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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PECIAL INTERVIEW] <웃는 남자> 프랭크 와일드혼, 아직 그 순간이 오지 않았다 [No.215]

글 |김영주(공연 칼럼니스트) 사진 |김호근 2022-10-13 620

<웃는 남자> 프랭크 와일드혼
아직 그 순간이 오지 않았다

 

미식축구 팀 댈러스 카우보이스의 커다란 별 모양 엠블럼이 새겨진 야구 모자, 화사한 핑크색 셔츠, 청바지에 운동화, 호기심과 활기로 가득한 몸짓. 넓은 유리창 너머 남산이 보이는 호텔의 미팅룸에서 만난 프랭크 와일드혼은 '정규 음악 교육을 받지 않은 뮤지컬 작곡가'라는 인물 소개에 딱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폭넓은 스펙트럼의 뮤지컬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을 만나기 하루 전,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 중인 <웃는 남자>를 관람했다. 평일 낮 공연임에도 불구하고 가득 찬 객석을 보고 있자니,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의 세계가 돌아온 것만 같아 약간 뭉클해졌다. 3년 만에 한국을 방문한 프랭크 와일드혼도 같은 생각을 했을까? “정말 놀라운 일이에요. 학교나 직장에 있어야 할 그 젊은 관객들이 다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웃음) 며칠 전 극장 앞에서 어떤 젊은 여성 관객이 다가와서 사인받을 수 있겠냐고 묻더라고요. 흔쾌히 승낙했더니 그분이 무려 50장이 넘는 티켓을 내미는 거예요. 거기에 전부 다 사인할 순 없어서 첫 공연 날과 그날 티켓에만 사인을 했어요. 젊은 관객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에 얼마나 큰 열정을 가졌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에피소드라서 꼭 기억하려고 합니다.”
그는 한국 뮤지컬 시장의 특별한 점으로 언제나 젊은 관객층을 언급해 왔다. 또한 뮤지컬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의 특별함 역시 그들과의 소통에 있다. 이 작곡가는 고전 소설과 실존 인물의 삶을 다룬 작품을 쓰는데 탁월할 뿐 아니라 젊은이들이 사랑하는 일본 만화까지 자신의 작품 세계 안으로 끌어들이는데 거리낌이 없다. “제 부모님은 <카멜롯의 전설>을 좋아하시지만, 제 아이들에겐 너무 오래된 이야기죠. 저는 음악을 통해 <카멜롯의 전설> 같은 고전을 젊은 세대도 즐길 수 있도록 새롭게 만들고 싶어요. 이를테면 제가 가장 좋아하는 연극 <시라노>를 뮤지컬로 새롭게 만든 것처럼요. 제가 가장 싫어하는 게 뭔지 아세요? ‘이것은 뮤지컬이고, 저것은 뮤지컬이 아니다’라는 뉴요커들의 사고관이에요. 그 사람에게 손드하임의 음악은 뮤지컬이고, 제 음악은 그저 팝이죠. 하지만 많은 사람을 즐겁게 할 수 있다면 스타일이 무슨 상관일까요. 창작자라면 언제나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관능적이고 감각적인 음악


까다롭고 콧대 높은 뉴요커들에게 반발심을 가진 와일드혼은 아이러니하게도 뉴욕 할렘에서 태어나 퀸즈에서 자랐다. 열네 살이 되던 해 아버지의 건강 문제로 따뜻한 플로리다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수많은 첫 경험을 하게 된다. 열여섯 살 때 부모님과 함께 <지붕 위의 바이올린>을 본 일도 그중 하나다. 벌써 40여 년 전 일이지만 그는 유명한 유대인 배우 허쉘 버나디가 테비에 역으로 무대에 섰던 그 공연을 부모님이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생생하게 기억한다. 하지만 그는 첫눈에 뮤지컬과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 그 무렵 마이애미 해변의 안전 요원으로 생애 첫 일자리를 구한 소년은 이미 미식축구와 바이크, 그리고 로큰롤에 대한 열정만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히피들의 시대였던 1970년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그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편견 없이 흡수했다. 독학으로 피아노를 배웠고, 소울과 재즈에 푹 빠져서 밴드의 유일한 백인 멤버로 활동하기도 했다.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철학과 역사를 공부한 그에게 ‘뮤지컬 작곡가’의 미래를 전망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자신조차도 말이다. “단 한 번도 뮤지컬 작곡가가 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음악에 대한 애정이 저를 뮤지컬 작곡가의 길로 이끌었죠. 저는 곡을 쓸 때 이성의 스위치를 내려버려요. 제 안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무언가를 바라기 때문이에요. 어디서 어떻게 나오는지 알 수 없지만 제 안에는 다양한 음악들이 있고, 저한테 가장 중요한 건 ‘소울’이에요. 많은 작곡가가 음악은 수학이나 과학에 가깝다고 하면서 문제를 푸는 것처럼 곡을 써요. 그보다 저는 좀 더 관능적이고, 감각적으로 곡을 쓰는 게 좋아요.”


그의 대답에 어떻게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뮤지컬 작곡가’가 되었는지 힌트를 찾았다고 말하자 와일드혼은 흥미로워했다. 자신은 아직 그 이유를 찾지 못했다는 그는 ‘한국인들은 꼭 당신의 음악만큼 파토스가 강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는 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 배우들이 와일드혼의 ‘관능적이고 감성적인’ 곡을 특히 잘 소화하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의 내면에서 우러나온 음악의 정서를 배우들이 자신의 것처럼 자연스럽게 소화할 때, 노래의 본질이 관객들에게 오롯이 전달되면서 일어나는 커다란 울림만큼 사랑을 받게 된다.


인터뷰 전날 <웃는 남자>를 보면서 깨달았다. 관객들은 작품의 논리적인 치밀함보다 그윈플렌이 무엇을 욕망하는지, 데아가 왜 그 욕망을 갖게 되었는지, 그리고 조시아나의 욕망이 얼마나 진실한지 음악을 통해 전달되는가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리고 이 난제를 누구보다 능숙하게 해결하는 작곡가가 프랭크 와일드혼이다. 또 한 가지 특징이라면 타이틀롤인 그윈플렌뿐만 아니라 조시아나 여공작부터 앤 여왕 같은 여성 캐릭터들까지 자기 목소리로 노래한다는 점이다. 그의 작품에는 자신의 욕망이 옳든 그르든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인지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욕망을 추구하는 강한 여성 캐릭터들이 존재한다. 여성 해방 운동이 깃발을 높이 올린 1970년대에 성장기를 보냈기 때문일까. “그건 제 전처인 린다 때문이에요. 제가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이후 가장 노래를 잘하는 뮤지컬배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죠. 지금 당장 곡을 쓴다고 하면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성의 목소리는 바로 린다의 목소리죠.”

 

 

운명적인 세 번의 만남


관계의 한 시기가 끝난 후에도 변하지 않는 영원한 뮤즈를 만난 것은 창작자에게 더할 수 없는 행운일 거다. 돌이켜 보았을 때, 지금의 그 자신이 되기까지 결정적이었던 시기가 언제인지 궁금했다. “대학을 다니고 있던 1988년이요. 음악 인생의 멘토인 레슬리 브리커스를 만났는데 제가 습작으로 쓴 <지킬 앤 하이드>를 듣고 그러셨죠. 끔찍하군! (웃음) 그리고 제가 해야 할 모든 걸 가르쳐 주셨어요.” 레슬리 브리커스는 영화 <007>의 테마곡 ‘골드 핑거’, ‘캔디맨’을 쓴 작곡가다. 영화 <닥터 두리틀> <빅터 빅토리아>에 참여해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받았다. 프랭크 와일드혼과는 <지킬 앤 하이드>와 <시라노>를 함께 작업했다. “두 번째는 오디션 프로그램 <스타서치>에서 린다를 만난 거예요. 그해 제가 쓴 몇 곡이 히트하면서 나름 명성을 얻었어요. <스타서치> 우승자에게는 제 곡을 부를 기회가 주어졌는데, 그때 우승자가 린다였어요.” <지킬 앤 하이드>부터 <천국의 눈물> 콘셉트 앨범까지 호소력 짙은 파워풀한 목소리를 남긴 린다 에더는 와일드혼의 작품에서 꾸준히 만나게 되는 강인한 히로인의 원형 같은 존재이다. “마지막으로 연출가 그레고리 보이드를 만난 것도 행운이었죠. 그때 막 텍사스에 있는 휴스턴 앨리 시어터의 예술감독이 된 그에게 <지킬 앤 하이드> 초기 데모를 들려줬더니 첫 반응이 이랬죠. ‘이 여자 배우는 누구야? 그리고 작곡가는?’ 그 만남을 계기로 이듬해 앨리 시어터에 <지킬 앤 하이드>를 올릴 수 있었어요. 저는 레슬리와 함께 작품을 썼고, 그레고리가 연출을, 그리고 린다가 루시 역을 맡았죠. 너무 좋았어요! 당시 티켓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소동을 피우다가 극장 바깥 유리창이 깨진 적이 있어요. 매일 공연을 보러 오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정말 마법 같은 시간이었죠. 그때 그 경험이 저를 여기까지 이끌었어요.”

 

끝나지 않은 모험의 여정


휴스턴 앨리 시어터에서 시작된 모험의 종착지는 브로드웨이가 아니었다. 그는 지난 40여 년간 유럽과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상상도 못 했던 다양한 작업을 이어갔다. 일본에서는 그들만의 상징과 규칙으로 완성된 환상의 세계 다카라즈카의 작업에 참여했다. 그리고 다카라즈카에서 남성 역할의 전설적인 스타 와오 요우카의 남편이 되었다. 그는 휴대폰 갤러리에서 아내의 남역 시절 이미지 몇 장을 찾아 ‘나의 다카코’라며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다카라즈카가 어떤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세계인지 설명하는 그에게서 새로움과 다름을 사랑하는 모험가의 얼굴이 보였다. 그런 그에게도 가장 힘들었던 모험이 있을지 궁금했다. “독일에 있는 제 후원자와 함께 강변을 산책하는 중에 갑작스럽게 교향곡을 써보라는 제안을 받았어요. 처음에는 미쳤냐고 반문했지만 결국 하게 됐는데 정규 음악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 교향곡을 쓴다는 건 보통 사람이 에베레스트산을 오르는 것만큼 힘든 일이더군요. 교향곡을 쓰기 위해서는 클래식 작곡법을 공부해야만 했어요. 작년에 ‘도나우 교향곡(Donau Symphonie)’을 완성했고, 올 11월에 빈 심포니오케스트라와 초연할 예정이에요. 정말로 제 인생이 바뀌었다고 할 만한 경험이었죠. 지금까지 곡을 쓰면서 한 번도 닿지 않았던 곳에 갔던 이 도전을 마치고 다시 뮤지컬로 돌아왔을 때, 예전보다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졌어요.” 이미 성취한 것들이 많은 상황에서 명성에 해가 될 수도 있는, 혹은 약점이 드러날 수도 있는 도전을 나서는 이유를 묻자 그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만약 시라노라면 도전을 계속했겠죠? 저는 제가 시라노 같다고 생각하거든요.”


18년 전 코엑스 오라토리움에서 초연한 <지킬 앤 하이드>가 떠오른다. 뮤지컬에 최적화된 전문 공연장이 아닌 행사장이었지만, 그 공간에서 놀라울 만큼 몰입해서 무대를 지켜보던 관객들의 열기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 에너지가 2000년대 초반 한국 뮤지컬의 중흥에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도 알고 있다. 수요일 낮 세종문화회관의 꽉 찬 객석에서 <웃는 남자>를 보면서 그때가 생각났다. 끝나지 않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오랫동안 고통받은 뮤지컬계에 다시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 지금, 프랭크 와일드혼이라는 작곡가는 18년 전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사회의 모순과 저주받은 운명에 무릎 꿇지 않고 두 발로 일어서서 싸우는 남자와 여자. 관객들은 와일드혼의 인장이 찍힌 열정적인 음악으로 그려낸 그윈플렌의 모험을 뜨겁게 사랑했다. “한국의 관객들과 제 음악에는 마치 마법 같은 낭만적인 관계성이 있어요. 그걸 깊이 파고들어서 세세하게 분석하고 싶지 않아요.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일 같은 거죠. 소중히 여기고 보답하기 위해 노력할 뿐입니다. 어제 누군가 그런 말을 했어요. 지금 한국에서 매일 밤 제 공연을 보는 사람이 하루에 수천 명이라고요. 정말 어마어마하지 않나요? 그 모든 분이 제 공연에서 삶에 힘이 될 뭔가를 얻을 수 있길 바랍니다. 저의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믿으면서 도전할 거고 그 결실을 꼭 한국의 관객들과 나누겠습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15호 2022년 8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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