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흐 헤스트> 김향안
예술을 향해, 예술을 위해 살다
천재 시인 이상과 근현대 미술의 거장 김환기의 아내. 수필가이자 화가, 미술 평론가, 전시 기획자, 미술 경영인으로 두루 활약하며 국내 최초로 사설 개인 미술관을 세운 사람. 김향안(본명 변동림) 여사의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처럼 극적이고 다채롭다.
시인의 아내
변동림은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전에 다니며 문학을 공부할 무렵, 친오빠가 친구와 함께 운영하는 다방에 자주 들러 책을 읽곤 했다. 그곳에서 변동림은 이상과 처음 만났고, 매일같이 함께 걷고 대화를 나누면서 자연스레 사랑에 빠졌다. 누구보다 날카로운 지성과 감수성을 지닌, 그러나 식민 치하라는 어둡고 답답한 현실 속에서 갈 곳 잃고 방황하던 두 젊음은 이상의 작은 방에서 소박하게 살림을 꾸렸고, 한 달 뒤 양가 어른들의 결정으로 정식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너무 일찍 끝났다. 동경에서 새로운 삶을 계획했던 두 사람은 각자 일과 아르바이트로 여비를 모았고, 먼저 돈을 마련한 이상이 동경으로 떠났다. 그리고 서너 달이 지나 변동림은 이상이 사상 불온 혐의로 구속되었다 풀려난 뒤 매우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기차에서 12시간, 연락선에서 8시간, 다시 24시간 기차를 타고 어렵게 동경대 병원에 도착한 그녀는 남편의 임종을 지킬 수 있었고, 그의 유골과 함께 며칠씩 걸려 서울로 돌아왔다. 20대 젊음의 한 시기에 불꽃같이 타올랐다가 너무 빨리 끝나버린 결혼이었기에 변동림은 이상의 아내로서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수필집에 실린 회고를 읽다 보면 세간에서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른 시인 이상의 진짜 모습을 그만큼 똑바로, 그리고 제대로 바라본 사람도 없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변동림에서 김향안으로
서울로 돌아온 변동림은 친구의 소개로 화가 김환기를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서신 교환을 통해 가까워졌다. 조혼과 이혼을 겪은 김환기에게는 이미 세 딸이 있었지만, 변동림은 “내가 낳아야만 자식인가, 데려다 교육시키면 되지”라는 마음으로 흔쾌히 결혼에 동의했고 두 사람은 1944년 성북동에 보금자리를 마련해 백년가약을 맺었다. 평생의 반려이자 영원한 동반자를 만난 변동림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김향안金鄕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새 이름은 남편 김환기의 성과 어릴 적 이름에서 따왔다. 이후 김향안은 김환기의 삶과 예술에 있어 결코 없어서는 안 될 협조자이자 동반자로, 그리고 예술적 뮤즈로서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김향안은 화가에게 예술적 영감을 전하는 수동적인 뮤즈가 아니라, 화가의 예술을 더 높이, 더 넓은 곳으로 이끌고 그의 예술을 현실에 탄탄히 뿌리내리게 하는 적극적인 뮤즈이자 예술의 길잡이로 활약했다.
아름다운 동행과 그 후
‘화가의 아내라면 반드시 미술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 김향안은 결혼 후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에 뛰어들었고, 타고난 미적 감각과 예리한 안목을 바탕으로 전문적인 미술 평론가, 전시 기획자의 자질과 재능을 스스로 갈고닦았다. 김향안의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태도는 김환기의 파리 유학 일화로 더욱 유명하다. 어느 날 밤, 술을 마시고 들어와 “도대체 내 예술이 어디(세계 수준)에 위치해 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하고 탄식하는 김환기에게 김향안은 “나가 봐! 내가 먼저 나가볼게”라고 말했고, 다음날 바로 프랑스 영사관을 찾아가 비자를 받고는 파리로 날아갔다. 김향안은 그곳에서 프랑스어를 배우고 아틀리에와 갤러리들을 파악하며 자리를 잡은 뒤 비로소 남편을 파리로 불러들였다. 덕분에 김환기는 낯선 곳에서 이방인으로서의 어려움 없이 작품 활동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1956년 파리에서 열린 김환기의 첫 개인전 역시 김향안이 미리 기틀을 잡아놓고 갤러리 사람들과의 인맥을 쌓아놓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평생 예술가의 가장 든든한 파트너이자 협조자로서 김환기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알리고,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섰던 김향안의 활약은 1974년 김환기 화백이 뇌출혈로 세상을 떠난 뒤 더욱 활발하게 이어졌다. 그의 유작들을 정리, 발굴하고 대규모 회고전을 통해 김환기의 예술 세계를 널리 알렸다. 1975년 환기재단을 설립하고 오랜 준비를 거쳐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 개인 미술관인 환기미술관을 개관했다. 종로구 부암동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환기미술관은 김환기 작품의 상설 전시뿐만 아니라 젊은 작가들을 지원하는 국제 공모전과 해외 교류전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해 동시대 미술과 끊임없이 교류하는 미술 담론의 장으로 지금도 활발히 기능하고 있다. 남편과 사별한 뒤 더욱 분주하게 활약했던 김향안은 김환기가 세상을 떠난 지 딱 30년째 되는 해인 2004년 뉴욕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고, 두 사람의 뜻대로 같은 곳에 함께 안장되었다.
스스로 예술이 되다
김향안은 예술가의 창조적 파트너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예술적 행적도 다양하게 남겼다. 『카페와 참종이』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 『월하의 마음』 등 그가 쓴 에세이들을 읽어보면, 김향안이 상당히 담백하면서도 세련된 문필가라는 사실을 금방 깨닫게 된다. 또 남편의 작품을 비롯해 당대의 파리 미술계나 국내 화가들에 대해 쓴 글에서는 날카로운 안목을 지닌 미술 평론가의 재능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글뿐만이 아니다. 평생에 걸쳐 쌓아 올린 미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은 그 스스로 붓을 들게 했고, 뉴욕의 포인덱스터 화랑과 서울 원화랑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며 화가로서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이와 함께 당대 국내에서는 드물게 한 개인의 예술 재단과 미술관을 설립하고 아트페어, 공모전, 해외 교류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예술의 사회적 가치와 의무를 강조했다는 데서 그의 넓고 깊은 예술관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평생을 예술가와 함께, 예술을 향해, 그리고 예술을 위해 살고자 했던 김향안의 의지는 이렇듯 우리 예술사에 깊고 또렷한 흔적을 남겼고, 삶 자체를 예술과 동의어로 만든 한 인물을 우리 앞에 펼쳐내었다.
참고문헌 『월하의 마음』 김향안 저, 『화가의 빛이 된 아내』 정필주 저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17호 2022년 10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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