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나의 전부란 걸
<번지점프를 하다> 정택운·렌
“다시 만나 사랑하겠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번지점프를 하다>를 보고 나면 누구나 기억하게 되는 이 대사는 정택운과 렌의 이야기로 옮길 수 있다. 노래를, 무대를, 관객을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오늘도 두려움을 삼키고 무대에 오를 준비를 하는 이들. 네 번째 시즌으로 돌아온 <번지점프를 하다>에 새롭게 이름을 올린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새로운 운명을 만나는 법
정택운
뮤지컬배우로 데뷔한 후 줄곧 웅장하고 화려한 무대에 서있던 정택운이 차기작으로 <번지점프를 하다>를 선택했다. 어려운 숙제를 받아 고민이 많다는 그의 말과 달리 두 눈은 기대와 설렘으로 반짝였다.
진심으로 다가가기
<번지점프를 하다>(이하 <번점>)는 택운 씨가 지금까지 참여했던 작품과는 결이 달라요.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요?
지난해 <프랑켄슈타인>을 마치고 차기작에 대해 고민했어요. 지금까지 시대극만 했으니 한 번쯤 현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해보고 싶더라고요.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 연출님께서 출연 제안을 해주셨어요. 주변에서 워낙 좋은 작품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저도 작품에 욕심이 생겨서 출연을 결심했어요. 계속 외국인 역할만 맡다 보니 오랜만에 한국인 역할을 하고 싶기도 했고요. (웃음)
벌써 연습이 4주 차에 접어들었다면서요? 연습해 보니 <번점>은 어떤 점이 매력적이던가요?
제가 인우 역을 맡아서 그런지 몰라도, 극 중에서 인우의 심리 변화가 굉장히 섬세하게 그려진다는 게 매력적이더라고요. 태희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영문 모를 이별을 겪은 후 그녀와 똑같은 사람을 만나 다시 사랑에 빠지기까지 인우가 겪는 감정의 변화가 굉장히 드라마틱해요. 인우의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작품에 푹 빠져버리게 되죠.
무대에서 인물의 심리 변화를 보여준다는 건 까다로운 일이잖아요.
맞아요. 원작 영화처럼 여러 장치를 써서 세세하게 인물의 감정을 보여주긴 어렵죠. 제가 가장 고민하는 점도 어떻게 하면 인우의 심리 변화를 관객에게 잘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작품의 이야기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거든요. 결국 인물의 감정과 서사가 끊임없이 쌓여가야 하는데, 그러려면 제가 정말 인우가 되어야겠더라고요. 진짜 인우가 느낄 법한 감정을 보여줘야 관객을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문제는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거지만요. (웃음) 지금은 인우와 저의 닮은 점을 찾아보면서 인우에게 좀 더 빠지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
지금까지 찾아낸 인우와의 닮은 점이 뭔지 하나만 말해줄 수 있나요?
운명처럼 사랑에 빠지는 거요. 인우는 태희를 만나 운명처럼 사랑에 빠지고 나서 평생 태희를 사랑하잖아요. 저도 운명처럼 노래와 사랑에 빠졌고 평생 노래와 무대를 사랑하며 살 거예요. 인우와 저의 감정이 완전히 똑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떤 대상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원작 영화가 개봉된 지 벌써 20년이 지났더라고요. 뮤지컬이 초연한 지도 10년 가까이 되고요. 긴 시간 동안 이 작품이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해요?
운명적인 사랑을 이야기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누군가를 사랑하고 다시 태어나도 그 사람을 알아본다는 건 정말 특별한 일이니까요.
인우와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태희를 알아볼 수 있을까요?
저는 못 알아볼 거 같아요. 그러니까 <번점>이 특별한 거겠죠? (웃음) 하지만 전 운명을 믿어요. 아무리 원하고 바란대도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있는가 하면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루어지는 일도 있잖아요. 그런 게 운명인 것 같아요. 하지만 운명을 붙잡는 건 온전히 제 몫이라고 생각해요. <번점>에 나오는 “스치면 인연, 붙잡으면 운명”이라는 대사처럼 말이죠. 전 가수가 제 운명이었다고 생각하지만, 가수로서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제가 운명을 붙잡을 준비가 되어있다면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만날 사람은 만난다고 생각해요.
그럼 <번점>의 이야기가 굉장히 공감되겠네요? 이 작품은 운명을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저 잠시 핸드폰에 뭐 좀 적어도 될까요? 갑자기 생각난 게 있어서요. (핸드폰에 메모를 하며) 아까 인우와 제가 닮은 게 뭐냐고 물어보셨잖아요. 지금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운명을 믿는다는 점’이 닮았네요. (웃음) 그러고 보니 오늘 이렇게 『더뮤지컬』 표지 촬영을 하게 된 것도 운명인 거 같아요!
이렇게 인우와 닮은 점을 찾는 거군요! 인우와 닮은 점을 많이 찾을수록 조금 더 진실하게 인물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
당연하죠. 하지만 제가 아무리 진실하게 표현한다고 해도 관객들이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또 다른 문제인 것 같아요. 그래서 관객이 제 연기와 노래에 공감할 수 있게 하는 게 어려워요. 저 스스로 만족한다고 해서 좋은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니거든요. 기본적으로 제가 먼저 작품이나 인물에 마음이 움직여야겠지만, 저의 연기로 관객들의 마음이 움직여야 하니까 작품을 할 때마다 생각이 많아지는 것 같아요.
관객의 반응을 예상하는 건 항상 어렵죠.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본능적으로 연기하는 게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때도 있어요. 근데 저는 그게 잘 안 돼요. 열심히 고민하고 연구한 걸 표현하는 게 저한테는 더 잘 맞는 것 같아요. 가끔 생각이 너무 많아서 괴롭기도 하지만, 그걸 이겨내고 제가 생각했던 대로 해냈을 때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끊임없는 연습으로 만드는 무대
중학교 때까지 축구를 했다고 들었어요. 어떤 계기로 마음을 바꿨어요?
축구선수가 되기 전부터 음악을 좋아했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 제시카의 ‘굿바이’라는 팝송을 정말 좋아했어요. 어려서 영어를 잘 모를 때라 한글로 “아이 캔 씨 더 페인 리빙 인 유어 아이즈(I can see the pain living in your eyes)” 이렇게 발음을 써서 노래를 따라 불렀던 게 아직도 기억나요. 좀 자라서는 부활, 야다, 플라워 같은 그룹의 록 발라드를 많이 들었어요.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해서 노래방을 자주 갔는데, 그때 노래 좀 한다는 친구들은 노래방에서 꼭 록 발라드를 부르면서 고음을 내지르는 게 일종의 불문율이었거든요. 저도 그때 양재동에서 노래 좀 한다는 사람이었죠. (웃음) 중학교 때 부상으로 축구선수를 그만둔 뒤로는 본격적으로 가수의 꿈을 키웠어요. 저에겐 자연스러운 일이었죠.
어렸을 때부터 노래를 잘한 걸 보면 실력을 타고났나 봐요.
저는 노력파예요. 고3 때 실용음악으로 유명한 아현산업정보학교 보컬과에 들어갔어요. 수업 첫날 선생님이 보컬과 50명을 모아놓고 딱 다섯 명만 뽑아서 노래를 시켰어요. 제가 마지막 순서였는데, 제 앞의 친구들이 말도 안 되게 잘하는 거예요. 저랑은 차원이 달랐어요. 그때 깨달았죠. 제 노래 실력이 대단한 게 아니었다는 걸요. 제 순서가 돼서 노래하는데 너무 창피했어요. 그래서 학교 다니는 동안 매일 밤 9~10시까지 연습실에 남아서 연습했어요. 아마 그날의 경험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거예요.
뮤지컬 연습실에서도 노력형으로 유명하더라고요.
<마타하리> 초연 때였어요. 뮤지컬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고, 그렇게 큰 작품에 참여하는 건 처음이었어요. 연습실에 가니까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뮤지컬배우들이 다 있더라고요. 류정한 선배님이 연기하는 걸 보는데 숨이 턱 막혔어요. 그렇게 연기를 잘하는 선배님과 함께 무대에 설 생각을 하니까 앞이 캄캄해졌어요. 저는 전혀 준비가 안 된 것 같았거든요. 그때부터 연기와 노래 레슨을 받기 시작했어요. 선배님들도 많이 신경 써주시고 가르쳐 주셨어요. 선배님들이 저를 무대에 세워주신 거죠. (웃음) 같이 공연하는 선배님들을 보면 늘 자극을 받아요. 저도 그만큼 잘하고 싶어서 노력하다 보니 지금까지 오게 된 것 같아요.
만약에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더 잘할 자신이 있나요?
아뇨! 그때의 공연 영상을 보면 너무 부끄럽지만 그게 그 당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는걸요. 저는 매일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후회하는 게 싫거든요. 지나간 일을 후회하면 과거에 연연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없잖아요.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고, 미련 없이 오늘을 보내줘요. 그래서 매일 새로운 하루를 열심히 사는 거죠. 뮤지컬을 할 때도, 가수 활동을 할 때도 저의 모든 역량을 쏟아붓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아요. 다시 그때로 돌아간대도 그 이상은 못 할 거예요. 대신 앞으로 더 잘하기 위해서 평소에 연습을 많이 하죠.
뮤지컬을 할 때는 어느 정도 연습해요?
프로덕션에서 진행하는 연습 외에 개인적으로 연기나 보컬 수업을 따로 받아요. 잘 안되는 게 있으면 될 때까지 연습해요. 뮤지컬을 할 때는 뮤지컬에만 집중하려고 되도록 다른 스케줄은 안 잡아요. 그래서 연습 시간은 대중이 없어요. (그럼 언제 쉬어요?) 밤에 집에서 와인 한잔하면서 쉬죠. 아, 근데 딱 그 시간이 혼자 집중하기 좋은 시간이어서 대본 들여다볼 때가 많아요. 뮤지컬은 여러 배우와 함께 호흡을 맞춰야 하는데 제가 준비가 덜 돼서 폐를 끼칠 순 없잖아요. 상대 배우와 호흡을 맞춰가려면 그에 맞는 실력과 에너지가 있어야 하니까 연습이 더 필요해요.
벌써 뮤지컬배우로 데뷔한 지 8년이 지났어요. 이제는 좀 무대가 편하게 느껴지나요?
아니요. 무대에 서는 건 여전히 어려워요. 작품을 할 때마다 새롭게 연기하고 노래해야 하니까 저에겐 늘 도전이거든요. 작품에 따라 조금 더 어려운 게 있긴 해요. <프랑켄슈타인> 때는 노래를 부르는 게 어려웠고, 이번 <번점>은 심리 변화를 표현하는 게 어려워요. 특히 <번점>은 지금까지 제가 해왔던 작품과는 다른 스타일이라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더 걸리기도 하고요. 인우를 이해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이 너무 어렵지만, 그만큼 더 노력하고 있으니 좋은 결과가 나올 거라고 믿어요. 저도 제가 어떻게 인우를 완성하게 될지 무척 기대돼요. 작품이 좋으니까 저만 잘하면 될 거 같아요.
마지막 질문이에요. 뮤지컬배우로서 어떤 꿈이 있나요?
뮤지컬 무대에 서있는 동안 저는 빅스의 레오도 아니고 정택운도 아니에요. 그저 작품 속 인물로 존재해요. 연기를 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좋아요. 앞으로도 무대 위에서 다양한 인물의 삶을 살아보고 싶어요. 오래오래 뮤지컬 무대에 서는 것. 그게 뮤지컬배우 정택운의 꿈이에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13호 2022년 6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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