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선택이 모여
<이프덴> 윤소호
뮤지컬배우를 처음 꿈꿨던 고등학생 때부터 데뷔 후 11년째 무대에 오르고 있는 지금까지, 윤소호의 모든 선택은 흔들림 없이 ‘배우’를 향했다. 앞으로 그 앞에 놓일 수많은 갈림길에서 윤소호는 또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선택은 온전히 그의 손에 달렸지만, 차곡차곡 쌓아 올린 순간의 선택들은 결국 그를 ‘좋은 배우’라는 종착지로 안내할 것이다.
삶을 확장시킨 시간
사회복무요원 소집 해제 후 연극 <인사이드>를 통해 무대로 돌아온 지 벌써 1년이 지났어요. 소호 씨에게 지난 1년은 어떤 시간이었나요?
정말 쉴 틈 없이 바쁘게 지냈어요. 돌아보니 1년 동안 제가 출연한 작품이 쇼케이스 공연을 포함해 모두 여덟 작품이더라고요. 군 생활을 하는 동안 무대가 정말 많이 그리웠어요. 그래서 그 갈증을 채우기 위해 노력했죠. 사실 이렇게까지 다작을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웃음) 감사하게도 저를 찾아주시는 분들이 많았고 스케줄도 잘 맞아떨어져서 1년을 알차게 보낼 수 있었어요.
연극 무대를 통해 복귀한다는 소식을 듣고 의외의 선택이라고 생각했어요. 주로 뮤지컬 무대에서 활동해 왔으니까요.
복귀작을 정할 때 연극, 뮤지컬을 구분해서 생각하기보다는 관객과 가까이에서 호흡할 수 있는 작품을 최우선으로 생각했어요. 무대를 잠시 떠나 있는 동안 무엇보다 관객이 가장 그리웠거든요. <인사이드>는 200석 규모의 소극장에서 공연된 작품인데, 다시 무대로 돌아오게 된 이 순간에, 관객과 가까운 곳에서 오롯이 연기를 통해 소통하는 것이 의미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물론 작품 자체가 매력적이기도 했고요. 하나 더 이유를 찾자면, 소극장에서 배우 생활을 시작했으니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초심을 되찾자는 의미도 있었어요.
스물한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데뷔해서 연기가 인생의 전부인 삶을 살았잖아요. 군 입대 후 배우의 삶을 잠시 멈추고 새로운 환경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어떤 변화를 느꼈나요?
연기는 제 20대 시절의 전부였어요. 아르바이트를 해본 적도, 회사를 다녀본 적도 없으니 정말 연기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죠. 그러다가 병역 의무를 이행할 때가 왔고, 공연 중에 생긴 어깨 부상 때문에 사회복무요원으로 대체 복무를 하게 됐어요. 저는 서울시설공단 소속이었는데, 정확히 말하면 남산 1호 터널 요금소에 있는 사무실에서 근무했어요. 그곳에서 2년 가까이 시간을 보내면서 아직 내가 모르는 세상이 많다는 걸 체감했죠. 배우의 삶에만 갇혀 있지 말고, 더 넓은 세상을 알아가야겠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들더라고요.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나 민원인 등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다채로운 성격의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서 작품 속 캐릭터를 이해하는 범위의 폭을 넓히는 방법도 배웠고요. 그렇게 세상을, 그리고 작품을 바라보는 시각이 넓어졌다는 게 가장 큰 변화 같아요.
새롭게 선택한 삶
2022년의 마지막 작품으로 <이프덴>을 선택했어요. 주인공인 엘리자베스의 선택을 중심으로, 그의 삶을 두 방향으로 나누어 펼쳐내는 이야기죠. 작품의 어떤 점이 가장 흥미로웠어요?
우선 인물의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두 개의 삶을 보여준다는 구성 자체가 특별하게 느껴졌어요. 두 삶을 교차해서 보여주는 만큼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각각의 캐릭터가 명확한 색깔을 지녔다는 점도 좋았고요. 또 엘리자베스의 고민과 선택이 주요 소재가 되는 작품이다 보니 우리가 평상시에 하는 선택에 대한 생각이 작품 속에 담겨 있어요. ‘어떤 선택을 해야 하지?’라는 고민 혹은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했지’라는 후회는 누구나 하기 마련이잖아요. 그래서 누가 보든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했어요.
국내에서 첫선을 보이는 라이선스 뮤지컬이에요. 준비하는 과정은 어땠나요?
분명 라이선스 뮤지컬인데, 창작뮤지컬 작업을 하는 것처럼 같이 만들어가는 재미가 있었어요. 초연작이다 보니 매끄럽게 번역하는 게 특히 중요했는데, 그 과정에서 김수빈 번역가님의 공이 정말 컸죠. 연습실에서 저희가 연습하는 걸 직접 보시면서 캐릭터가 느끼는 감정에 더 어울리는 단어를 선택하고, 대사 톤을 잡으셨거든요. 배우들의 생각도 최대한 반영해 주셨고요. 그뿐만 아니라 음악을 손보고, 한국인의 정서를 담아내는 등 배우와 스태프 모두가 우리만의 <이프덴>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모든 과정이 즐거운 기억으로 남았어요.
소호 씨가 연기하는 조쉬는 ‘리즈’와 ‘베스’로 나뉘는 엘리자베스의 삶 중 ‘리즈’의 여정을 함께하는 캐릭터예요. 공연 설명에 따르면 우연한 만남을 운명적 사랑으로 만드는 인물이죠.
조쉬는 한마디로 굉장히 멋있는 사람이에요. 이런 사람이 현실에 존재할까 의문이 들 정도로요.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심이 굉장히 깊어서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죠. 자신의 감정에 따라 과감하게 결정하고, 그 결정에 책임을 지는 모습에서는 성숙함이 묻어나고요. 구체적으로 어떤 장면을 예로 들어 설명하긴 어렵지만, 관객분들도 공연을 보시고 나면 제가 왜 이렇게 얘기했는지 알아차리실 거예요! (웃음) 또, <이프덴>이 ‘선택’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긴 하지만 저는 어느 정도 운명을 믿는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조쉬도 극 중에서 운명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역할을 해요. 캐릭터 설명에 ‘운명적 사랑’이라는 키워드가 있는 것처럼요. 그래서 저와 더 가깝게 느껴진 것 같아요.
운명을 ‘어느 정도’ 믿는다는 말이 인상적이네요.
일어나는 모든 일에 ‘운명인가 봐!’ 호들갑 떨면서 의미를 부여하는 건 아니고, 어떤 힘든 일이 벌어질 때 ‘이게 내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지’라고 마음먹어요. 초연하게. (웃음) 견디기 어려운 상황을 맞닥뜨려도 도망가지 않고,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니 잘 이겨내 보자는 마인드예요.
조쉬는 리즈와 결혼해 가정을 꾸리죠. 이전 출연작에서는 주로 소년 캐릭터를 연기했는데, 이제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빠가 되어 무대에 선다는 게 감회가 남다를 것 같아요.
‘나도 이제 나이가 좀 들었나?’ 조쉬 역할을 제안받고 가장 먼저 이런 생각을 했어요. 공연제작사 쇼노트에서 제작한 연극 <알앤제이>에서 10대 소년 역을 맡은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이 회사에서 나를 아빠 역할에 어울리는 배우로 보는구나 싶더라고요. (웃음) 내가 내 아이를 생각하면서 연기하게 되는 날이 오다니. 연습실에서 저 스스로도 신기했어요. 조쉬가 부르는 뮤지컬 넘버 ‘Hey, Kid’는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며 행복감에 휩싸여서 부르는 노래인데, 저는 결혼을 해본 적도, 아빠가 되어본 적도 없으니 연습 초반에는 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막막했어요.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조쉬 역시 아직 아빠의 삶을 제대로 경험해보지 않은 상황인 거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조쉬가 느끼는 설렘과 벅참, 두려움 등 복합적인 감정을 더 잘 표현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관객들이 <이프덴>에서 또 어떤 점을 기대하면 좋을까요?
객석을 채워주시는 건 대부분 여성 관객분들인데, 아직까지도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은 흔치 않잖아요. <이프덴>은 40대를 앞두고 인생의 변곡점을 마주하는 여성 엘리자베스의 삶을 다룬 작품인 만큼 여성 관객분들이 자신의 삶을 대입해 보면서 더욱 깊게 공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엘리자베스와 비슷한 나이대에서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는 분들은 물론, 그 시기를 지나온 분들, 아직 그 시기를 마주하지 못한 분들 모두에게 생각해 볼 거리를 주는 작품이에요.
단 하나의 선택지, 배우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선택의 순간이 있나요?
처음 뮤지컬을 봤을 때가 생각나요. 고등학생 때 길을 걷다가 우연히 <노트르담 드 파리> 포스터를 보고 관심이 생겨서 공연을 보러 갔거든요. 그때 이후로 뮤지컬배우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그때 그 포스터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을 테잖아요. 하지만 공연을 보러 가길 선택했고, 뮤지컬배우가 되겠다고 선택했고, 대학에서 연기 전공을 선택했어요. 그 선택들이 지금의 저를 이 자리에 오게 했다고 생각해요. 두 번째로 떠오른 기억은 2014년 <킹키부츠> 초연 오디션을 봤을 때예요. 사실 그때 오디션보다 군대에 먼저 지원했어요. 그래도 경험 삼아 오디션은 한번 보고 가자는 생각에 오디션도 지원했는데, 오디션에 합격하고 오히려 군대를 떨어졌어요. (웃음) 그때도 제가 <킹키부츠> 오디션을 보겠다는 선택을 안 했으면 배우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를 일이죠.
배우의 삶과 연관된 굵직한 선택이 많았네요.
생각해 보니 <킹키부츠> 이전에도 군 입대와 배우 활동 사이에서 고민했던 기억이 나요. 데뷔작인 <쓰릴 미> 오디션을 보기 전에 지원했던 크고 작은 오디션에서 전부 떨어졌어요. 이제 막 20대에 들어섰을 때라서 ‘이럴 거면 차라리 군대를 먼저 다녀오자!’라고 마음먹고, 마지막으로 오디션을 본 작품이 <쓰릴 미>였어요. 그리고 합격했죠. 아직도 가끔 생각해요. 내가 <쓰릴 미> 오디션을 보지 않고 바로 입대했으면 내 인생은 지금과 얼마나 다른 모습일지.
<쓰릴 미> 오디션을 보지 않았다면, <노트르담 드 파리> 포스터를 보고 그냥 지나쳤다면, 그래서 배우가 되지 않았다면. 소호 씨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 것 같아요?
예전에는 이런 질문을 받으면 상상이 안 됐는데, 2년 동안 사회복무요원으로 근무하면서 확실히 느꼈어요. 난 배우가 아니었으면 공무원이 됐겠구나. (웃음) 직장 생활이 생각보다 저랑 잘 맞더라고요.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하는 것도, 업무를 처리하는 것도, 새로운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맺는 것도! 심지어 일도 제법 잘 해서 서울시장 표창까지 받았다니까요. 같은 팀 직원분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 보라고 장난스럽게 조언한 적도 있어요. 적성에 맞는 것 같다고. 그때가 딱 전역 1년 전이었는데, 나름 진지하게 고민했죠. ‘1년 동안 시험을 준비해 볼까?’, ‘이제 와서 준비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은가?’ 그만큼 직장인의 삶에 완벽히 적응한 상태였어요. 하하.
기존에 속해 있던 사회와 전혀 다른 환경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들을수록 놀랍네요. (웃음)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고, 그 다음에는 이왕 이 일을 하게 된 김에 최선을 다해보자는 마음이 따라왔죠. 다들 제가 배우 생활을 하다가 왔다는 걸 알고 계셔서, 업무에 불성실하게 임하면 공연예술인 전체를 욕 먹이게 될 거라는 걱정도 있었어요. 무엇보다 같이 일한 분들이 너무 좋은 사람들이어서 그 환경에 더 잘 스며들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저 스스로도 웃겼던 게, 전역할 때가 다가올수록 기뻐야 하는데 저는 좀 아쉽더라고요. ‘아, 이 정든 사람들을 떠나야 한다니!’ (웃음) 그때 친하게 지냈던 분들과는 종종 연락하며 지내고 있어요. 제가 출연하는 공연에 초대하기도 했고요.
수많은 선택을 거쳐 지금의 윤소호가 된 것처럼 앞으로도 소호 씨의 앞에 여러 선택지가 놓이겠죠. 배우로서 마지막으로 하나의 선택을 해야 한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 같아요?
좋은 배우가 되는 거요. ‘좋은 배우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예전부터 계속 고민했지만, 요즘 들어 더욱 자주 생각하고 있어요. 11년간 배우 생활을 하면서 가치관에도 변화가 생겼고, 다양한 작품에 출연하고, 많은 배우들을 만나면서 배우게 된 점도 많거든요. 사회복무요원으로 근무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넓어지기도 했고요.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서 나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니 답이 나왔어요. 무대 위에서도, 아래에서도 ‘잘하면’ 된다고. 무대 위에서는 캐릭터로서 잘 살아가고, 무대 아래에서는 같이 호흡하는 사람들과 잘 지내는 배우. 그게 좋은 배우 아닐까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19호 2022년 12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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