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행은 강한 인상을 지닌 배우는 아니다. 대신 자신이 맡은 역할들로 강렬한 인상을 남겨주는 매력적인 배우다. 극공작소 마방진의 창단 멤버인 그는 그간 고선웅 연출 스타일의 과장된 연극화법을 매우 영민하게 소화해냈다. <칼로막베스>의 레이디 막베스, <푸르른 날에>의 오민호, <뜨거운 바다>의 기무라 덴베 등으로 이어진 그의 무대 중 어느 하나 뜨겁지 않았던 것이 있었던가. 마방진 전법을 잠시 내려놓은 순간에도 그의 진가는 빛났다. <히스토리 보이즈>의 어윈 선생님이 이명행이란 배우의 명료함을 그대로 각인시켜준 것처럼 말이다. <터미널>과 <스테디 레인>로 이어질 그의 무대가 기대되는 것 또한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고민과 노력을 담은 무대
무대 밖에서 만난 이명행은 참 따뜻한 사람이었다. 무대의 온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특히 호탕한 소리로 환하게 웃을 때는 상대를 무장 해제시키게 만드는 특별한 매력이 있었다. 마치 이솝우화 ‘바람과 햇님’의 햇님처럼 말이다. 그는 요즘 형식부터 심상치 않은 두 연극 <터미널>과 <스테디 레인>을 준비하고 있다.
<터미널>은 ‘창작집단 독’의 작가 9명이 ‘터미널’이란 공간을 배경으로 쓴 단편들을 모은 작품이에요. 옴니버스 형식이라 그간 출연했던 무대들과 느낌이 많이 다를 것 같아요.
아홉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보통 한 배우가 서너 작품을 맡아요. 전 <러브러브트레인>, <소>, <은하철도999>에 출연하죠. 하루에 다섯 편이 공연되니깐 그중 두어 편의 무대에 올라요. 특히 이번 무대는 호흡이 짧아요. 호흡이 길면 굳이 캐릭터를 강조해 설명하지 않아도 관객들이 인물을 자연스럽게 파악하잖아요. 반면 여기선 훅 나왔다가 훅 들어가거든요. 심지어 한 작품에선 멀티 역이고. 호흡이 짧은 만큼 캐릭터에 대한 고민이 많아요. 나아가 캐릭터의 변주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어요. 관객들이 하루에 여러 작품을 보고, ‘아 한 배우가 저렇게 달라지는구나’를 느끼는 것도 큰 재미거든요.
아홉 편의 작품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이야기를 하나 꼽으라면?
음…당연히 제가 출연하는 작품들…(웃음). 처음엔 작품들이 세고 강한 느낌이었는데, 점차 매력을 발견하게 되서 다 좋아요. 그중 메텔과 철이가 등장하는 <은하철도999>란 작품이 있는데, 제가 메텔로 등장해요. 처음엔 인철이 형(전인철 연출)이 왜 나한테 여자 역을 시키는 걸까? 걱정이 많았죠. 이 인물은 원작 만화에 나오는 메텔과 좀 달라요. 굉장히 신경질적이고 히스테릭해요. 고되고 힘든 삶을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죠. 그런데 이런 지점들이 또 <칼로막베스>의 레이디 막베스와 굉장히 겹쳐서 인상적이더라고요.
모노극 <러브러브트레인>도 눈길을 끌어요. 한 남자의 성적 판타지가 담긴 특별한 기차가 등장하는 이색적인 이야기던데.
모노극은 배우 혼자 모든 걸 짊어지고 가야 하는 것이 힘들지만, 그만큼 매력적이에요. 이창훈 배우와 더블 캐스팅됐는데, 처음에 창훈이가 대본을 읽을 땐 정말 재밌더라고요. 그래서인지 전 더 난관에 봉착했어요. 비사실적인 부분들은 막 까불면서 완전히 개그로 가야 하나? 모노라도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관객들에게 대사를 해야 하나? 고민이 많아서 버전도 여러 개가 나왔죠. 좀 더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쪽으로 갈 것 같아요.
<터미널>은 ‘터미널’이란 공간이 주인공인 작품이에요. 자연스레 터미널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봤을 듯해요.
그래서 인천공항이랑 연안 부두를 가봤어요. 인상 깊었던 건 인천공항의 어떤 높은 공간에서 한 여성분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었어요. 그 하나만으로도 굉장히 연극적이랄까. 위에선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고, 아래에선 끊임없이 지나가고. 나중에 저도 그곳에 앉아보기도 했어요. 터미널이란 공간 자체가 대단히 연극적인 늬앙스를 풍기더라고요. 처음엔 터미널을 물리적인 장소로만 생각했는데, 사고나 태도가 전환되는 지점일 수도 있겠다 싶었죠. 터미널이라는 추상적인 공간을 경험해 보는 건 좋은 일인 것 같아요. 여행을 떠나서 새로운 시공을 만나고 오는 것처럼. 이 작품이 소소함 속에서 그런 느낌들을 전해주는 것 같아요.
<스테디 레인>은 대사와 독백만으로 이루어진 2인극이에요. 게다가 장르는 르와르고. 처음 작품을 접했을 때 어떠셨나요?
무엇보다 형식이 매력적이었죠. 남자 둘이 등장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를 책임져야 하니깐. 두세 페이지가 넘는 대사를 독백해야 하기도 하고. 할리우드 느와르 영화 같은 내용인데, 이걸 연극으로 만든다는 사실이 흥미로웠어요. 연기해 보고 싶었죠.
대본을 보니 금방 몰입이 되던데요. 박진감이 넘쳐요.
저도 대본을 읽을 땐 그랬어요. 워낙 할리우드 영화를 많이 봤기 때문에 이 부분은 이런 장면이겠구나!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죠. 그런데 연극에선 배우들이 말을 통해 직접 그 그림을 채워야 하잖아요. 그게 참 힘든 지점 같아요.
시카고 경찰 조이와 그의 파트너 대니는 자신만의 방식대로 인생을 버텨내려 하지만 결국 비극을 향해 가죠. 조이의 경우 술로 하루를 보내다 대니와 그의 가족에 의해 조금씩 변해가던데, 과연 그는 어떤 사람일까요?
조이의 인생에서 중요한 화두는 사랑 같아요. (고)선웅이 형이 늘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사랑하면 알게 된다.’ 성경에 있는 말씀인데, 선웅이 형은 크리스천이 아니지만 이 말에 많은 키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저 역시 마찬가지에요. 사랑이란 감정이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것 같아요. 그래서 늘 상대에게서 매력을 느끼려고 노력해요. 작업을 같이 하는 사람들, 관객들, 가족들을 사랑하는 것이 삶을 전환할 수 있는 큰 에너지를 주거든요. 아무리 내가 열심히 무언가를 하더라도 그런 에너지가 없으면 결국 혼자 남게 되잖아요. 처음에 이명행이란 사람과 조이가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사랑 때문이었어요. 물론 그의 사랑이 올바른 형태의 것이 아니지만, 그가 전해준 첫 느낌은 그랬어요.
작품에선 어떤 사건 하나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인물들의 삶을 뒤바꿔놓잖아요. 이런 경우처럼 배우로서의 삶을 변화시킨 특정한 사건이나 계기가 있었나요?
배우로서 삶을 가장 변화시킨 건 극단에 들어간 거죠. 한예종 졸업 후 일 년 정도 이런 저런 활동을 했었어요. 그때 어떤 집단에 들어가는 것이 나에게 힘이 되겠다는 걸 느꼈어요. 프리랜서가 편하다는 분들도 많이 계시는데, 저는 소속되어 있는 느낌이 좋더라고요. 그러다 고선웅 연출님과 마방진 극단을 만난 거죠.
끊임없이 나아가는 배우
이명행은 고등학교 시절 연극반 활동을 하며 무대를 처음 만났다. 선생님이 되길 꿈꾸며 중앙대 불문과에 입학했지만, 오랜 전통의 연극 동아리 영죽무대에 들어간 뒤 자연스레 배우의 길을 걷게 됐다. 이후 한예종 전문사를 거쳐 2006년 <샤이닝 시티>로 데뷔했고, 2007년 영죽무대 출신인 고선웅 연출의 극단 마방진에 입단했다. <들소의 달>, <락희맨쇼> 등에서 맛깔스런 연기를 선보였던 그는 2011년 <푸르른 날에>의 오민호로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푸르른 날>에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커튼콜 때까지도 감정이 복받쳐 있는 것 이 인상적이었어요.
커튼콜 때 현재의 민호와 과거의 민호가 만나서 둘이 잘했다고 안아주는데, 참 뭉클해요. 극단 스타일 자체가 무대에 모든 걸 들이 부어야 해서, 공연 끝나면 마라톤 뛴 것 같은 기분이거든요. <칼로막베스>나 <뜨거운 바다> 모두 육체적으로 많이 힘들었지만, <푸르른 날에>는 거기에 감정적인 면까지 다 쏟아내야 했어요. 정말 힘들긴 하지만 커튼콜 땐 그 자체도 훈장처럼 느껴져요. 힘들게 했으니깐 내가 박수를 받는구나. 큰 에너지를 얻죠. 참, 멋진 작품이에요. 이 작품 이후로 많은 분들이 저를 알아봐주시기도 했고. 매년 공연을 할 때마다 만나는 사람들이 점점 확장되는 느낌이에요. 내년에도 공연이 예정돼 있어 4년 연속으로 5월에 같은 장소에서 작품이 올라가는 것 자체도 의미있고요.
어린 시절 꿈이 선생님이었는데, <히스토리 보이즈>에서 그걸 이뤘어요.
어윈은 역사 선생님이다 보니 강의가 너무 전문적이었어요. 선생님 역할을 누려보기엔 대사 자체가 버거웠죠.(웃음) 공연 시작하고 며칠 동안은 긴장해서 잘 몰랐는데, 이후에 제가 역사 이야기를 쭉 하는 장면에서 관객들의 표정이 보이더라고요. ‘와, 재밌다!’가 아니라 ‘무슨 이야기지?’ 하고 싸한데 집중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강의하면 이런 기분이겠다 싶었죠.
목소리가 좋아서 집중이 더 잘됐어요. 고선웅 연출이 이명행은 배우가 안됐으면 몸값 높은 성우가 됐을 거란 말도 했다던데.
<히스토리 보이즈> 때 유독 목소리 좋다는 말을 많이 듣게 됐어요. 생각해 보니깐 제가 선웅이 형과 공연을 많이 하다 보니 그동안 캐릭터들을 강하게 밀어 붙여왔거든요. 편한 목소리가 아니라 힘껏 힘을 줘서 말을 하니깐 오히려 목청 좋단 말을 많이 들었죠. 그런데 어윈 역은 편하게 일상적으로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러다 보니 ‘저 배우가 의외로 목소리가 좋구나’ 느끼신 것 같아요.
사실 마방진 스타일의 과장된 연기가 배우에겐 참 쉽지 않은 도전이에요.
선웅이 형을 만나서 좋았던 지점이 바로 그거에요. 학교에서 배웠던 것들은 거의 리얼리즘이었거든요. 현실에 매달리는 연기를 하다 보니 그땐 여유가 없었어요. 그러다 저희 극단에서 아예 다른 틀로 연기를 하게 된 거죠. 차츰 여유가 생기더라고요. 연극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됐고. 제가 운이 좋았던 거죠. 마방진 스타일은 기본을 다진 이후에 쌓을 수 있는 연기법이다 보니 아무래도 더 어려워요. 그래서 리얼리즘적인 기본이 바탕이 된 다음 선웅이 형을 만나야 하는 것 같아요. 극단 후배들도 그런 지점을 힘들어해요. 껍데기만 쓴다고 마방진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내적인 역할의 고민도 전제돼야 하고. 그 둘을 잘 조화시키는 게 쉽지 않죠.
무대에 오를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배우는 매력이 있어야 한다. 그게 답인 거 같아요. 이 공연에서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매력적인 측면을 늘 생각해요. 그리고 한 곳에 고여 있지 않고 호기심을 갖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배워나가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제가 악기 다루는 걸 좋아해요. 살면서 가장 순수한 위안을 주는 게 음악이더라고요. 어설프더라도 내가 직접 연주할 때 기분이 따뜻하고 편안해요. 요즘에 우크렐라를 배우고 있는데, 주위에서 그걸 보고 관심을 보이니깐 대화가 더 풍부해지더라고요. 배움이 참 중요한다는 걸 또 한 번 깨달았죠. 배우로서뿐 아니라 살아가는데 굉장한 에너지를 주니까요.
관객들에게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나요?
매력 있는 배우. 그리고 기분 좋은 에너지를 주는 배우요. 한땐 그게 고민이었어요. 저는 극장을 나서면 사람들이 잘 못 알아 봐요. 심지어 <푸르른 날에> 할 땐 공연장에서 만난 선배 배우가 “이 공연 정말 좋던데 너도 보러 왔냐”고 묻더라고요. 이게 맞는 걸까? 나만의 색깔이 없는 것 같았죠. 그런데 달리 보니 평소에 저를 알아봐주시지 않아도 캐릭터로 저를 기억해주시더라고요. <뜨거운 바다>든 <히스토리 보이즈>든. 그런 식으로 좋은 인상을 주고, 좋은 에너지가 있는 배우로 기억되면 좋겠어요.
10년 후의 이명행, 어떤 모습일까요?
사실 10년 후보단 마흔을 어떻게 잘 맞이할까 고민이에요.(웃음) 마흔이 되었을 땐 어딜 가든 ‘이명행이란 성실한 배우가 있구나!’ 이렇게 인정받을 수 있는 입지가 생겼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10년 후면 48세인데, 어른들이 그 시기가 남자로서 참 매력적인 나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때쯤이면 묵직한 이야기도 매력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배우였으면 좋겠어요. 10년 후에도 꾸준히 굴러갈 수 있는, 눈덩이로 치면 무게감 있게 커다랗고, 돌멩이로 치면 꾸준히 굴러서 이끼가 없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2호 2013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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