기를 냈어요.
이인극에 출연하는 건 처음인데, 연습하면서 새롭게 경험하는 것이 있나요?
이인극은 등장하는 사람이 나 아니면 상대방뿐이니까 연기하다가 정적이 생기면 불안하더라고요. 그래서 상대 배우와 호흡을 맞추는 연습이 중요하다는 걸 다시금 깨닫고 있어요. 아직 연습 중이라 제가 이 작품을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커요. 어렵고, 괴롭고, 심장이 쫄깃하죠. (웃음) 그래도 공연이 올라가면 더 재미있게 연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공연의 막이 오르는 순간, 내가 의지할 곳은 상대 배우밖에 없다는 사실이 제가 작품에 더 깊게 빠져들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까요.
이번 시즌에 함께 합류한 정연 배우와 주로 호흡을 맞출 텐데, 정연 배우와는 지난 2월 막을 내린 <웨이스티드>에 이어 다시 한번 만나네요. 아무래도 그만큼 더 편하게 연기할 수 있겠죠?
정연 언니와는 <웨이스티드>를 통해 처음으로 만났어요. <웨이스티드>는 라이선스 작품이지만 마치 창작 초연 작품처럼 다 함께 만들어간 부분이 많아서 배우들이 연습실에 머무르는 시간이 정말 길었어요. 그런데 정연 언니와는 이번에 <해적>까지 함께하면서 서로의 가족보다 얼굴을 보는 시간이 많은 사이가 되어버렸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해졌고 가족 같은 끈끈함이 생겼어요. <웨이스티드>도 <해적>도 정말 쉽지 않은 작품인데, 언니와 함께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사실 언니가 낯간지러운 말을 안 하는 사람이거든요? 근데 <해적> 연습을 하면서 저한테 서리태 한 봉지를 주시는 거예요. 밥 해 먹으라고. (웃음) 함께 준 쪽지에는 ‘짝꿍아, 나 좀 잘 부탁한다.’ 이렇게 써 있었고요. 언니의 마음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요.
<해적>은 이인극이지만, 각 배우가 1인 2역을 맡아요. 수연 씨는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동료를 따라 모험을 떠나는 소년 루이스와 우연히 그 모험에 함께하게 된 총잡이 앤을 연기해요. 두 인물의 어떤 면에 초점을 맞추고 연습 중인가요?
우선 성별 차이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요. 두 인물은 성격도, 살아온 환경도, 주어진 상황도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굳이 남자, 여자를 구분해서 연기하지 않아도 되겠더라고요. 루이스를 연기할 때는 10대 소년의 치기 어린 모습을 표현해 보려고 해요. 어떤 행동을 할 때나 감정을 표현할 때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매력을 잘 보여주고 싶어요. 그래서 루이스를 연기할 때는 불쑥 튀어나오는 감정을 억누르지 않으려고 해요. 앤은 캐릭터성이 확실한 친구예요. 여자로, 사생아로 태어나 해적으로 사는, 정말 쉽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지만 진짜 나로서 살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졌어요. 앤은 그 꼿꼿함을 잘 표현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어요.
<해적>은 인물 간의 관계성이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에요. 루이스는 해적선의 선장 잭을 만나, 앤은 또 다른 해적 메리를 만나 비로소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게 되죠. 두 캐릭터가 내면의 변화를 겪는 과정에서 가장 인상 깊은 순간은 언제인가요?
루이스로서는 해적선에 타서 처음으로 모험을 떠나던 순간과 그 모험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순간이 굉장히 마음에 와닿아요. 결국 같은 자리로 돌아온 거지만, 모험을 통해 많은 일을 경험한 루이스의 내면은 이전과 같지 않으니까요. 앤으로서는 아무래도 메리를 만난 순간이 가장 인상적이죠. 앤의 인생이 뒤바뀌는 순간이니까요. 앤이 메리에게 느끼는 사랑에는 동경과 존경심도 담겨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앤을 연기할 때는 그 감정을 최대한 마음에 소중히 품고 있으려고 해요.
이제 공연 개막이 얼마 안 남았어요. <해적>은 2019년 초연부터 큰 사랑을 받은 작품인 만큼, 새롭게 합류하는 배우로서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겠죠?
부담감이 없지는 않지만, 그 부담감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해요. 부담감에 팔다리가 묶여서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부담감이 느껴질 때마다 일부러 더 열심히 연습해요. 이런저런 걱정과 부담감 때문에 머리가 복잡할수록 작품과 인물에 집중하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어떻게 하면 내 머릿속에 있는 캐릭터를 보여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이 장면 안에서 내가 맡은 인물로 생생하게 살아 있을 수 있을까? 끝없이 고민해요. 무대 위에서 부족함 없이 역할을 소화해 내기 위해서 제 감정과 상대 배우의 감정을 잘 읽어내려고 노력하고요.
삶의 조각을 모아
2017년 <시라노>로 데뷔해 배우의 길을 걸은 지 벌써 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어요. 지난 6년을 돌아보면 어떤 감정이 가장 먼저 떠오르나요?
신기해요. (웃음)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6년이 흘렀다니! 열심히 살다 보니 시간이 빨리 지나갔어요. 쉽지 않은 시간이었는데, 그 시간을 잘 보낸 제게 대견하다고 칭찬해 주고 싶어요. 내게 주어진 역할을 잘 해내기 위해 앞으로 또 얼마나 고군분투해야 할지 걱정도 되지만, 그래도 앞으로 다가올 날들에 대한 기대감이 더 커요. 아직도 너무 부족하지만 이제는 내가 참여한 작품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조금 더 알게 되었거든요. 예전에는 눈앞이 뿌연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선명하고 명확해졌어요. 지난 6년간 많이 헤매고 부딪혔으니까, 이제 재미있을 일만 남았다고 생각해요.
많이 헤매고 부딪혔다니. 배우 생활을 하며 흔들린 적이 많았나 봐요.
사실 작년에 무대에 서는 게 무섭다고 느낀 때가 있었어요. 원래는 무대에서 잘 안 떠는 편인데, 그때는 무대에 설 때마다 마치 번지 점프를 뛰기 직전처럼 심장이 두근거리더라고요. 항상 뭔가를 해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보니 부담감을 크게 느꼈나 봐요.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건가? 관객에게 만족감을 주고 있나?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더라고요. 다행히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극복했어요. 이제는 저를 감싸고 있던 보이지 않는 막을 한 꺼풀 벗어낸 것처럼 무대에서 자유로워요.
지난 시간 동안 가장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하는 점은 뭐예요?
모든 일을 비장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된 거요. 내게 주어진 일들을 너무 비장한 태도로 받아들이다 보면 미끄러지기는 쉽지만 다시 일어나기는 어렵더라고요.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는 작은 일 하나하나에 마치 인생이 걸려 있는 것처럼 전전긍긍하고, 일희일비했어요. 그러다 보니 작은 실패에도 연연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는 조금 더 여유를 갖고 삶을 바라보려고 해요. 제 인생에는 배우 김수연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친구이기도 하죠. 그렇게 제 삶을 조각으로 나눠서 생각해요. 배우라는 직업은 제 삶에서 너무 소중한 부분이지만, 직업이 저 자신이 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면서 마음이 편해졌어요. 배우로서 실패하더라도, 그게 나라는 사람의 실패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살다 보면 직업과 나를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은데, 젊은 나이에 일찍 깨달음을 얻었네요.
고민도 많고 겁도 많아서 그래요. 누구나 한 번은 고꾸라지기 마련이니까 미리 대비를 하는 거랄까요? 그리고 이제야 배우가 내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덕분인 것 같기도 해요. 저는 저 자신에게 야박한 편이라서 스스로에게 높은 점수를 주지 않았었어요. 그래서 배우라는 직업을 갖게 된 후에도 ‘내게 맞는 일일까?’ 하는 의구심을 품고 있었어요. 그런데 여러 작품을 만난 후 자신감이 조금씩 생기면서 어느 순간 ‘내가 이 길을 선택했으니 나를 믿어보자’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믿음이 생기니까, 오히려 배우라는 직업과 저 자신을 분리할 수 있었어요.
수연 씨는 <해적>뿐만 아니라 <호프> 공연도 앞두고 있잖아요. 바쁠수록 삶과 일을 명확하게 분리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아요.
그 어느 때보다 격한 파도에 타고 있는 기분이에요. (웃음) 요즘은 정말 작품 생각밖에 안 해요. 나의 여러 조각 중 배우의 조각이 가장 큰 상태인 거죠. 거의 제 삶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요. 삶을 조각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게 중요하긴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배우로서의 조각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두 작품을 동시에 올리는 만큼, 잘 해내야 한다는 책임감이 정말 크거든요. 일상생활을 하다가 문득 작품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면 죄책감이 들 정도로요. 대신 하루 중 짧게라도 배우가 아닌 인간 김수연으로 있을 때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온전히 저 자체로 있으려고 노력해요.
그럼 이 질문으로 인터뷰를 마무리해 볼게요. 배우가 아닌 인간 김수연으로 존재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무엇인가요?
여유 그리고 평화. 삶에서 진짜 여유와 평화를 느끼기 위해서는 전쟁 같은 상황을 잘 버텨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그 뒤에 오는 여유와 평화가 더 달콤하게 느껴지거든요. 비록 지금의 저는 전쟁 중이지만…. (웃음) 이 시기를 잘 버티면 곧 여유와 평화가 찾아올 거라고 믿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22호 2023년 3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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