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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ZOOM IN] <범옹> 성삼문과 신숙주 운명을 가른 한순간의 선택 [No.218]

글 |김주연(공연 칼럼니스트) 사진 |전통문화포털 2022-11-23 534

<범옹> 성삼문과 신숙주
운명을 가른 한순간의 선택 

 

 

조선 왕조 역사 중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 중 하나로 손꼽히는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은 그동안 많은 연극, 영화, 드라마의 단골 소재로 활용되어 왔다. 이 피비린내 나는 비극의 주인공은 단종과 세조지만, 그들을 둘러싼 주변 인물 역시 꾸준히 주목받아 왔다. 그중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성삼문과 신숙주이다. 
 
비슷한 시작, 다른 운명
 
성삼문과 신숙주는 언제나 쌍으로 불리는 이름이다. 두 사람이 묶여서 회자되는 가장 큰 이유는 젊은 시절 함께 학문과 국정을 배우며 성장한, 가장 가까운 동지이자 친구였기 때문이다. 극과 극의 운명을 지닌 이들은 출신 배경이나 입신 과정이 상당히 비슷했는데, 두 사람 모두 사대부 집안 출신에 몇 년 차이로 과거에 급제해 조정에 진출했다. 나이 또한 고작 한 살 차이였다 하니, 이래저래 자주 만나고 엮일 수밖에 없었다. 약관의 나이에 조정에 들어간 두 사람은 낮은 직책을 전전하다가 당시 조정의 브레인이 다 모여 있던 집현전 학사가 되었고, 이때부터 촉망받는 학자이자 관리로 함께 성장했다. 집현전 학사 중에서도 세종의 각별한 애정을 받은 성삼문과 신숙주는 집현전의 연구와 편찬 사업에 적극적으로 가담했고, 당시 요동에서 유배 중이던 명나라 학자에게 중국 음운을 익히러 열세 번이나 방문하기도 했다. 머나먼 여정을 오가며 음운 연구에 몰두했던 두 사람 사이에는 자연스레 깊은 이해와 우정이 싹텄으며, 또한 한글 창제에 누구보다 큰 공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세종 사후, 병약했던 문종이 일찍 세상을 떠나고 어린 단종이 보위에 오르면서 조선 왕조는 혼란과 격변의 시기로 접어들었고, 두 사람의 운명도 갈리게 되었다. 
 
죽음으로 지킨 절개 
 
세종 시절부터 야망이 남다르고 정치에 뜻이 컸던 수양대군은 어린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세조는 조정의 주요 관직을 도맡고 있던 집현전 학사들을 중용함으로써 민심을 잠재우고 안정된 정치를 펼치고자 했으나 그중에는 신하된 도리로 결코 두 주군을 섬길 수 없다는 곧은 신념을 지닌 이들이 있었다. 성삼문은 가장 극명하게 수양을 반대한 인물이었다. 성삼문을 중심으로 한 몇몇 선비들은 세조를 몰아내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배신자의 고발로 모든 것이 들통나 버렸고, 쿠데타를 주모했던 이들은 모진 고문과 엄한 처벌을 받게 되었다. 이들이 바로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로, 이들은 죽음으로 충심을 다한 신하란 뜻의 ‘사육신’이라 불리게 된다. 잔혹한 국문 속에서도 성삼문은 꼿꼿한 태도로 세조를 꾸짖으며 단종에 대한 충심을 굽히지 않았다. 그 기개에 모두가 혀를 내둘렀지만, 대가는 참혹했다. 성삼문 일가는 형제와 아들, 손자 등 3대가 몰살을 당했고 아내와 딸은 노비로 전락했다. 비록 의거는 실패하고 참혹한 최후를 맞았지만 사육신의 충심은 역사에 길이 남았으며, 성삼문은 그의 호인 매죽헌梅竹軒처럼 고고한 매화의 향기와 곧게 뻗은 대나무의 절개를 지닌 충직한 선비로 사람들의 칭송을 받게 되었다.
 
변절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세운 업적
 
세조를 원수처럼 생각했던 성삼문과 달리, 신숙주는 그가 수양대군이었던 시절부터 친분이 두터웠다. 신숙주와 수양대군은 명나라 사신으로 중국에 다녀오기도 했고 종종 만나 시국이나 외교 문제를 상의하곤 했다. 왕위 찬탈 후 세조는 가장 믿음직하고 능력 있는 학자로서 신숙주를 중용했고, 신숙주는 이에 보답하듯 왕과 조정에 충성을 다했다. 그러면서 자연히 옛 친구인 성삼문과는 멀어지게 되었고, 결국 사육신 사건으로 인해 두 사람의 운명은 완전히 갈라지게 되었다. 세조의 신임 속에 신숙주는 출셋길을 달렸고, 동고동락하던 벗들이 형장으로 끌려갈 때도 공로를 인정받아 더 높은 벼슬을 받았다. 신숙주는 여섯 왕을 섬기며 영의정까지 지내는 등 부귀영화를 누렸으며, 그의 형제와 아들, 손자 역시 대대로 고관대작을 역임하며 가문의 영광을 이어갔다. 그러나 신숙주는 늘 성삼문에 딸린 이름처럼 언급되며 사육신의 충심을 더욱 드높이는 배신자로 호출되었다. 사람들은 신숙주를 여름철에 금방 쉬어버리는 녹두나물에 비유해 ‘숙주나물’이라 부르며 그의 변절을 조롱했다. 신숙주에게도 나름의 변명은 있었다. 냉철한 현실주의자였던 신숙주의 눈에는 어린 단종보다 강하고 성숙한 정치적 식견을 지닌 세조가 조선에 더 적합한 군주로 여겨졌기에 그는 세조를 자기 군주로 ‘선택’했다. 신숙주는 자신이 선택한 군주와 조정을 위해 수많은 공로와 업적을 쌓았다. 조선의 기본적인 예법과 절차 등을 규정한 『국조오례의』를 편찬해 문화정치의 기틀을 다지고, 조선의 대표적 법전인 『경국대전』의 편찬에도 관여했다. 또 명나라, 일본, 여진과의 외교에서도 많은 공을 세웠다. 신숙주는 사육신에 대비되어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지만, 조선 초기 제도와 문화가 정비되는 시기에 그가 쌓은 업적은 부인할 수 없다. 
 
각자의 선택에 최선을 다한 삶  
 
이처럼 젊은 시절, 함께 배우고 일하며 성장했던 두 친구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각기 다른 선택으로 완전히 다른 운명을 맞이했고, 이로 인해 극과 극의 평가를 받게 되었다. 사육신의 첫머리에 언급되는 성삼문이 충신의 표본으로 칭송받은 반면, 승자의 편에서 평생 부귀영화를 누린 신숙주는 변절자의 상징으로 비판과 조롱의 대상이 되어왔다. 충과 효를 중시하는 유교적 가치 체계에서 두 사람은 분명한 대비를 이뤘지만, 현실적인 측면에서 신숙주의 업적 역시 높이 평가되면서 최근에는 두 사람을 선과 악, 충과 불충 같은 이분법적 판단보다는 각기 다른 신념에 따라 서로 다른 선택을 한 인물로 바라보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 어느 쪽을 더 높이 여길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겨야 하겠지만, 적어도 자기 선택에 책임을 다하고 최선을 다했다는 점에서는 두 사람 모두 위인이 아닐 수 없다. 
 
참고 문헌
『그대는 적인가 동지인가』 이이화 저
『조선왕조 충의열전』 최완수 저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18호 2022년 11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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