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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CULTURE INTERVIEW] 나도 알지 못한 나를 찾아서 <82년생 김지영> 임혜영 [No.215]

글 |안세영 사진 |맹민화 2022-10-13 718

나도 알지 못한 나를 찾아서
<82년생 김지영> 임혜영

 

<82년생 김지영>은 동명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연극으로, 평범한 가정주부 김지영의 삶 속에 자리한 차별과 그로 인한 상처를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출산과 육아로 경력이 단절된 채 고단한 일상을 이어가는 김지영 역에는 82년생 배우 임혜영이 캐스팅되었다. 화려한 뮤지컬 대신 소박한 연극 무대에서 동갑내기 배역을 연기하는 임혜영은 어떤 모습일까?

 

 

가장 보통의 삶

 

지난 5월 종영한 드라마 <결혼작사 이혼작곡>에 이어 연극 <82년생 김지영>까지 연달아 새로운 활동을 하고 있어요. 연극에 출연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뭔가요?
오래전부터 연극 무대에 서보고 싶었어요. 바로 그 기회가 지금 찾아온 거죠.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해보니 무대에서 연기할 때와는 또 다른 재미가 있더라고요. 배우로서 그동안 접해보지 않은 분야에 도전해 새로운 재미와 배움을 얻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졌어요. 그런데 마침 드라마가 종영하고 딱 좋은 타이밍에 <82년생 김지영>이 찾아온 거예요. 게다가 저와 주인공 김지영 모두 82년생에 이름이 ‘영’으로 끝나잖아요! 이건 운명이다 싶었죠.

 

연극에 참여하기 앞서 <82년생 김지영>의 원작 소설이나 영화를 본 적이 있나요?
소설보다 영화로 이 작품을 먼저 접했어요. 2019년 영화 개봉 당시 현실을 과장해 남녀 갈등을 조장한다고 곱지 않게 바라보는 시선도 있었는데, 저는 그렇게 느끼진 않았어요. 영화 속에 그려지는 김지영과 그 가족의 일상에 충분히 공감했거든요.

 

같은 82년생 여성으로서 김지영의 삶에 더욱 공감하는 부분도 있겠죠?
흔히 신세대라고 말하는 MZ세대에 저는 포함이 안 되는 줄 알았는데 81년생부터 96년생까지를 밀레니얼 세대라고 부르더라고요. 하지만 실질적으로 80년대 초반에 태어난 사람들은 기성세대와 신세대 사이에 있는 ‘낀 세대’라고 표현한대요. 어떤 면에서 앞선 세대의 보수적인 사고관에 더 익숙한 세대인 거죠. 예컨대 요즘은 아들딸 안 가리고 잘 키우자는 분위기이지만, 제가 어릴 때만 해도 딸보다 아들을 선호했어요. 할머니 댁에 가면 남자와 여자가 따로 앉아 밥을 먹었던 기억도 나요. 요즘 이삼십 대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저에게는 그 모습이 낯설지 않은 거죠. 물론 부모님 세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세대가 바뀐다고 오래된 관습이 단번에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당시에는 그렇게 사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기에 저도 그게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김지영 역시 그 시대를 통과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삶에 쉽사리 의문을 제기하기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해요.

 

반대로 경험해 보지 못한 결혼과 육아 생활을 연기하는 데 따른 어려움은 없나요?
직접 겪어보지는 않았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김지영과 비슷한 고충을 겪는 사람이 많잖아요. 제 주변 친구들만 봐도 결혼 전후, 출산 전후의 삶이 다르거든요. 외출 시간이 자유롭지 못해 만나기 힘들고, 아이 없이 외출하더라도 신경은 계속 아이에게 가있어요. 또 예전에는 만나면 서로 자기 이야기를 하기 바빴는데 어느새 화제의 중심이 아이 혹은 남편으로 바뀌더라고요. 친구들에게 듣는 결혼과 육아의 희로애락이 김지영의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어요.

 

이 작품은 김지영이 마치 빙의된 것처럼 다른 사람이 되어 말하는 장면으로 시작하잖아요. 김지영이 간혹 다른 사람처럼 변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김지영이 듣고 싶었던 말, 나아가 하고 싶었던 말을 하는 게 아닐까요? 긴 시간 동안 말하고 싶었지만 말하지 못한 채 꾹꾹 참아왔던 이야기요. 차마 자기 목소리로 하기 힘든 말이니까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를 빌려 마음속에 있던 이야기를 터트리는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지금의 ‘나’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을 것 같고요.

 

왜 ‘나’이고 싶지 않은 거죠?
딸로서 아내로서 엄마로서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는 삶을 묵묵히 살아오다가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으니까요. 다들 그렇게 사니까 그게 당연한 줄만 알았지, 견뎌야 할 고통이 이렇게 크다는 사실을 알려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극 중 김지영은 “엄마, 왜 힘들다고 얘기하지 않았어?”라고 혼잣말로 묻기도 해요.

 

김지영이 ‘나’이고 싶지 않아서 다른 사람으로 변하곤 했다면, 연극 후반부에 “나한테는 내가 있어”라고 말하는 변화를 이끌어내는 건 무엇일까요?
대본 리딩을 할 때마다 조금씩 생각이 달라지는데, 오늘은 엄마를 보며 느끼는 감정의 울림이 컸어요. 김지영에게는 아빠가 “얌전히 있다 시집이나 가”라고 말할 때 옆에서 대신 화를 내며 “얌전히 있지 마! 막 나대!”라고 얘기해 주는 엄마가 있잖아요. 엄마는 나를 이렇게 사랑하는데, 정작 나는 스스로를 싫어하고 있다는 사실이 미안하게 느껴졌을 것 같아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나를 존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연습에 들어가기 전이라 앞으로 어떤 답을 찾게 될지 모르겠어요.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리딩 작업을 오래 하고 있거든요.

 

대본 리딩을 하며 팀원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있나요?
여자와 남자가 극 중 일화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 대해 토론하기도 하고, 누군가 정말 그 시절엔 그랬는지 물어보면 82년생으로서 고증을 해드리기도 하죠. (웃음) 안경모 연출님과 함께 작업하는 건 2019년 가극 <금강> 낭독 공연 이후 두 번째인데, 아주 섬세하고 배우들 의견에 귀 기울여 주는 분이세요. 김가람 작가님도 대본에 저희 의견을 반영해 주시고요. 이전까지 대본 리딩을 이렇게 길게 해본 적이 없어서 신선하고 좋아요.

 

김지영은 극적인 삶을 살거나 개성이 두드러지기보다 보편성을 지닌 캐릭터잖아요. 배우 입장에서는 이런 캐릭터가 더 연기하기 어려울 법해요.
맞아요. 일상적인 연기가 제일 어려운 법이죠. 짧은 순간에 눈에 띄는 활약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잔잔한 강물처럼 흘러가야 할 것 같아요. 얇은 종이를 쌓듯 차근차근 감정을 쌓아서 결승선까지 가는 마라톤 같은 여정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한계 너머의 나

 

2020년 『더뮤지컬』과의 인터뷰에서 혹시 해보고 싶은 연극이 있느냐는 질문에 “<오만과 편견>처럼 일인 다역을 하는 작품을 해보고 싶다. 남성 배우가 극 중에서 일인 다역을 하는 경우는 많아도 여성 캐릭터 중에는 그런 역할이 드문 것 같다”라고 답한 적이 있어요. 어찌 보면 이번 작품에서 김지영이 다른 사람처럼 구는 장면으로 일인 다역 연기를 하는 셈이네요.
그렇지만 김지영이 완전히 그 인물에 빙의된 건 아니기 때문에 어떤 결로 연기해야 좋을지 고민 중이에요. 연습 기간 동안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며 답을 찾으려고요.

 

일인 다역을 해보고 싶었던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제 안에 항상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 배우일까?’라는 물음표가 있어요. 그래서 늘 어렵더라도 새로운 걸 해보고 싶어요. 저도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왜 자꾸 스스로를 힘든 길로 몰아가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무대에서 나의 한계를 넘어설 때 느끼는 짜릿한 희열을 놓을 수가 없어요.

 

지금까지의 출연작을 돌아보았을 때 가장 큰 도전이었다고 생각하는 역할은 뭔가요?
아무래도 코믹한 모습을 보여줘야 했던 <젠틀맨스 가이드>의 시벨라죠. 처음 연습에 들어갔을 때, 손거울을 보며 뻔뻔하게 “예쁘다, 난 역시 핑크!”라고 노래해야 하는데 “연출님 죄송해요! 못하겠어요!” 소리가 절로 나오더라고요. (웃음) 게다가 브로드웨이 오리지널 공연에서 시벨라 역을 맡은 배우는 키가 크고 섹시한 금발 미녀거든요. 음역대도 알토에 가깝고요. 저하고는 이미지나 음역대가 너무 달랐죠. 어떻게든 역할을 소화하려고 오리지널 공연과 다른 저만의 캐릭터를 구축했는데, 과연 사람들이 이 캐릭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어요.

 

하지만 역할에 잘 어울린다는 반응이 많았는 걸요. 자기중심적이지만 밉지 않고 사랑스러운 캐릭터가 탄생했죠.
처음에는 위축되어 있다가 칭찬을 받으니까 자꾸 제 안에 숨어 있던 장난기가 꿈틀꿈틀하더라고요. 무대에서 그렇게 툭툭 말하고 대담하게 행동한 건 처음이었어요. 그런데 그럴수록 관객들이 더 좋아하는 거예요. 제가 즐겁게 연기하면 그걸 보는 관객도 즐거워한다는 걸 느꼈죠. 나중에는 배우들끼리 서로 웃기려고 경쟁이 붙어서 제작사에서 진정하라고 하더라고요. (웃음) 연습할 때는 살이 쑥쑥 빠질 정도로 부담감에 시달렸지만, 막상 공연할 때는 원 캐스트인데도 힘든지 모르고 공연했어요.

 

9월에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을 무대화한 창작뮤지컬에 출연을 앞두고 있어요. 패러글라이딩을 하다가 북한에 떨어진 재벌가 상속녀 윤세리 역을 맡았는데, 이 작품의 어떤 점에 끌렸어요?
그동안 출연한 작품이 대부분 시대극이었는데, 이 작품은 현대가 배경이라는 점이 저한테는 색다르게 다가왔어요. 무엇보다 제가 원작 드라마 애청자예요! 동화처럼 아름다운 이야기라서 보고 있으면 힐링이 되더라고요. 윤세리가 북한 주민들, 군인들과 옥신각신하며 가까워지는 과정이 뮤지컬로 옮겨지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당당함 이면에 트라우마를 간직한 윤세리의 인간적인 모습도 잘 표현해 보고 싶고요. 물론 긴 호흡의 드라마를 뮤지컬로 옮기는 게 쉽지 않으리라는 걸 알지만, 저는 작품을 선택할 때 성공 가능성을 따지기보다 제 촉을 믿는 편이에요.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해야 하는 배우의 삶이 힘들게 느껴질 때는 없나요?
힘들어도 힘들다는 말을 안 하려고 해요. 힘들다고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진짜로 힘들어지거든요. 사소한 일로 짜증난다고 말할 때는 있지만 진짜 힘든 순간은 오히려 조용히 넘기는 편이에요. ‘이렇게 힘든 순간도 결국 지나갈 거야, 잘 해결해 보자’라고 생각하면서요. 아마도 2008년 <마이 페어 레이디> TV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여했을 때 극한의 심리적 압박감을 이겨낸 경험이 웬만한 어려움은 참고 견딜 수 있도록 저를 단련시켜 준 것 같아요.

 

앞으로 또 도전해 보고 싶은 역할이 있을까요?
귀엽고 사랑스러운 역할은 많이 해봤으니 <맨 오브 라만차>의 알돈자나 <스위니 토드>의 러빗 부인 같은 억척스러운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 계속 문을 두드리다 보면 기회가 오겠죠. 나이를 먹고 경력이 쌓일수록 무대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알게 되었지만, 그만큼 무대에 서는 게 더 재미있고 좋아지기도 했어요.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 배우인지, 이 무대 위에서 계속 알아가고 싶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15호 2022년 8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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