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창작자 10인
내 인생의 공연
<쿠로이 저택엔 누가 살고 있을까?>를 구상하게 된 계기나 창작에 영감을 준 대상이 있습니까?
표상아 작가님과 저는 아르코 아카데미 1기 동기입니다. 당시엔 서로 파트너가 달라서 교류가 없었는데, 다른 리딩 공연에서 연출가와 음악감독으로 만나 작업해 보니 서로 코드가 잘 맞더라고요. 작가님이 창작 작업도 함께해 보자며 두 가지 아이템을 제안하셨는데, 그때 제가 고른 작품이 <쿠로이 저택엔 누가 살고 있을까?>예요. 유쾌한 소동극이란 점에 매력을 느꼈죠. 마침 라틴 음악에 한창 꽂혀 있던 시기였는데 ‘어? 이거 <쿠로이 저택엔 누가 살고 있을까?>에 잘 어울리겠는데?’ 싶더라고요. 그렇게 처음 쓴 곡이 ‘벗겨’입니다.
가장 처음 본 공연은 무엇입니까?
처음으로 제가 직접 예매해서 본 공연은 재일 한국인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양방언 선생님의 한국 활동 10주년 기념 내한 공연이었습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저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3층에 앉아 ‘자신이 직접 작곡한 곡을 이렇게 큰 공연장에서 연주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부럽다! 대단하다!’라는 생각과 동시에 객석에서 굴러떨어질 것 같다는 생각을 공연 내내 했습니다.
작곡가를 꿈꾸게 만든 특별한 공연이 있습니까?
제가 처음으로 참여한 뮤지컬 <공동경비구역 JSA>입니다. 작곡가님의 조감독으로 참여했는데 리딩부터 본 공연까지 개발 과정을 함께하면서 뮤지컬의 매력을 알게 되었어요. 대본에 음악이 입혀지고, 캐릭터가 배우와 만나 살아 움직이고, 무대 위에 그들이 사는 세상이 펼쳐지는 과정이 재미있고 경이로웠어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에너지도 좋았는데, 그들이 뭉쳤을 때의 시너지 효과가 어마어마하더라고요. 첫 공연을 올렸을 때의 벅찬 마음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첫 작품의 기억이 좋아서 계속 이 일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어떤 이야기에 끌립니까? 반대로 피하는 이야기가 있습니까?
건강한 에너지를 주는 이야기를 좋아해요. 반면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라는 생각이 드는 이야기는 피하고 싶습니다. 일상에서도 ‘왜?’라는 질문을 많이 하는 편이라서 인물 설정이나 극의 전개에 있어 ‘왜?’라는 의문이 해결되지 않는 이야기는 좋아하지 않아요.
늘 마음에 새기고 있는 공연 속 가사가 있습니까?
“그냥 막연한 믿음. 지금보다 좋아질 거란 상상. 내가 가는 길이 맞다는 확신. 언젠간 될 거란 희망.” <쿠로이 저택엔 누가 살고 있을까?>의 ‘막연한 믿음’ 가사입니다. 작곡을 하다 보면 대본을 수도 없이 들여다보기 때문에 결국 가사를 다 외우게 되지만, 이 가사는 첫눈에 제 마음을 파고들었어요. 부르면 힘이 나서 자주 주문처럼 되뇌는 가사입니다. 이런 가사를 써주신 표상아 작가님 감사합니다!
뮤지컬로 만들고픈 다른 장르의작품이 있습니까?
첫 번째는 드라마 <경성스캔들>입니다. 1930년대 경성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인데, 네 명의 주인공 모두 설득력이 있고 서사가 잘 짜여 있어서 방영 당시 푹 빠져서 봤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한고은 배우가 연기한 독립운동가 차송주가 굉장히 매력 있었어요. 두 번째는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대인 수용소에 갇혀서도 긍정적인 에너지를 잃지 않았던 주인공 귀도는 분명 무대 위에서도 관객에게 좋은 영향력을 미칠 거예요. 두 작품 다 어두운 역사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지만 희망을 이야기한다는 점이 좋습니다.
뮤지컬로 만들고픈 실존 여성 인물의 이야기가 있습니까?
우리나라 여자 운동선수 중에 천재가 많잖아요. 그들을 주인공으로 공연을 만들면 정형화되지 않은 여성 캐릭터가 나올 것 같아요. 운동하는 여성의 이야기,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요?
<비밀의 화원>을 구상하게 된 계기나 창작에 영감을 준 대상이 있습니까?
한동안 코로나 때문에 밖에 나가지 못하고 집에만 갇혀 있다 보니 잡념이 많아지더라고요. 내가 글을 쓰는 걸 좋아하긴 하나?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가 뭐지? 그런 생각을 하다가 어린 시절 좋아했던 동화 『비밀의 화원』이 떠올랐어요. 어린 저는 그 이야기에 푹 빠져서 공원에 갈 때마다 ‘저 풀숲 너머에 비밀의 화원이 있지 않을까?’라는 상상에 잠기곤 했죠. 생각난 김에 원전을 제대로 읽어 보니, 저에게 딱 필요한 이야기더라고요. 등장인물 콜린은 아무것도 안 하고 방에 누워서 우울한 생각만 하던 아이인데, 친구들과 화원을 가꾸면서 건강해지고 웃음도 되찾아요. 비단 아이들뿐만이 아니라 우울증에 빠진 어른들에게도 들려주고픈 이야기라서 대본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처음 본 공연은 무엇입니까?
열 살쯤에 본 <피터팬>이 제가 처음으로 본 대극장 공연이었어요. 객석이 어두워지니까 동생은 무서워서 우는데, 저는 무대만 밝게 빛나서 신났어요.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안 나지만, 피터팬이 와이어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장면이 좋았어요. 그때 제 꿈이 하늘을 날아보는 거였거든요. 공연을 보면서 나도 배우가 되어 와이어를 타고 하늘을 날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했어요. 동시에 내가 공연을 만든다면 와이어가 안 보이게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고요. 와이어가 너무 두껍고 잘 보이지 뭐예요.
작가를 꿈꾸게 만든 특별한 공연이 있습니까?
대학교 3학년 때 학교 공연 <렌트>의 연출을 맡았어요. 마침 그해 브로드웨이 오리지널 캐스트가 출연하는 <렌트> 투어 공연이 한국을 찾아서 공부할 겸 보러 갔어요. 그리고 사랑에 빠졌죠. 제가 좋아하는 록 음악을 활용한 데다 가사와 스토리, 메시지까지 모든 게 좋았어요. 그전까지는 연기하다 말고 노래를 부르는 뮤지컬이 부담스러운 장르라고 생각했는데, <렌트>를 접한 이후 한국어로 그만큼 좋은 뮤지컬을 쓰고 싶어졌습니다.
어떤 이야기에 끌립니까? 반대로 피하는 이야기가 있습니까?
주인공이 마음속 장애물을 뛰어넘어 변화하고 성장하는 이야기에 끌려요. 너무 사실적인 이야기보다는 조금이라도 마법적인 요소가 있는 걸 좋아하고요. <비밀의 화원>이 바로 그런 이야기죠. 피하는 이야기라면, 저는 요즘 겁이 많아져서 잔인하고 무서운 이야기를 못 보겠어요. 폭력적인 장면을 보면 정신적 타격이 오래가더라고요. 그래도 아침 드라마 같은 종류의 자극적인 이야기는 좋아해요. 한 번쯤 그런 것도 써보고 싶어요.
늘 마음에 새기고 있는 공연 속 가사가 있습니까?
<어쩌면 해피엔딩>의 ‘끝까지 끝은 아니야’라는 곡을 좋아해요. 작업을 하다 보면 ‘내가 이걸 해낼 수 있을까? 이미 망한 것 같아!’라는 생각에 휩싸이곤 하는데, 그때 이 곡의 가사를 떠올리며 어떻게든 끝까지 써보려고 합니다.
공연계에서 일하는 여성 가운데 널리 알리고 싶은 숨은 고수가 있습니까?
데뷔작 <유진과 유진>부터 함께한 이기쁨 연출님이요! 별명이 ‘확신의 J’일 정도로 계획적이고 꼼꼼한 연출님이세요. 연출님의 섬세한 대본 분석을 거쳐 무대에 오른 공연을 보면 드라마가 명확하게 보여요. 제 생각보다 더 재미있게 표현된 장면에 깜짝 놀라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미 워낙 인기가 많고 바쁘셔서 ‘유명한’ 고수인가 싶기도 하네요. <여신님이 보고 계셔> 조연출을 맡은 전서연 연출가는 진짜 숨은 고수예요. 일정 짜기, 연습 진행하기, 연습 일지 기록하기 등등 맡은 일이 많은데도 전부 완벽하게 처리해서 별명이 헤르미온느랍니다. 지난해 음악극 <괴물>의 연출을 맡아 일인극임에도 무대를 꽉 채우는 아이디어를 보여주기도 했어요. 저와는 오래전부터 극작 스터디를 함께하는 친구인데, 바쁜 와중에 글쓰기도 놓지 않는 걸 보면 정말 대단해요.
<실비아, 살다>를 구상하게 된 계기나 창작에 영감을 준 대상이 있습니까?
실비아 플라스의 삶과 조윤지 작가님의 삶이 음악 작업에 가장 큰 영감을 주었어요. <실비아, 살다>는 비범한 예술가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해요. 살아내고 있는(혹여 그러지 못한) 모든 여성의 삶이 우리 작품에 영감을 주고 있죠. 작품을 다듬는 과정에서 이러한 부분을 더욱 섬세하게 반영해 보려고 합니다.
가장 처음 본 공연은 무엇입니까?
초등학생 때 파랑새극장에서 본 어린이 뮤지컬 <미녀와 야수>요. 처음으로 뮤지컬을 본다는 생각에 극장에 가기 전부터 설레었고, 공연을 보면서도 신기하고 즐거웠던 기억이 생생해요. 그때의 순수했던 마음이 그립네요. 편안하게 공연을 즐기고 누군가와 그 경험을 나누고 싶어 하는 마음이요. 그런 마음이 드는 공연을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해봅니다.
어떤 이야기에 끌립니까?
저는 모든 사람의 삶이 하나의 우주라고 생각해요. 일상적으로 흘러가는 우리의 삶은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사실은 얼마나 복잡하고 기적적이며 때로는 절망적인지요! 얼마 전에 최은영 작가님의 소설 『밝은 밤』을 읽으면서 또 한 번 그걸 느꼈어요. 이 소설은 1930년대부터 시작하여 3대에 걸친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여운이 깊어서 한 장이 끝날 때마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책을 펼쳐야 했어요. 아무래도 저는 시대별 여성의 삶을 다룬 이야기, 그리고 감정의 결이 선명하게 살아 있는 이야기를 좋아하나 봅니다.
만나고 싶은 공연 속 여성 캐릭터가 있습니까?
<실비아, 살다>의 실비아 플라스요. 작품을 만들면서 실비아의 작품과 일기를 읽고, 시를 낭송하는 목소리 녹음본도 들었기 때문에 이미 상당히 가까워졌지만, 그럴수록 직접 만나고 싶더라고요. 만나서 무슨 얘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어요. 그냥 살짝 옆에 다가가서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눠도 좋고, 마음이 무너질 때 잠깐이라도 편히 쉴 수 있게 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아, 때로는 제 고민도 좀 털어놓고요. 그러니까 친구, 그게 좋겠네요!
공연계에서 일하는 여성 가운데 널리 알리고 싶은 숨은 고수가 있습니까?
<실비아, 살다> 재연을 통해 만난 홍지원 PD님이요. 작품을 무대에 올리면서 공연을 잘 꾸려나가려면 유연한 사고와 빠른 대처 능력이 필요하다는 걸 실감하고 있는데요, 그런 면에서 홍지원 PD님은 공연계의 소중한 인재예요. 날카롭게 상황을 판단하고, 그 상황에 맞는 최선의 방법을 치열하게 찾아내는 분이거든요. 그러면서도 따뜻한 마음을 지닌 데다, 늘 새로운 것에 관심을 두고 탐구하는 분이에요. 저는 좋은 PD가 좋은 공연을 만들고 공연 문화의 발전을 이끈다고 생각해요. 홍지원 PD님이 바로 그런 분이랍니다.
함께 작업하고 싶은 국내외 여성 창작자가 있다면 누구입니까?
<하데스타운>을 만든 싱어송라이터 아나이스 미첼이요. <하데스타운>은 애초에 뮤지컬로 기획된 작품이 아니라, 아나이스 미첼이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작사·작곡한 음반에서 시작된 공연이잖아요. 그래서인지 공연을 보면 그가 이 작품에 쏟아부은 진심과 에너지가 그대로 느껴져요. 사실 함께 작업해 보고 싶다기보다는 이분 밑에서 수련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냥 팬심이네요.
공연계에 어떤 여성의 이야기가 늘어나길 바랍니까?
최근 여성을 중심으로 한 극이 늘어나면서 남성 중심의 공연계를 바꾸기 위한 중요한 토대를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여성 ‘예술가’를 다루는 극이 너무 큰 비중을 차지해서 아쉽기도 해요. 무대에서 더 다양한 여성의 이야기, 우리의 일상과 맞닿아 있는 이야기를 보고 싶어요. 그러려면 때로는 과감한 시도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해보겠습니다.
<라흐 헤스트>를 구상하게 된 계기나 창작에 영감을 준 대상이 있습니까?
친한 연출가에게 우연히 작가 이상, 화가 김환기와 결혼했던 김향안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이 생겼어요. 도대체 어떤 분이길래 두 천재가 사랑에 빠졌을까? 그래서 김향안 선생님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고, 알아갈수록 존경하게 되었죠. <라흐 헤스트>를 통해 김향안 선생님이 살아오신 삶 자체가 하나의 예술이었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사람은 가도 예술은 남듯이, 김향안 선생님이 남긴 생의 발자국을 <라흐 헤스트>에 담고자 했어요.
가장 처음 본 공연은 무엇입니까?
어렸을 때 <오페라의 유령>이 한국어 공연을 올린다는 뉴스를 보고 엄마에게 생일 선물로 공연을 보여달라고 졸랐어요. 엄마는 신문 광고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어 가장 저렴한 티켓 두 장을 예매했죠. 그런데 극장에 가보니 무슨 오해가 있었는지 가장 비싼 좌석 두 개가 예매되어 있더라고요. 결국 엄마는 좌석 하나를 취소하고 공연이 끝날 때까지 밖에서 저를 기다리셨어요. 공연을 보는 내내 엄마에게 마음이 쓰였지만, 눈앞의 아름다운 무대와 음악에 감격해서 눈물이 흘렀던 기억이 나네요.
작가를 꿈꾸게 만든 특별한 공연이 있습니까?
어릴 때부터 뮤지컬을 좋아했고 작가를 꿈꾸었지만, 뮤지컬 작가가 되는 건 상상도 못 했어요. 그러다가 2013년 <애비뉴 Q> 내한 공연을 보러 가서 생각이 바뀌었죠. 당시 작가 지망생이었던 저는 취직을 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친구들 사이에서 혼자 멈춰 있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어요. 그래서 불안한 삶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애비뉴 Q>의 퍼펫들을 보고 큰 위로를 받았죠. 이 작품처럼 화려하지 않아도 진솔한 이야기로 위로를 건네는 뮤지컬을 써보자는 꿈이 생겼습니다.
어떤 이야기에 끌립니까? 반대로 피하는 이야기가 있습니까?
뮤지컬 공부를 시작한 뒤, 삶이 고단하다고 느낄 때마다 극장에 가서 공연을 봤어요. 그러고 나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 모든 게 다 괜찮게 느껴지고,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겼죠. 그래서 저 또한 누군가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는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피하는 종류의 이야기는 원래 살인이나 자살을 다룬 이야기였는데… 최근에 <맥베스 레퀴엠>을 쓰면서 초월했습니다!
늘 마음에 새기고 있는 공연 속 가사가 있습니까?
그동안 많은 작품을 썼지만 마음속에 가장 진하게 남아 있는 건 역시 데뷔작인 <너를 위한 글자>예요. 그중에서도 투리가 캐롤에게 불러주는 노래 ‘너를 위한 글자’의 가사를 언제나 마음에 새기고 있어요. “이건 너를 위한 나의 작은 발명품. 너만의 세상에 갇혀 있지 않게 해줄게. 계속 꿈을 꿀 수 있게 해줄게.” 글을 쓸 때 제 마음도 이와 같아요. 대본을 쓰기 위해 이것저것 조사하고 공부하다 보면 제 세상이 넓어지는 느낌이 들어요. 그렇게 완성한 공연이 관객 여러분을 또 다른 세상으로 초대할 수 있길 바랍니다.
만나고 싶은 공연 속 여성 캐릭터가 있습니까?
<라흐 헤스트>의 주인공인 김향안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요. 제가 감히 당신의 이야기를 썼는데, 공연이 어떠셨는지 와인 한잔하면서 후기를 듣고 싶습니다.
함께 작업하고 싶은 국내외 여성 창작자가 있다면 누구입니까?
박소영 연출님! 저 멀리서 짝사랑 중입니다.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연출님의 애정 어린 시선을 좋아해요. 연출하신 작품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건 <태일>인데, 공연을 보면서 ‘또르륵’이 아니라 ‘엉엉’ 울었어요. 언젠가 작가와 연출가로 만날 수 있도록 오늘도 열심히 글을 쓰겠습니다!
<레드북>을 연출하면서 강조하고 싶었던 작품 속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요즘 가장 마음에 담고 있는 작품 속 문장은 “당연한 것들이 당연해질 때까지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어요”입니다. 현재는 당연한 것들이 과거에는 이상하게 여겨졌듯, 지금은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 언젠가는 당연해지는 날이 올 겁니다.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 우리는 침묵하지 말아야 하고요. 연습실에서 안나 역 배우들과 이런 이야기를 자주 나눕니다.
연출가를 꿈꾸게 만든 특별한 공연이 있습니까?
저는 공연이라는 장르를 늦게 접했습니다. 학창 시절 제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 것은 영화와 드라마였죠. 그런데 연극학과 연출 전공으로 대학에 들어간 후,
김동연 연출님이 연출하고 김강우 배우가 출연한 학교 공연 <햄릿>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텍스트로만 접한 이야기가 눈앞에 생동감 있게 펼쳐지는 순간 첫눈에 반한 듯한 설렘을 느꼈습니다.
어떤 이야기에 끌립니까? 반대로 피하는 이야기가 있습니까?
연출가로서든 관객으로서든 방향성이 분명한 이야기에 끌립니다. 창작진이 ‘이 장면이 꼭 필요할까? 어떤 식으로 표현해야 할까?’에 대해 깊이 고민한 티가 나는 공연에 마음이 갑니다. 반대로 ‘이때쯤 이런 장면이 나와야지!’라는 관성적인 생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 쓸데없이 자극만을 추구하는 이야기는 피합니다. 그런 공연을 보면 ‘우리 삶은 다양한데 왜 이야기를 꼭 이런 식으로 풀어가야 하지?’라는 의문이 들어요.
늘 마음에 새기고 있는 공연 속 가사가 있습니까?
“이게 나의 가는 길이요, 희망조차 없고 또 멀지라도, 멈추지 않고 돌아보지 않고, 오직 나에게 주어진 이 길을 따르리라.” <맨 오브 라만차>의 ‘이룰 수 없는 꿈’ 가사입니다. 언제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제가 가야 할 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노래예요.
만나고 싶은 공연 속 여성 캐릭터가 있습니까?
<마틸다>의 똑똑한 소녀 마틸다를 만나고 싶습니다. 마틸다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싶을 때가 있거든요. 살다 보면 누구나 약간의 똘끼가 필요할 때가 있잖아요?
공연계에서 일하는 여성 가운데 널리 알리고 싶은 숨은 고수가 있습니까?
저의 조연출 조민정, 전서연, 박세연, 김소림, 김슬기입니다. 우연히 다 여성인데요, 저희 공연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자 앞으로 멋진 창작자가 될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미래가 기대됩니다.
함께 작업하고 싶은 국내외 여성 배우가 있다면 누구입니까?
이정은, 최정원 선배님입니다. 후배를 만날 기회는 많은데 선배를 만날 기회는 많지 않아서, 함께할 수 있다면 경험 많은 선배들의 현명함과 단단함을 배우고 싶어요. 그리하여 저도 누군가에게 좋은 선배가 되고 싶습니다.
여성 창작자로서 한계에 부딪힌 경험이 있습니까?
새내기 연출가 시절, 어린 여자라는 이유로 스태프들이 저를 무시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창작 지원금을 받기 위한 쇼케이스 경연 무대를 준비하던 때였죠. 그들은 제가 무슨 말을 하든 “네가 잘 몰라서 그러나 본데”라는 식으로 반응했고, 제 앞에서 대놓고 “몇 살이래?”라고 수군거리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 경연에서 우승한 다음, 제작사 측에 절 무례하게 대한 스태프와는 더 이상 함께 일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그 스태프를 보며 ‘저런 선배는 되지 말자’라고 다짐했는데, 지금이 바로 그 다짐을 되새겨야 할 때인 것 같아요.
<브론테>를 처음 구상하게 된 계기나 창작에 영감을 준 대상이 있습니까?
동료들과의 친목 자리에서 오세혁 연출님이 모두에게 책을 한 권씩 선물해 주셨어요. 그때 받은 책이 바로 『브론테 자매 평전』이에요. “이 이야기, 네가 뮤지컬로 만들어보지 않을래?”라는 연출님의 권유에서 <브론테>가 탄생했죠. 브론테 자매의 이야기를 읽으며 저는 평소 좋아하던 영화 <어거스트 러쉬>를 떠올렸어요. 영화가 주인공을 둘러싼 공기, 소음, 환경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는데, 저도 브론테 자매를 둘러싼 세상을 음악으로 표현해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어쿠스틱 기타의 퍼커시브(기타의 바디나 줄을 때려서 소리를 내는 주법)와 타악기를 이용해 강한 울림을, 피아노와 첼로를 이용해 아름답고 깊은 선율을 만들어냈죠.
가장 처음 본 공연은 무엇입니까?
고향이 제주도라서 어릴 때 공연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어요. 대학 입학 후 육지로 올라와서 처음으로 친언니를 따라 뮤지컬을 보러 갔죠. 그때 본 공연이 <지킬 앤 하이드>인데, 한 명의 배우가 두 가지 인격을 연기하고, 1막에 나왔던 멜로디를 2막에서 다르게 편곡해 노래하고, 앙상블이 계획된 동선과 안무를 정확하게 해내는 모습이 참 신기하고 재미있었어요. 서로 다른 장르의 예술이 모여 하나의 뮤지컬이 된다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작곡가를 꿈꾸게 만든 특별한 공연이 있습니까?
뮤지컬 작곡가를 꿈꾸게 만든 건 공연에 앞서 디즈니 애니메이션이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만화책을 굉장히 좋아했는데,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만화 속 인물이 살아 움직이는 판타지를 실현시켜 주었거든요. 뮤지컬 역시 무대에서만 실현 가능한 판타지를 보여줄 때 가장 벅찬 감동을 느끼게 만든다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어쩌면 해피엔딩> 사랑합니다!)
어떤 이야기에 끌립니까?
모든 공연은 관객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쳐요. 그래서 따뜻하고 웃음을 주는 이야기, 현실에서 터놓고 얘기하기 힘든 마음을 꺼내 보이는 이야기에 끌려요. 공연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 일기장에 ‘아, 오늘 잠깐이나마 좋은 시간이었다~’라고 적어놓고 잠들 수 있는 그런 이야기요.
늘 마음에 새기고 있는 공연 속 가사가 있습니까?
“그 꿈 이룰 수 없어도, 싸움 이길 수 없어도, 슬픔 견딜 수 없다 해도, 길은 험하고 험해도, 정의를 위해 싸우리라. 사랑을 믿고 따르리라. 잡을 수 없는 별일지라도, 힘껏 팔을 뻗으리라.” <맨 오브 라만차>의 ‘이룰 수 없는 꿈’은 어떠한 선택 앞에서도 용기를 주는 노래예요.
공연계에서 일하는 여성 가운데 널리 알리고 싶은 숨은 고수가 있습니까?
창작 동료이기 이전에 저한테 가장 밥을 많이 해주는 친구 <청춘소음>의 변효진 작가를 알리고 싶습니다. 어려운 이야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미있게 잘 풀어내는 작가예요. 자신의 가치관을 대본에 녹여 넣으려고 끊임없이 고뇌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볼 때면 친구지만 존경심이 들기도 해요. 평소 “우리는 어떠한 방향으로 살아가야 하고, 어떠한 이야기를 만들어야 할까?”라는 주제로 대화를 자주 나누는데, 이러한 고민을 잘 다듬어서 함께 좋은 작품을 선보이고 싶어요.
공연계에 어떤 여성의 이야기가 늘어나길 바랍니까?
예전에 뮤지컬 창작자의 작품 개발을 돕는 프로그램에 지원했을 때, 면접관에게 “어떤 뮤지컬을 만들고 싶나요?”라는 질문을 받았어요. 제 대답은 “여성이 많이 나오는 뮤지컬을 만들고 싶습니다!”였죠. 그땐 대부분의 뮤지컬이 남성 캐릭터 중심이었거든요. 실력은 출중하지만 보여줄 기회가 없는 제 주위의 많은 여성 배우를 보며 안타까움을 느꼈어요. 만약 똑같은 질문을 지금 다시 받는다면 “잊힌 여성들의 이야기가 늘어나길 바랍니다.”라고 대답하고 싶어요.
<비밀의 화원>을 연출하는 데 영감을 준 대상이 있습니까?
저희 어머니는 식물 키우기에 진심인 분입니다. 한때는 마당이라고 할 수도 없는 대문 앞 작은 공간부터 집 안 구석구석까지 녹색이 깃들어, 늘어진 나뭇잎을 손으로 헤치며 방으로 들어가야 했죠. 어두운 밤에는 그 집이 음산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들 때면 숲속에서 깨어나는 듯한 싱그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러다 3년 전쯤 이사를 했는데, 이전 집 앞을 지나면서 들여다보니 마당이 볼품없게 변해 있었어요. 어머니의 애정 어린 손길이 떠나자 생명이 사라져 버렸더군요. 누군가의 지속적인 관심과 올바른 사랑이 만들어내는 생명력. <비밀의 화원>을 통해 그런 생명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연출가를 꿈꾸게 만든 특별한 공연이 있습니까?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 때 청소년기를 보낸 저는 충무로 키드가 되겠다는 원대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연극영화학과 신입생이 되자마자 “영화를 잘하기 위해서는 연극을 경험해 봐야 한다”는 선배들의 꼬드김(영화보다 연극 전공자가 적었기에 아군을 늘리려는 속셈이었지요!)에 넘어가 해롤드 핀터의 <배신>이라는 연극에 소품 팀으로 투입되고 말았습니다. 처음으로 백스테이지를 밟고, 내가 만든 소품을 배우에게 쥐어주고, 암전 중에 소품 전환을 했던 그 2주의 시간이 제 마음속에 꽤 깊이 남았던 모양입니다. 결국은 연극으로 전공을 바꾸고 지금까지 업으로 삼고 있으니까요.
어떤 이야기에 끌립니까?
제가 몸담은 극단 ‘창작집단 LAS’에서 2016년 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를 공연한 이후 여성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에 마음이 가기 시작했어요. 처음 뮤지컬 연출을 제안받았을 때 겁이 났지만 “할래요!”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작품이 허난설헌을 주인공으로 한 <난설>이었기 때문입니다.
리바이벌해서 올리고 싶은 공연이 있습니까?
마샤 노먼의 연극 <잘 자요, 엄마>를 연출하는 게 꿈입니다. “엄마, 나 자살할 거야.”라는 첫 대사로 시작되어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이 모녀의 이야기를 모든 공연을 통틀어 가장 좋아해요. 대한민국의 딸들에게 ‘엄마’란 속절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소재이지요. 제가 이 이야기를 온전히 품어낼 수 있을 만큼 나이가 들고 깊이와 여유가 생겼을 때 도전하고 싶습니다.
뮤지컬로 만들어졌으면 하는 실존 여성 인물의 이야기가 있습니까?
많은 사람이 헬렌 켈러를 시청각 장애를 극복한 인물로 기억할 뿐, 그가 사회주의 운동, 여성 참정권 운동, 사형 폐지 운동, 아동 노동과 인종 차별 반대 운동을 실천한 급진적인 사회 운동가였다는 사실은 잘 모르는 듯합니다. 제가 어린 시절 읽은 위인전에도 그런 내용은 없었죠. 나이를 먹고 헬렌 켈러의 진면목을 알게 된 뒤부터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리극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동료 정지혜 소리꾼에게 헬렌 켈러 평전을 선물해 둔 상태입니다! 시각과 청각이 차단된 인물이 느끼는 세상을 잘 표현해 보고 싶어요.
여성 창작자로서 한계에 부딪힌 경험이 있습니까?
한 제작사 대표님에게 이런 얘기를 들었어요. “연출님이 센 분이라고 소문난 거 알죠? 좀 부드럽게 해요.” 그 말을 들으니 이 바닥에서 살아남기 위해 싸움닭이 돼야 했다던 이전 세대 여성 연출가들의 일화가 떠올랐습니다. 선배들은 머리를 짧게 자르고, 청바지와 야상만 입고, 술자리에서 끝까지 버티며 남자들과 기 싸움을 했다지요. 저 역시 무의식중에 살아남기 위해 드세게 변한 걸까요? 아니면 불합리한 상황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의지가 저를 강한 성격으로 만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저 말을 들었을 때, 전 이렇게 답했습니다. “세죠. 근데 안 건드리면 순해요.”
공연계에 어떤 여성의 이야기가 늘어나길 바랍니까?
얼마 전 <종의 기원>을 연습하면서 주인공 한유진이 여자라도 이야기 진행에 무리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피도 눈물도 없는 여성 사이코패스! 그렇게 상상하자 이야기를 다르게 감각하게 되더군요. 많은 창작자가 여성의 이야기를 할 때 사회적 시선 때문에 고통받는 여성, 또는 올바르고 강한 여성을 그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여성 또한 인간이고, 인간은 아주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잖아요. 여성의 여러 군상, 하다못해 배울 점이라곤 하나도 없는 꼴불견인 모습까지도 가감 없이 보고 싶고, 보여주고 싶습니다.
<실비아, 살다>를 구상하게 된 계기나 창작에 영감을 준 대상이 있습니까?
5년 전쯤 심각한 우울증에 빠진 적이 있어요. 스스로가 쓸모없는 존재로 느껴져서 세상을 떠날 마음까지 먹었죠. 시간이 흘러 우울증에서 빠져나온 저는 과거의 저에게 위로와 응원을 보내고 싶었어요. 나아가 지금도 다른 사람이 술을 탄 물을 마시며 취한 자기 자신을 탓하고 있을 누군가에게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죠. 그래서 한 여자의 인생을 세 시기로 나눠 세 명의 배우가 연기하는 극을 구상했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를 읽었는데, 그 안에 저의 경험과 고민이 신기할 만큼 똑같이 담겨 있더라고요. 언젠가 꼭 이 여자의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생각해 보니 제가 구상하고 있던 극과 다른 이야기가 아니었어요. 그렇게 저와 실비아의 이야기로부터 <실비아, 살다>가 시작되었습니다.
가장 처음 본 공연은 무엇입니까?
초등학교 6학년 때 <쏠티와 함께>라는 뮤지컬을 봤는데, 그때 객석에서 느낀 충격을 아직도 잊을 수 없어요.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큰 희열이었죠. 그 공연을 보고 나서 혼자 배우 오디션을 보러 갔고, 그때부터 저의 뮤지컬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종류의 이야기에 끌립니까? 반대로 피하는 종류의 이야기가 있습니까?
솔직하고 적나라하고 현실적이면서 위트와 희망이 있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반대로 관심이 덜 가는 이야기는 역사물처럼 거시적인 이야기입니다.
저의 관심이 워낙 ‘사람’에 집중되어 있기도 하고,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쪽 방면으로는 지식이 부족한 편이라서요.
만나고 싶은 공연 속 여성 캐릭터가 있습니까?
<키키의 경계성 인격 장애 다이어리>라는 작품을 준비 중인데, 경계성 인격 장애를 가진 이 작품 속 주인공 키키를 만나고 싶어요. 저처럼 옆에 있는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면이 있지만, 참 솔직한 친구예요. 저는 결함이 있지만 솔직한 사람에게 매력을 느껴요. 키키와 술 한잔하면서 깔깔거리고 싶네요.
공연계에서 일하는 여성 가운데 널리 알리고 싶은 숨은 고수가 있습니까?
<실비아, 살다>를 함께하고 있는 김승민 작곡가와 홍지원 PD님입니다. 김승민 작곡가는 제 인생의 동반자이자 술친구이자 저의 글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쌔끈하게 표현해 주는 작곡가입니다. 홍지원 PD님은 저의 작품을 정확하게 이해할 뿐 아니라 진심 어린 애정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나올 수 있게 해주는, 그래서 게으른 제가 일하고 싶게 만드는 그토록 꿈꿔왔던 PD님입니다. 두 분과 함께 공연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고 큰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두 분 다 도망가지 못하게 제 옆에 오래오래 붙들어 놓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 중입니다.
여성 창작자로서 한계에 부딪힌 경험이 있습니까?
작가보다는 연출가로 일할 때 가끔 의문이 생기곤 합니다. ‘내가 남자 연출가여도 이런 상황이 펼쳐질까?’ 그때마다 다음과 같은 생각이 뒤따릅니다. ①더 미친 사람이 되어야 할까? ②내가 더 부족함 없이 잘하는 사람이 되자. ③나도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더 경각심을 가져야겠다.
공연계에 어떤 여성의 이야기가 늘어나길 바랍니까?
어떤 이야기든 여성의 이야기가 더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여성 배우 위주의 공연이 남성 배우 위주의 공연보다 흥행하기 어려운 현실을 마주할 때면 창작자로서, 또 제작자로서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럴수록 더 좋은 작품을 만들면 관객분들이 찾아줄 거라고 마음을 다잡습니다. 앞으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마리 퀴리>를 구상하게 된 계기나 창작에 영감을 준 대상이 있습니까?
저의 딸 조유빈입니다. 당시엔 글도 잘 못 읽는 어린아이였죠. 하루는 유빈이가 헌책방 구석에서 마리 퀴리의 위인전을 들고나왔는데, 부끄럽게도 저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아이에게 제대로 알려주지 못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마리 퀴리에 대해 찾아보면서 그의 위대한 업적 뒤에 가려진 좌절과 절망의 순간을 알게 되었고, 그때마다 다시 일어나는 마리의 모습이 아름답다고 느꼈습니다. 딸에게 그런 마리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이제 딸은 중학생이 되었고, 저는 마흔 중반이 되었습니다. 저희는 실제로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매번 마리의 삶에서 길을 찾고 위로를 얻습니다. 100년 전의 마리는 그렇게 항상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에 끌립니까? 반대로 피하는 이야기가 있습니까?
사람이 태어나 누군가와 어울려 살아가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섬세하고 잔잔하게 그려낸 작품을 좋아합니다. 그런 작품을 보면 한 템포 쉬며 맑은 호수에 나를 비춰보는 듯한 기분이 들어 행복해집니다. 그렇지만 가끔 멋진 ‘척’을 하기 위해 사람을 도구로 쓰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때, 멋지지?’하고 뽐내려는 창작자의 노골적인 의도가 보이면 씁쓸해집니다.
만나고 싶은 공연 속 여성 캐릭터가 있습니까?
누구보다 <마리 퀴리>의 마리를 만나고 싶습니다. 프랑스행 기차 옆자리에 앉아 그의 꿈을 몹시 응원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당신은 앞으로 가장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고, 믿었던 자기 자신과도 처절하게 싸워야 할 테지만, 그래도 끝까지 스스로를 믿으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작년 여름, 폴란드 마리 퀴리 박물관에서 실제 마리 퀴리의 후손을 뵐 기회가 있었습니다. 사진으로 본 마리처럼 반듯하고 단단한 눈빛과 부드러운 입매를 가진 분이셨습니다. 그 순간 진짜 마리를 만난 듯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쓴 이야기가 혹여 누가 되지는 않았는지 되짚다 보니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러나 행사가 끝나고 그분은 저를 따듯하게 꼭 안아주셨고, 저는 마음속으로 더 숙고하며 쓰겠다고 마리와 약속했습니다.
뮤지컬로 만들고픈 실존 여성 인물의 이야기가 있습니까?
100년 전 대구 사문진 나루터에 우리나라 최초의 피아노가 들어왔습니다. 선교사인 사보담 부부, 더 정확히는 부인인 에피의 피아노가 한국에 들어온 것입니다. 이 신비한 물건을 처음 접한 사람들은 ‘귀신통’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다룬 작품은 이미 나와 있지만, 저는 옛 문화와 새 문화의 충돌로 인해 갈등이 생기는 이야기보다는 원래 있던 갈등이 새로운 바람으로 인해 수면 위에 드러나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17세 소녀 연화가 태평양을 건너온 23살의 에피를 만나고, 처음 들은 피아노 연주에 매료되면서 시작되는 <에피의 피아노>라는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공연계에서 일하는 여성 가운데 널리 알리고 싶은 숨은 고수가 있습니까?
<테레즈 라캥> <엔딩 노트> 등을 쓴 한혜신 작곡가 겸 음악감독입니다. 그는 늘 사람에 대해 생각하고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선택한 길이 맞는지 항상 의심하고 경계하는 창작자입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사려 깊고 진중합니다. 단순히 듣기 좋고 돋보이는 음악 대신 서사를 돕고 작품 전체의 조화를 우선시하는 음악을 씁니다. 아동·청소년극에도 관심이 많은 그는 늘 아이의 마음을 간직한 순수한 사람입니다. 그의 곁에서 작품에 대한 고민을 나눌 수 있어 행복합니다.
여성 창작자로서 한계에 부딪힌 경험이 있습니까?
엄마로서 아이가 아플 때 가장 힘들었습니다. 어떤 날은 아파서 데굴데굴 구르는 아이를 데리고 응급실에 가면서 노트북을 챙기기도 했습니다. 아픈 아이를 옆에 두고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는 것이 죄스러워 눈물이 났죠. 그런데 아이는 제게 의외의 말을 해주었습니다. 그래도 쓰라고, 글을 쓰지 않는 엄마는 자기가 아는 엄마가 아닐 것 같다고요. 지금도 ‘글 쓰는 엄마’를 많이 이해하고 사랑해 주는 딸 덕분에 맘껏 쓰고 있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 저를 대신해 아이를 돌봐주고, 작가가 된 저를 자랑스럽게 여겨주는 이웃 엄마들 또한 저에게 큰 힘이 되는 존재입니다.
<쿠로이 저택엔 누가 살고 있을까?>를 구상하게 된 계기나 창작에 영감을 준 대상이 있습니까?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을 보면 참 뻔뻔하게 거짓말을 잘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출한 박스 하나를 무대에 올려두고 집이라고 했다가, 관이라고 했다가 자유자재로 말을 바꾸며 능청을 떨잖아요. 이런 걸 소위 무대 언어, 연극적 약속이라고 하죠. 이러한 공연만의 특성을 잘 살린 뮤지컬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스크린 속 배우가 아닌 무대에 선 배우가 가장 잘하는 걸 보여주자! <쿠로이 저택엔 누가 살고 있을까?>는 이러한 발상에서 시작했습니다. <쿠로이 저택엔 누가 살고 있을까?>에서 배우들은 무대 위에 버젓이 서 있는 귀신 옥희를 못 본 척합니다. 배우와 관객 사이의 약속에 의해 이 거짓말은 무대 위 현실이 되죠.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는 약속. 저는 이것이 소설이나 영화, 그 어떤 장르도 흉내 낼 수 없는 공연예술만의 특별한 문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연출가를 꿈꾸게 만든 특별한 공연이 있습니까?
대학 시절 저에게 뮤지컬은 연기하다가 갑자기 춤추고 노래하는 이상한 장르였습니다. 배우가 말하다 말고 갑자기 노래를 부르면 약간 불편하기까지 했죠. 그러던 어느 날, 대학 선배가 리딩 공연을 한다기에 광흥창이라는 낯선 동네까지 보러 갔는데요, 그날이 제가 살면서 ‘뮤지컬 진짜 재미있다’라는 생각을 한 첫 번째 날입니다. 처음으로 말을 하다가 노래를 하는 게 당연하게 느껴지는 신기한 경험을 했죠. 지금까지도 그날만큼 푹 빠져서 공연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날 제가 본 건 바로 한정석 작가님의 <여신님이 보고 계셔> 첫 리딩 공연입니다.
어떤 이야기에 끌립니까?
장르적 특성과 잘 어울리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뮤지컬로 잘할 수 있는 이야기가 응당 뮤지컬이 되었을 때 마음이 가요. 이렇게 쓰고 보니 아직은 저의 안목이 장르를 비틀고 뛰어넘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것 같기도 합니다….
리바이벌해서 올리고 싶은 공연이 있습니까?
바야흐로 반려 식물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리틀 샵 오브 호러스>를 다시 올릴 때입니다. 누군가 우연히 식인 식물을 살 수도 있으니까요.
늘 마음에 새기고 있는 공연 속 가사가 있습니까?
<물랑루즈!>의 “진실, 아름다움, 자유, 사랑Truth, Beauty, Freedom, Love”입니다. 처음 이 가사를 접한 건 영화 <물랑루즈>를 통해서였는데, 뮤지컬에도 이 가사가 그대로 쓰여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참 단순하고 평범한 네 개의 단어이지만, 그 안에 인류의 역사와 세상의 전부가 담겨 있다고 저는 아직 믿고 있습니다.
여성 창작자로서 한계에 부딪힌 경험이 있습니까?
여성 창작자라는 단어가 들어간 질문을 들으면 먼저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나는 여성 창작자로서 잘하고 있나? 나는 ‘진정한’ 여성 창작자인가? 여성 캐릭터를 만들 때 저는 굉장히 조심합니다. 캐릭터가 너무 전형적이지 않은지, 성적으로 다뤄지지 않는지, 도구적으로 소비되지 않는지 신중하게 체크하고 검열하죠. 그리고 그때마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한계를 느끼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자유롭지 않은 느낌이 드니까요. 하지만 여성이 당연하게 권력을 휘어잡고, 우리가 그 권력을 당연하게 희화화하며 웃을 수 있는 날이 오기 전까지는 성공한 여자, 강한 여자, 멋진 여자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생각입니다. 그건 ‘여성 창작자’가 아니라 동시대를 사는 ‘창작자’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공연계에 어떤 여성의 이야기가 늘어나길 바랍니까?
‘여성’이 붙지 않는 여성의 이야기가 늘어나길 바랍니다. ‘여성’ 예술가, ‘여성’ 정치인이 아닌 그냥 예술가, 정치인으로 그 사람을 조명하는 이야기요. 더 이상 ‘여성’을 붙이지 않아도 존재 그 자체만으로 가치 있는 사람들, 이야기들이 늘어나길 꿈꿉니다. 그런 세상은 아마 성을 향한 모든 차별이 없어질 때에야 가능하겠죠. 생각보다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리베카 솔닛의 말처럼 역사적으로 페미니즘은 이기고 있고, 승리할 것이며, 승리할 수 있습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22호 2023년 3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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