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혐오의 시대에 건네는 사랑의 메시지
반가운 고전 뮤지컬이 돌아왔다. 제롬 로빈스의 안무 및 연출, 레너드 번스타인의 음악, 아서 로렌츠의 대본, 스티븐 손드하임의 가사로 잘 알려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다. 뮤지컬의 본고장 미국에서 반세기가 넘도록 사랑받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국내에서 1997년에 초연된 후, 2007년까지 5년 주기로 무대에 올랐다. 그 후로 한동안 볼 수 없었던 <웨스트사이드 스토리>가 무려 15년 만에 새로운 프로덕션으로 돌아왔다.
1950년대 뉴욕 슬럼가로 옮겨 온 『로미오와 줄리엣』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1950년대 뉴욕 슬럼가로 옮겨 온 작품이다. 1957년 초연 당시 브로드웨이에서는 로맨틱 코미디가 주를 이루고 있었고, ‘갱 폭력’을 소재로 삼은 비극적인 뮤지컬을 만드는 것은 대단히 낯설고 모험적인 시도였다. 그러나 공연은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크게 흥행했다. 초연이 약 2년간 732회에 이르는 장기 공연 기록을 세우는가 하면, 뒤이어 제작된 동명의 뮤지컬 영화는 아카데미상 10개 부문을 석권했다. 그리고 반세기가 지난 지금, 뮤지컬과 영화 모두 각각 그 자체로 하나의 고전이 되었다.
셰익스피어 원작에서는 몬터규와 캐풀렛 가문이 원수를 지게 된 사연이 베일에 싸여 있지만, 작가 아서 로렌츠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대본에 두 집단을 갈라놓은 갈등의 배경을 선명하게 그려 넣었다. 바로 백인 유럽계 이민자들의 자손으로 구성된 갱단 ‘제트’와 비교적 최근에 미국에 둥지를 튼 푸에르토리코 이민자 출신의 갱단 ‘샤크’가 뉴욕 맨해튼의 서쪽 동네를 두고 영역 다툼을 벌인다는 설정이다. 제트는 푸에르토리코 이민자들이 뉴욕으로 유입되면서 자신들의 기반이 흔들린다는 위기감을 느낀다. 그러나 자신들을 뉴욕의 토박이라고 생각하는 제트 역시 이민자 부모에게서 태어난 이민 2세대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샤크는 미국령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피부색이 짙고, 다른 언어를 쓴다는 이유로 차별과 멸시에 시달린다. 두 집단은 비슷한 처지임에도 서로를 이해하고 어울리기보다는 동네의 주도권을 두고 다툼을 일삼는다. 척박한 삶에서 느끼는 박탈감과 분노는,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향하기보다 다른 약자에게 쉽게 투사되기 때문이다. 서로에 대한 무지와 편견에서 비롯된 갈등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걷잡을 수 없이 고조되고 결국 이들은 동네의 ‘주인’이 누구인지 정하기 위해 최후의 결전을 벌이기로 한다.
이런 갈등 속에서도 마법과 같은 사랑이 싹튼다. 한때 제트의 리더였던 토니와 샤크의 리더 베르나르도의 여동생 마리아가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다. 사랑의 감정은 두 연인을 ‘해와 달과 별의 세계’로 데려가지만, 현실 속 그들의 사랑은 위태롭기 그지없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든 제트와 샤크의 싸움을 말리려던 토니는 오히려 살인자로 전락하고, 결국 본인도 목숨을 잃는다. 『로미오와 줄리엣』과 마찬가지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내러티브를 더욱 비극적으로 만드는 요소는 바로 주인공들이 모두 미숙한 ‘청춘’이라는 점이다. 사건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동안 어른들은 대개 부재하거나 무력한 방관자로 그려지며, 십 대 특유의 성급함, 무모함, 미숙한 판단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서 만들어낸 치기 어린 다툼이 이들을 때 이른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 작품의 비극성은 배가된다. 공연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극 중 사건이 하루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에 완결되는 것은 십 대들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두 연인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과 달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비극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이 희망을 상징하는 것은 바로 마리아다. 토니가 두 갱단의 패싸움을 말리고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 마리아는 부푼 마음으로 그를 기다린다. 의상으로 소속을 표시하듯 줄곧 샤크를 상징하는 빨간색이 섞인 옷을 입고 등장하던 마리아는 작품의 말미에 이르면 제트를 상징하는 푸른색 드레스를 입는다. 그러나 사랑의 설렘으로 물들어 있는 그녀에게 돌아오는 것은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이다. 토니의 시신을 에워싼 이들에게 번갈아 권총을 겨누며 “이제 나도 죽일 수 있어. 나도 증오하게 됐으니까!”라고 외치는 그녀의 날카로운 절규는 사랑만큼 강한 증오의 힘을 보여준다. 하지만 마리아는 누구에게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는다. 폭력의 순환 고리를 끊기로 선택하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서로 으르렁대던 제트와 샤크가 힘을 합쳐 토니의 시신을 옮기도록 함으로써 증오를 이기는 사랑의 초월적인 힘을 대변한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다시 주목받는 이유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사람으로 치면 어느덧 예순을 훌쩍 넘긴 나이가 됐지만, 최근 브로드웨이와 할리우드에서 21세기에 걸맞은 작품으로 재탄생해 화제를 모았다. 바로 연출가 이보 반 호브의 2020년 브로드웨이 프로덕션과 2022년에 개봉한 영화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의 뮤지컬 영화가 그것이다. 이들의 작업은 새로운 연출적 접근 외에도, 그간 작품과 동일시되다시피 했던 제롬 로빈스의 안무와 결별함으로써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그 자체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고전의 지위를 점하게 됐음을 보여주었다. 두 작품이 흥미로운 점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거나 애착을 가진 작품에 대한 오마주에 머무르지 않는 데 있다. 그렇다면 두 거장이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 다시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창작진은 어디에서도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브로드웨이와 할리우드에서 동시에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 주목한 이유는 아마도 근래 미국 사회의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두 프로덕션이 기획되고 준비 중이던 때는 2016년 대선에서 승리한 도널드 트럼프가 재집권을 노리던 2020년 대선 무렵이다. 노골적인 반이민 정서와 인종차별주의를 앞세워 백인 하층 노동자 집단을 결집시킨 도널드 트럼프의 승리는 여러 면에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보여주는 편견과 혐오가 미국 사회에 얼마나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지 확인시켜 주었다. 다양성이라는 미국적 가치를 훼손하고 갈등과 분열의 시대를 열어젖힌 트럼프 행정부 아래에서 인종 혐오 범죄가 눈에 띄게 증가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자칫 트럼프 정권이 연장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이보 반 호브나 스티븐 스필버그 모두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전하는 사랑과 화해의 메시지가 미국 사회에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이들은 1950년대의 뮤지컬을 소환해 정치적, 인종적 부족주의Tribalism가 갈수록 심화되는 오늘날의 관객에게 차별과 편견이 낳는 폭력의 위험에 경종을 울리고 사랑의 힘을 상기시킨다.
이보 반 호브가 선보인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코로나19로 뉴욕의 극장들이 일제히 문을 닫기 얼마 전, 작품의 여섯 번째 브로드웨이 프로덕션으로 막을 올렸다. 고전에 대한 도발적인 재해석으로 명성을 얻은 이보 반 호브의 첫 브로드웨이 뮤지컬 연출작인 데다가 제롬 로빈스의 안무를 택하지 않은 최초의 프로덕션으로 개막 전부터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이보 반 호브는 작품의 인기 뮤지컬 넘버 ‘I Feel Pretty(나는 예뻐)’를 삭제하는 등 웃음기를 걷어내고, 러닝 타임을 100분 정도로 압축해 순식간에 비극으로 치닫는 폭력의 순환 고리를 부각했다. 또한 제트와 샤크 조직원을 다인종으로 구성해 이민 시기에 차이가 있을 뿐 실상은 “다른 점보다 비슷한 점이 많은 사람들”이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여기에 벨기에 출신의 현대 무용가 안느 테레사 드 케이르스마커르의 절도 있고 파워풀한 안무를 통해 한층 동시대적인 느낌으로 작품을 재탄생시켰다. 시의성을 강조하는 선택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지만, 영상을 적극 활용하는 이보 반 호브 특유의 연출은 관객과 평단 양쪽에서 큰 호평을 받지 못한 채 팬데믹 속에서 일찍 막을 내리고 말았다.
스티븐 스필버그와 각본가 토니 쿠쉬너는 브로드웨이 오리지널 프로덕션 공연을 바탕으로 현재에 맞게 새롭게 각색한 영화를 선보였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그의 작업이 1961년 뮤지컬 영화의 리메이크가 아니라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영화화임을 누차 강조한 바 있다. 영화는 ‘웨스트 사이드’를 링컨 센터 건립을 위해 철거가 진행 중인 빈민가로 구체화하여 도시 재개발이라는 자본의 논리 앞에서 똑같이 해체 위기에 놓인 두 이민자 집단의 싸움을 조명한다. 특히 이민자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으로 전형화되기 일쑤였던 푸에르토리코 출신 이민자들에게 서사를 부여하고, 갈등의 뿌리인 인종과 문화적 차이를 균형감 있게 담아낸 게 영화의 강점이다. 백인이 피부색을 어둡게 분장하고 유색인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실제 푸에르토리코 출신 및 혈통의 배우들을 캐스팅해 직접 본인의 문화와 이야기를 전하도록 했다. 이런 선택은 재현의 윤리에 대한 제작진의 고민을 드러낼 뿐 아니라 이민자들이 모여 빚어내는 문화적 다양성과 역동성이야말로 미국 사회의 기반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코로나19로 인해 영화의 개봉이 지연되는 사이 도널드 트럼프가 재선에 실패함으로써 그가 펼쳐온 혐오의 정치가 재연될 가능성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가 호출한 혐오의 목소리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혐오의 목소리가 살아 있는 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던지는 사랑과 화해의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한국 무대에 오른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단일 민족 신화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한국 사회에서 ‘다수자’의 입장을 점하고 있는 대부분의 관객에게 미국 사회에 뿌리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민자들의 이야기는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게다가 한국인 배우들로만 이루어진 출연진에서 갈등의 핵심이 되는 인종, 문화적 차이와 거기서 발생하는 긴장을 온전히 읽어내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최근 여러 가지 갈등으로 진통을 겪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깊은 울림을 전한다.
이번 한국 프로덕션의 가장 큰 미덕은 브로드웨이나 할리우드식 각색이나 수정을 거치기 이전의 원작을 상상해 볼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이다. 오리지널 프로덕션에 충실한 연출은 한국 관객이 ‘고전’의 묘미를 온전히 감상할 기회를 선사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프로덕션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뮤지컬 넘버는 푸에르토리코 이민자들이 품고 살아가는 아메리칸드림의 이상과 현실을 뼈 있는 농담에 담은 ‘America(아메리카)’다. 1961년 뮤지컬 영화와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에서는 남녀가 티격태격하는 모습으로 그렸지만, ‘America’는 원래 아니타가 친구 로살리아를 놀리며 부르는 곡이다. 남성들 사이의 힘 대결이 작품의 주를 이루는 가운데 여성들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는 밝은 곡으로, 이번 한국 프로덕션에서는 원작의 분위기를 재현해 냈다.
무대,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서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으로 꼽히는 것은 뉴욕 거리의 풍경이다. 제목이 시사하듯 제트와 샤크가 동네에서 구역 다툼을 벌이는 만큼, 뉴욕의 ‘웨스트 사이드’라는 공간은 단순한 물리적 배경을 넘어서 하나의 인물로 기능한다. 초연의 무대 디자인을 맡았던 올리버 스미스는 도시의 풍경과 작품에 흐르는 긴장을 시각적으로 표현해 낸 무대로 토니 어워즈에서 최우수 무대 디자인상을 받았다. 당시 토니 어워즈에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거머쥔 상은 최우수 안무상과 최우수 무대 디자인상 단 두 개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대단한 성취이지만 제롬 로빈스, 레너드 번스타인, 아서 로렌츠, 스티븐 손드하임의 후광에 가려져 초연과 관련된 기록에서 무대 디자인에 대한 언급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번 한국 프로덕션에서 무대 디자인을 맡은 사람은 오필영 디자이너다. 최근 <웃는 남자> <드라큘라> <데스노트>에 이르기까지 인상적인 비주얼과 기술적으로 뛰어난 무대를 연이어 선보인 그답게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서도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무대를 선보인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대부분의 사건이 다세대 주택 일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만큼 건물 외벽에 비상 철제 계단이 달린 뉴욕 빈민가 특유의 다세대 주택이 무대를 채운다. 무대 디자인에서 돋보이는 것은 세트와 영상이 조화롭게 연결된다는 점인데, 특히 장면 전환 때 무대에 투사되는 거리 풍경 영상은 관객을 뉴욕의 거리로 이끌 듯 입체적이고 생생하다. 하지만 영상이 시적인 가사와 유려한 선율이 빚어내는 이미지를 지나치게 설명적으로 보여주거나 1950년대 뉴욕의 슬럼가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하고 세련된 이미지를 보여줄 때는 극적 요소들 사이의 조화와 긴장이 깨지고 만다. 무대가 가장 빛나는 장면은 장식적인 효과를 간소화하고 영상의 기능적인 면을 잘 살린 순간들이다.
무대 세트와 연출이 어우러져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장면은 엔딩이다. 마리아가 죽은 것으로 오해하고 길가로 뛰쳐나와 절규하던 토니는 마리아가 보는 앞에서 치노의 총에 맞아 쓰러진다. 닥 아저씨의 잡화점 앞이나 텅 빈 거리에서 토니가 죽는 것으로 연출되는 다른 프로덕션과 달리, 한국 프로덕션에서 토니가 죽음을 맞는 장소는 다세대 주택 건물 앞이다. 밤의 적막을 가르는 총성에 잠에서 깬 주민들이 발코니로 나와 토니와 마리아를 에워싼 제트와 샤크를 내려다보는 모습은 깊은 페이소스를 만들어낸다. 다른 프로덕션에서는 제트와 샤크, 경찰만이 이 비극의 목격자인 데 반해, 한국 공연에서는 폭력 사건의 당사자 이외에 동네의 다른 주민들까지 목격자로 끌어들임으로써 함께 어우러져 살아야 할 ‘이웃’ 간에 벌어진 참극에 또 다른 무게감을 더했다.
하지만 비극적인 메시지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 전에 ‘맘보!’를 외치는 커튼콜이 이어지면서 마지막 장면에서 길어 올린 시의성은 쉽게 휘발된다. 물론 고난도의 안무를 소화하며 열연한 배우들의 노고에 대해 관객들이 박수를 보내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만, 경쾌하고 밝은 분위기의 커튼콜은 작품에 담긴 메시지와 불협화음을 빚는다. 비극을 뛰어넘는 사랑의 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지닌 동시대적 의미와 가치를 관객에게 온전히 전하기 위해 이 공연이 지켜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20호 2023년 1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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