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더슈탄트>
우리의 맹세, 이 펜 앞에
재스퍼 뮬러에게
간밤에 네 편지를 받고 꿈을 꿨어. 오랜만이야, 그날의 경기장.
흩날리는 전단지 사이로 달려오던 제복 입은 사람들.
쓰러진 아이들의 새하얀 경기복 위로 꽃처럼 피어나던 핏자국.
너와 난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채 끌려가야만 했지.
아버지 때문에 풀려날 수 있었던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또 다른 불행이었다고 해야 할까.
집으로 돌아간 나는 더욱 거세진 스스로에 대한 경멸과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멀리멀리 도망쳤어.
유럽은 얼마 못 가 야욕의 포탄 속에 폐허가 되었지.
저항을 외쳐대던 열일곱 살 그때 그 시절이 무색하도록 난 아무도 모를 곳에 숨어 천천히 무기력에 잠식당했어.
참 겁쟁이지, 나?
하지만 계속 이렇게 비겁하게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칼끝 대신 펜촉으로 우리 이야기를 남기기 시작한 거야.
기억하기 위해서, 기억되길 바라서.
바스러진 우리의 청춘과 곳곳에 숨어 있을 우리 같은 청년들의 용기가 불씨처럼 퍼져 다시는 이 땅에 혐오로 인한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길 기도하는 마음으로.
아무튼 가장 큰 기적은 이 책이 너에게 닿았다는 거야.
나이 먹더니 안 어울리게 책방에도 가나 봐?
네가 일한다는 체육관에 곧 들를게.
넌 어쩌다 선생님이 되기로 마음먹었는지, 밤새도록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자.
아벨과 매그너스가, 라이너와 프레드릭이 함께 있을 그곳에 가기 전까지 남은 시간 동안 우리도 좀 끈끈해져 보자고.
하겐 악스만
(!) <비더슈탄트>는 1938년 독일 엘리트 스포츠 학교에 입학한 17세 펜싱부 소년들의 권력에 대한 저항과 우정을 그린 작품이다. 이 글은 하겐 역을 맡은 곽다인 배우의 상상을 바탕으로 한 가상 에필로그로, 펜싱 대회가 끝난 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16호 2022년 9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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