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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ZOOM IN] <첫사랑> 한 세기의 역사와 애수가 담긴 노래 [No.215]

글 |김주연(공연 칼럼니스트) 사진 | 2022-10-13 450

<첫사랑>
한 세기의 역사와 애수가 담긴 노래

 

한때는 소풍이나 MT 장기 자랑 시간에 단골로 불렸고, 몇몇 곡들은 남녀노소 애창하는 국민 레퍼토리였던 한국 가곡. 하지만 언젠가부터 가곡은 특별히 찾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추억의 장르가 되어버렸다. 마포문화재단이 제작한 <첫사랑>은 어느덧 첫사랑의 기억처럼 흘러가 버린 한국 가곡을 재료로 만든 창작뮤지컬이다. 김효근 작곡가의 가곡을 토대로 서정적 시어와 선율을 뮤지컬 넘버에 새롭게 담았다.

 

노래 가(歌), 가락 곡(曲). 옛시조에 가락을 붙인 우리나라 전통 성악곡의 하나인 ‘가곡’과 구분하기 위해 ‘예술가곡’이라 불리기도 하는 가곡은 시에 선율을 붙여 만든 장르의 특성상, 태생적으로 매우 문학적이고 서정적인 노래다. 모국어로 된 시어를 노랫말로 사용하다 보니 민족적 정서와 시대의 감성이 자연스레 우러나는 특징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강점기에 모국어로 부르는 가곡에 애수와 향수의 감정이 더욱 짙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많은 이들이 한국 가곡의 역사는 ‘봉선화’가 나온 1920년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본다.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김형준 시에 홍난파가 자신의 바이올린 독주곡 가락을 붙여 만든 ‘봉선화’는 구슬픈 선율과 서글픈 가사로 당시 나라 잃은 설움에 눈물짓던 많은 조선인의 심금을 울렸고, 사람들이 모인 곳이면 이 노래가 울려 퍼졌다. 결국 일본 당국은 가사가 불온하다는 이유로 이 곡을 금지곡으로 선언하기까지 했는데, 노래 한 곡이 지닌 파급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는 일화다. 이후 한 세기 동안 가곡은 굴곡진 우리 역사 굽이굽이마다 사람들의 설움과 애환을 담은 노래로 널리 불려왔다.

 

우리 전통과 서양 음악의 조화


형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가곡은 전통적이고 토속적인 가사와 서구적인 음악 양식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두 문화의 만남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시에 전통 가락이 아닌 서양 음악 형식을 접목하는 데에는 선교사에게 음악을 배우거나 일본에서 서양 음악을 공부하고 돌아온 젊은 작곡가들의 역할이 컸다. 1920년대 우리 가곡의 토대를 쌓은 1세대 작곡가 홍난파, 박태준, 안기영, 현제명, 이흥렬은 기독교 집안 출신이었다. 이들은 선교사나 찬송가를 통해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고, 유학을 떠나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같은 서양 악기 연주법을 익히고 돌아왔다. 서양의 세련된 음악 형식에 민족적 정서를 담아 새로운 시대의 노래를 만들고자 했던 1세대 작곡가 중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홍난파다. ‘봄처녀’ ‘사공의 노래’ ‘성불사의 밤’ ‘장안사’ 등 그가 쏟아낸 주옥같은 노래들은 조선의 마음과 서양 음악이 조화롭게 어우러졌다는 평을 받으며 우리 가곡의 토대를 탄탄히 쌓아 올렸다. 1세대 작곡가들은 초창기인 1920년대뿐만 아니라 1930년대에도 활발히 작곡 활동을 하며 한국 가곡의 어법을 한층 세련되게 완성해 갔다. 1930년대에 접어들어 일제의 수탈과 민족말살정책이 한층 강화되면서, 가곡에서도 향토성과 서정성이 부각되었던 1920년대와 달리 깊은 상실감과 비애가 드러나는 곡들이 대거 등장하게 되었다. 이은상 시, 김동진 작곡의 ‘가고파’, 정지용 시, 채동선 작곡의 ‘고향’ 등이 대표적인 곡이다. 이와 함께 민족의 기상과 강인한 의지를 담은 윤해영 시, 조두남 작곡의 ‘선구자’ 같은 노래도 널리 불리며 힘겨운 시대를 살아가는 민중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가곡의 대중화와 전성기, 그리고 쇠락


해방 이후 우리 가곡은 형식으로나 내용으로나 새롭고 다채로운 시도를 선보이며 자신의 범주를 한층 넓고 다양하게 확장했다. 김성태, 김순남, 이건우, 나운영, 윤이상, 이상근 등 해방 전후로 활동한 작곡가들은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극도의 혼란기 속에서도 ‘동심초’ ‘산유화’ ‘그네’와 같은 명곡을 탄생시켰다. 이 중 윤이상은 유럽을 주 무대로 활동하면서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의 음악 기법을 결합해 당대를 대표하는 현대음악가로 널리 이름을 알렸다. 1950년 이후 가곡은 질적, 양적으로 한층 더 발전했다. 비록 한국 전쟁과 분단, 전쟁의 후유증 등으로 힘겨운 시절이었으나, 이러한 시대의 아픔과 정서를 토대로 ‘떠나가는 배’ ‘보리밭’ ‘기다리는 마음’ 등이 널리 불렸고, 개인 가곡집과 가곡 모음집이 발행되면서 가곡의 대중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가곡은 그야말로 전성기를 맞이했다. 교과서에는 가곡이 필수로 포함되었고, 학교 음악 시간, 텔레비전 및 라디오, 음반을 통해 일상 어디에서나 정다운 가곡들이 울려 퍼졌다. ‘그리운 금강산’ ‘비목’ ‘목련화’ ‘님이 오시는지’ 등 이 시대를 대표하는 몇몇 곡들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국민 애창곡으로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가곡의 인기는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일단 당시 대중가요 장르가 인기를 끌면서 가곡은 상대적으로 뒤처지게 되었다. 시대 변화에 부응하여 대중 가수 이동원과 정통 성악가 박인수가 함께 듀엣곡 ‘향수(정지용 시, 김희갑 작곡)’를 불러 화제를 모으기도 했지만, 뒤바뀐 판세를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또 서유럽과 민간 차원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독일 가곡이나 이탈리아 오페라를 배우고 온 음악가들이 늘어났다. 자연히 국내 성악 공연도 독일 가곡이나 오페라 아리아 위주로 레퍼토리가 짜여졌고, 우리 가곡이 설 무대는 점점 좁아졌다. 학교 음악 교육도 가창보다는 감상이나 이론 쪽에 무게를 싣는 쪽으로 변화함에 따라, 가곡을 필수 과제로 부르는 일도 갈수록 줄어들었다. 희미해져 가는 가곡의 존재감을 다시 끌어올리기 위해 ‘우리 가곡의 날’을 제정하기도 하고, 소프라노 바바라 보니,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 등 해외 유명 성악가들이 내한 공연에서 한국 가곡을 불러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지만, 이 역시 꾸준히 이어지지는 못했다.


하지만 가곡은 저 멀리 일제강점기의 아픈 기억으로부터 해방과 전쟁, 분단에 이르기까지 비극으로 점철된 우리 역사의 현장에서 민중과 함께 울고 웃으며 성장해 온 귀중한 문화유산이자, 여전히 새롭고 다양한 조합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매력적인 예술 장르다. 한 세기에 걸친 역사와 애수가 담겨 있는 우리의 노래, 가곡에 생명력을 새로이 부여하고 더욱 확장시켜 나가야 할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다.

 

참고 문헌 
『한국 가곡사』 김점덕 저
『20세기 한국가곡의 역사와 체계』 김미영 저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15호 2022년 8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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