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얘기를 들려줘요
<레드북> 박진주·신성민
당연한 것들이 당연해질 때까지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고, 결국엔 세상이 허락하지 않은 자신의 삶을 써 내려간 한 여성의 이야기. <레드북>의 안나는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마치 우리의 만남처럼 예상할 수 없지만 기대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그리고 이 표현은 세 번째 시즌으로 돌아온 <레드북>에 새롭게 이름을 올린 두 배우 박진주와 신성민에게 그대로 옮길 수 있다. 출연을 예상할 수 없었지만, 무대를 기대하게 만드니까!
나를 기대해요
박진주
다시 무대에서
최근 뮤지컬영화 <영웅>이 개봉하며 노래 실력이 다시금 회자되고 있어요. <영웅>의 ‘마진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처음부터 진주 씨를 염두에 둔 캐릭터라고 들었는데, 출연 제안을 받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어요?
천만 감독으로 불리는 윤제균 감독님께서 저라는 배우를 알고 계신 것도 신기한데 절 생각하며 시나리오를 쓰셨다고 해서 깜짝 놀랐어요. 게다가 마진주는 뮤지컬 <영웅>에 나오는 링링을 각색한 캐릭터잖아요. 링링의 솔로곡 ‘이것이 첫사랑일까’를 영상으로 접하고 언젠가 한번 불러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그 역할을 영화로 옮기면서 저를 떠올려 주셨다는 사실에 감격해서 울었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막상 영화에는 ‘이것이 첫사랑일까’를 부르는 장면이 나오지 않아서 섭섭했겠어요.
사실 그 노래를 부르는 장면도 촬영은 다 했어요. 마진주가 환상 속에서 동하와 자전거를 타고 꽃다발을 선물 받으며 예쁘게 사랑하는 모습을 담았죠. 그런데 편집을 해놓고 보니 모두가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와중에 갑자기 밝은 사랑 노래가 튀어나오는 게 어색하더라고요. 제가 봐도 흐름상 이 장면은 빠지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어서 서운하지 않았어요. 좋아하는 뮤지컬 넘버를 열심히 불러볼 기회가 있었다는 것, 감독님이 그런 제 모습을 공들여 촬영해 주셨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해요.
뮤지컬영화는 한국에서 자주 시도되지 않는 장르인데, 촬영 과정에서 색다른 점이 있었나요?
뮤지컬영화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은 배우가 연기를 하다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는 걸 이상하게 여길 수 있잖아요. 그럴수록 제가 더 진심을 다해 연기해야 관객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최대한 상황에 몰입해서 진짜 존재했던 인물처럼 연기하려고 노력했죠. 노래하는 장면은 생생한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사전 녹음한 노래에 맞게 립싱크를 하는 대신 현장에서 동시 녹음을 진행했어요. 만약을 위해 따로 녹음도 진행했지만, 결국 영화에 사용된 건 대부분 현장에서 직접 부른 노래예요.
지난해 개봉한 <정직한 후보2>도 장유정 감독의 뮤지컬 <김종욱 찾기>를 재밌게 보았기 때문에 출연을 결심했다고 들었어요. 언제부터 뮤지컬을 좋아했나요?
고등학교 연극부에서 활동하면서 뮤지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제가 좋아하는 연기, 노래, 춤을 모두 할 수 있는 장르가 바로 뮤지컬이더라고요. 그때부터 온갖 공연 영상을 찾아봤어요. <미스 사이공> 공연 영상을 보며 뮤지컬배우를 꿈꾸었고, <김종욱 찾기>는 노래를 다 외우고 있을 정도로 좋아해요. <스프링 어웨이크닝> <넥스트 투 노멀>도 좋아하는 작품이에요.
서울예대에서 뮤지컬을 전공했고 여러 방송을 통해 뛰어난 노래 실력을 뽐냈지만, 데뷔 초기를 제외하면 뮤지컬과는 인연이 없었어요.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에 출연해 MBC방송연예대상에서 신인상을 받는 등 어느 때보다 대중에게 큰 관심을 받고 있는 지금, 다시 뮤지컬에 뛰어들기로 결심한 이유가 궁금해요.
뮤지컬 무대에 서는 건 <막돼먹은 영애씨> 이후 10년 만이에요. 그동안 출연 제안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계속 사양해 왔어요. 마음 한편에 저에 대한 의심이 있었거든요. 내가 다시 뮤지컬에 도전해서 잘해낼 수 있을까? 실력 있는 뮤지컬배우가 이렇게 많은데 내가 그들과 한 무대에 서도 될까? 사실 작년에 <놀면 뭐하니?>에 출연하기 전에도 걱정이 많았어요. 저는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는 편이거든요. 그런데 용기를 내어 출연하고 뜻밖에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마음가짐이 달라졌어요. 좀 더 나를 믿고 다양한 도전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마침 그 시기에 <레드북> 출연 제안을 받았고요. <레드북>은 전부터 관심 있던 작품이라서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레드북>이라는 작품의 어떤 점에 끌렸는데요?
처음에는 작품 내용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뮤지컬 넘버를 먼저 접했어요. 가장 먼저 접한 노래가 1막 마지막 곡인 ‘나는 야한 여자’인데, 음악이 너무 좋아서 듣자마자 끌렸어요. 스스로를 당당하게 나쁜 여자라고 칭하는 안나의 모습도 멋있었고요. 안나는 자기 생각이 명확한 사람이에요. 그 생각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얘기하는 데에도 거침이 없죠. 자기 목소리를 내고 싶지만 눈치가 보여 움츠러들었던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안나를 보며 시원한 대리 만족을 느끼실 거예요.
용기 있게 다가가기
안나의 당돌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성격이 진주 씨의 이미지와 잘 어울려요.
처음 안나 역을 제안받았을 때는 제가 이 역할을 잘 소화할 수 있을까 두려운 마음이 앞섰어요.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모험보다는 안전한 선택을 추구하는 사람이거든요. 진취적인 성격의 안나하고는 다르죠. 고민하다가 평소 친하게 지내는 강기둥 배우에게 물어봤어요. <레드북>이라는 작품을 아느냐고, 내가 안나 역을 맡으면 어떨 것 같으냐고. 그랬더니 정말 좋은 작품이라면서 저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을 믿고 용기를 냈어요. 이제부터 열심히 달려보려고요. 안나는 아주 빨리 걷는 사람인데 저는 천천히 걷는 사람이라서, 안나를 따라잡으려면 열심히 뛰어서 쫓아가야 해요.
강기둥 배우는 작년에 <레드북>을 만든 한정석 작가, 이선영 작곡가의 신작에 주인공으로 출연했는데, 재밌는 인연이네요.
<쇼맨> 말씀하시는 거죠? 저도 공연을 봤는데, 진짜 많이 울었어요. 네불라가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모습이 마치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창작진이 인간이 지닌 외로움과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굉장히 잘 알고 계신 분들인 것 같다고 생각했죠. 나중에 <레드북>과 같은 창작진의 작품이라는 걸 알고 깜짝 놀랐어요. <영웅>에 함께 출연했던 정성화 선배님도 <레드북>에 대해 잘 알고 계셨어요. 캐스팅 소식을 전하니까 좋은 작품에 출연하게 돼서 잘됐다며 축하해 주셨죠. 선배님이 보컬 선생님도 소개해 주셔서 틈틈이 뮤지컬 무대에 맞는 발성법을 익히고 있어요.
극 중에서 안나는 당대 사회가 여성에게 기대하는 모습대로 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억압을 받잖아요. 진주 씨도 남들 눈치를 보느라 진짜 자기 모습을 보여주기 힘들었던 경험이 있나요?
저는 데뷔작이었던 영화 <써니>에서 욕쟁이 황진희 역으로 얼굴을 알리면서 자연스레 끼 많고 웃긴 배우라는 이미지가 생겼어요. 다른 작품에서도 비슷한 이미지의 역할로 절 찾아주셨고요. 그런데 실제 저는 겁이 많고, 낯도 많이 가리고, 욕은 절대 안 하는 사람이거든요. 대중에게 실제와 다른 이미지로 알려지는 게 부담스러웠지만, 많은 분들이 그런 제 모습을 사랑해 주시니 외면할 수 없었어요.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죠. 때로 너무 어깨가 무거울 때면 이 상황을 감사하게 여기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지금은 정말로 감사해요.
어떤 점이 감사한가요?
그런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저도 몰랐던 제 모습을 알게 됐거든요. <써니>로 데뷔하기 전까지 저는 제가 그런 연기를 할 수 있을지도 몰랐어요. 돌아보면 절 떠밀어 준 주변 환경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큰 욕심 없이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하는 스타일인데, 주변에서 자꾸 이것저것 더 해보라며 도전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저를 내몰더라고요. (웃음) 제 의지로 시작한 건 아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걸 안 했으면 어쩔 뻔했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성장해 있는 제 모습을 발견해요. 그러면서 조금씩 내 안에 나를 가두지 말아야겠다는 깨달음을 얻었어요.
배우는 매 작품에서 새로운 역할을 만나 계속해서 도전을 해나가는 직업이잖아요. 그런 면에서 부담감을 떨치기 힘들 것 같은데, 그럼에도 배우가 나의 천직이라고 느끼는 순간이 있나요?
연기를 안 할 때요. (웃음) 연기할 때는 매 순간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연기를 하지 않을 때 더 큰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난 배우를 해야 하는 사람이구나’ 생각해요. 그리고 배우라는 직업만이 지닌 특별한 장점이 있거든요. 그냥 박진주라면 살아보지 못했을 다양한 인생을 작품 속에서 살아볼 수 있다는 거요. 그렇게 한 작품을 마치고 나면 어느새 작품 속 캐릭터가 저한테 배어 있더라고요. 제가 전보다 진취적으로 변할 수 있었던 것도 그동안 연기한 캐릭터들로부터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배웠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이번에 안나와의 만남이 더 기대돼요. 저는 도전을 무서워하는 사람인데 안나는 도전의 아이콘이잖아요! 안나를 만나고 나면 제가 조금 더 용감해질 것 같아요.
“난 뭐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 안나의 이야기는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이라는 선언으로 끝을 맺죠. 같은 표현으로 자신을 소개한다면 그 안에 어떤 말을 넣고 싶어요?
나는 ‘지금은 조그맣지만 얼마나 커질지 모르는’ 사람이야! 뮤지컬을 공부하던 어린 시절부터 무대는 신성한 곳이라고 배워왔어요. 관객과 배우, 스태프 모두에게 너무나 소중한 공간인데 오랫동안 무대에 서지 않았던 제가 오랜만에 다시 무대에 오른다는 사실이 조심스럽고 두렵기도 해요. 하지만 무대에 서기로 결심한 이상 뒤돌아보지 않을 거예요. 제 몸을 촛불처럼 태워서라도 이 사랑스러운 작품이 더욱 빛날 수 있도록 노력할 테니 지켜봐 주세요.
천천히, 그리고 차근차근
신성민
기대에 다가가기 위해
최근 <여신님이 보고 계셔>(이하 <여보셔>) 10주년 토크 콘서트에 스페셜 게스트로 참여했어요. 초연에 참여한 작품이 10주년을 맞아서 감회가 특별할 것 같아요.
창작뮤지컬이 10년간 사랑받는 게 흔한 일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여보셔>는 작품을 함께 만들었던 배우, 창작진과의 관계가 참 특별했어요. 작품을 만들면서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그 덕분에 공연이 끝난 후에도 계속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거든요. 그래서인지 토크 콘서트 리허설 때, 무대에 설치된 스크린으로 과거 공연 영상과 사진을 보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몰려오더라고요. 시간이 이만큼 흘렀구나 실감이 나면서… 뭐랄까, 내 안의 따뜻함이 밖으로 마구 분출되는 그런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더욱 특별했던 건, 공연 때 관객분들도 그 마음 그대로를 함께 나누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굉장히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초연 때를 회상하면 어떤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올라요?
마지막 장면에서 북한군과 남한군이 선뜻 헤어지지 못하고 숫자를 세면서 이별의 시간을 늦춰요.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한 명씩 돌아가면서 숫자를 말하죠. 제가 맡았던 순호가 맨 마지막에 “열아홉, 스물”을 세면 서로 헤어지는 건데, 막공날 ‘스물’을 내뱉으면 진짜 끝이란 생각에 ‘열아홉’을 두 번 반복했어요. 그 정도로 그때 우리 팀 하고 헤어지기 싫더라고요. 물론 공연이 끝나도 사석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지만, 더 이상 무대에서 이 공연을 함께할 순 없는 거니까. <여보셔>란 작품 안에서 함께 살아 숨 쉬는 시간이 없어진다는 생각이 당시의 저를 너무 슬프게 했어요.
이번에 참여하는 <레드북>은 <여보셔>의 창작진이 만든 두 번째 작품이에요. 출연을 결정하는 데 창작진에 대한 신뢰가 작용했겠죠?
제가 생각할 때 한정석 작가님, 이선영 작곡가님, 박소영 연출님, 세 분의 공통적인 매력은 ‘선함’이에요. 세 사람이 가진 따뜻함이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 있죠. 그리고 비슷한 결을 가진 사람들이라 그런지 셋이 함께할 때 시너지가 엄청나요. 이건 저뿐만 아니라 같이 작업해 본 배우, 스태프들은 다들 느낄 거예요. <레드북>은 이번에 처음 하는 작품이지만, 큰 틀에서는 <여보셔>랑 같은 색깔의 작품일 거라 기대해요.
<레드북>이란 작품은 언제 처음 알았어요? 창작자분들과 잘 알고 지내는 사이니까 창작 단계에서 작품에 대해 들었을 것 같아요.
선영 작곡가님 작업실에 놀러 갔다가 <레드북> 노래를 들었던 적이 있어요. 작곡가님이 요즘 신작으로 <레드북>을 준비 중인데, 거기 이런 노래가 들어간다면서 들려주셨거든요. 그때 들었던 노래가 ‘낡은 침대를 타고’랑 ‘당신도 그래요’예요. 두 곡 다 계속 “너무 좋다”를 남발하면서 들었는데, 특히 ‘당신도 그래요’는 처음 듣자마자 반해서 작품에서 제일 좋아하는 곡이 됐어요.
처음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는 어떤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어요?
첫 번째 생각은 ‘작업이 굉장히 기대된다’였어요. 잘 알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작품이니까 작업 과정이 즐겁겠다 싶었죠. 근데 두 번째로 든 생각은 ‘굉장히 부담스럽다’였어요. <레드북>은 뮤지컬을 좋아한다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잘된 작품이잖아요. 작품이 잘됐다는 건 그만큼 이 작품을 사랑하는 관객분들이 많다는 건데, 새로운 캐스트인 내가 기대감을 충족시켜 드릴 수 있을까 하는 부담을 느꼈죠. 하지만 제게 이런 좋은 작품을 제안해 주셨다는 사실이 감사하니까 열심히 최선을 다해보자고 마음먹게 됐어요. 여러 시즌의 공연을 거쳐오면서 작품의 가이드라인이 명확해졌을 테고, 그에 맞게 창작자분들과 잘 소통하면 재미있게 작업할 수 있을 테니까요.
출연을 결정하고 대본을 읽었을 때, 브라운의 첫인상은 어땠나요?
브라운은 ‘신사의 도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스스로를 신사 중의 신사라고 여기는 인물이에요. 그런데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안나로 인해 신사에 대한 기준을 바꾸게 되는 이야기 흐름이 매력적이었어요. 자기 소신과 주관에 큰 변화가 생기는 거잖아요. 저는 어떤 캐릭터를 파악할 때 보통 그 인물이 다른 인물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를 중점적으로 생각하는 편이에요. 제가 연기한 대부분의 인물이 실제의 저와는 다 달랐거든요. 브라운도 마찬가지예요. 브라운이 안나를 만났을 때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그 태도가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 생각하면서 인물을 만들어갈 생각이에요.
감사한 마음으로
안나는 브라운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니까, 안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브라운을 연기하는 데 중요하겠네요.
저는 <레드북>은 안나가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브라운이 성장해 가는 성장담도 담겨 있지만, 그 이야기의 중심에는 여성이 자기 뜻대로 살 수 없었던 시대에 당당히 자기 목소리를 낸 여성 안나가 있으니까요. 근데, 안나의 당당한 자기 외침이라는 게 사실은 굉장히 당연한 거거든요. 그래서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때 한 사람으로서 누려야 하는 당연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세상과 싸워야 하는 안나가 안쓰러웠어요. 안쓰러운 만큼 응원해 주고 싶었고요. 어떻게 보면 안나와 브라운은 N극과 S극 같은 사람인데, 서로를 끌어당겨서 N극과 S극의 경계가 없어지게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성민 씨가 생각하는 신사는 어떤 사람인가요?
음, 어려운 질문인데, 저는 신사에겐 ‘배려’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데 제일 중요한 자세는 존중과 배려 아닐까 하거든요. 스스로 신사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신다면, 제발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답하겠습니다. (웃음) 누군가에 대한 배려는 그 상대가 느끼는 거니까, 상대가 배려를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하며 살고 싶어요.
브라운 역으로 지금껏 작품에서 맡았던 직업에 변호사가 새롭게 추가됐는데, 간접 경험한 직업 가운데 가장 흥미로웠던 건 뭐예요?
산악인 이야기를 다룬 연극 <터칭 더 보이드>를 준비할 때, 실제 등반 대장님이 연습실에 오셔서 강의를 해주신 적이 있어요. 일반 사람들은 등반을 두고 ‘목숨 걸고 그런 걸 왜 해?’라고 생각하지만, 대장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등반의 매력을 조금이나마 알겠더라고요.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사고 상황에 침착하게 대처하신 경험담을 들으면서, 극한의 상황에서 통제력을 잃지 않는 게 가능한 일인가 곱씹어 보게 됐고요. 보통의 담력으론 할 수 없는 일이죠. 그날 대장님의 모든 이야기가 인상 깊게 남았는데, “등반가는 통제력을 잃는 순간 끝이다”라는 말이 유독 크게 와닿았어요. 실제 제 삶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요.
시간이 흘러 지금을 돌이켜 봤을 때, 새해의 첫 작품인 <레드북>이 어떤 선물이 되길 바라요?
선물이요? 선물은 제가 관객분들에게 드려야죠, <레드북>이라는 작품으로! 하하. 저 같은 경우엔 공연이 끝나고 시간이 좀 지나야 그 작품이 제게 어떤 의미였는지 깨닫게 돼요. 공연의 시작과 끝을 치열하게 보내고 나서 공연이 끝난 후에 어느 날 문득 작품 생각이 나는 순간들이 있어요. 그때, ‘아, 이 작품이 나에게 이런 선물을 주고 갔구나’ 알게 되죠. <레드북>이 저에게 어떤 작품으로 남을지 아직 알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해 공연하고 무엇보다 따뜻한 기억으로 남았으면 좋겠어요.
그럼 올해 스스로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요?
돌이켜 보면, 저는 지금까지 배우로서 진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솔직히 저는 제가 특별히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제가 제 자신에게 “어렸을 때 꿈꿨던 배우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 하고 물어보면 “당연하지!”라고 못 하겠어요. 다만 이 일을 좋아해서 계속하는 건데, 모든 사람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활동을 할수록 감사함이 더 커져요. 올해도 감사함을 잊지 않고 저에게 주어진 길을 차근차근 걸어가는 좋은 배우가 되고 싶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21호 2023년 2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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